新 투자 기법 도입 나선 정부, ‘경직’된 韓 벤처시장 풀어내기 위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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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투자 시장 촉진 정책 시행, 국내 벤처시장 숨통 트이나
시의성 중요한 벤처정책, "민간자본 퇴화하니 유연성 떨어져"
민간투자 가로막는 규제 파편화, 법률 재정비 시간 필요할 듯
투자조건부-융자-구조도

최근 투자조건부 융자, VC(벤처캐피탈) 직접투자 특별보증 등 벤처투자 시장을 촉진할 새로운 투자 기법이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앞으로 국내 벤처시장에서도 다양한 운용 전략이 가능해질 것으로 보인다. 다만 국내 벤처투자의 중심이 중앙정부라는 점은 국내 시장의 여전한 숙제로 남았다. 당장 이번 투자조건부 융자 제도 도입 또한 정책시차가 근 3년에 달했음을 고려하면, 민간자본 육성이 보다 시급히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중기부, 투자조건부 융자 사업 개시

5일 벤처투자업계에 따르면 중소벤처기업부는 벤처투자촉진법 개정안 시행에 따라 내년부터 투자조건부 융자 사업을 개시한다. 중기부는 중소벤처기업진흥공단을 통해 내년부터 500억원 규모로 사업을 개시할 예정이다. 투자조건부 융자는 벤처투자를 받은 상태에서 후속 투자유치 가능성이 큰 기업에 저리로 융자를 지원하는 대신 소액의 지분 인수권을 받는 제도다. 이를 본격 시행하기 위해 중기부는 ‘투자조건부 융자 계약 운영 규정’을 제정하고 신주 배정 한도를 최대 5%로 규정했다. VC의 스타트업 직접 투자를 장려하기 위한 제도도 내년부터 실시된다. 중기부는 현재 기술보증기금과 함께 보증 운용 세부 지침을 수립 중이다. 현재로서 중기부는 VC가 스타트업에 직접 투자하기 위해 은행 등에서 자금을 빌릴 경우 융자금의 80%까지 최대 50억원 한도에서 기술보증기금이 보증할 수 있도록 하겠단 계획이다.

벤처투자시장에선 새로운 제도 도입으로 인해 다양한 성격의 자금이 시장에 유입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단순 투자 목적의 재원을 넘어 정책기관 중심의 융자·보증 등 장기 성격 자금이 섞이는 만큼 투자 전략 역시 다변화할 것이란 전망이다. 특히 최근 기업가치 하락 등으로 신규 투자가 쉽사리 이뤄지지 않는 상황에서 유용한 옵션이 될 것이라는 기대감이 크다.

오는 21일부터 조건부지분전환계약이 허용된다는 점도 호재다. 조건부지분전환계약이란 기업가치 산정이 어려운 스타트업에 우선 융자를 제공하고 후속 투자를 유치할 경우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방식을 뜻하는데, 이는 앞서 도입된 조건부지분인수계약(SAFE)과 유사하지만 만기가 존재하고 채권성 자금이라는 점에서 투자자에게 보다 유리한 계약으로 꼽힌다. VC가 설립한 투자목적회사(SPC)가 대출을 받는 게 가능해지면서 시장 유연성이 늘었단 평가도 나온다. 앞으로 대규모 투자는 물론 M&A를 원하는 전략적투자자(SI)가 SPC 지분을 보유하는 것도 허용되는 만큼 다양한 운용 전략이 가능해질 전망이다.

정책시차 3년? 경직된 韓 벤처투자 시장

투자조건부 융자 제도 도입 추진 논의는 지난 2021년부터 이어져 왔다. 기술력만 있고 담보가 없는 스타트업이나 벤처기업이 VC로부터 투자를 받을 때 창업자 지분이 희석되는 문제를 타파하겠단 취지에서였다. 실제 이 같은 문제점으로 인해 창업자는 VC로부터의 대규모 투자를 꺼리게 되고 이로 인해 유능한 스타트업이나 벤처기업이 유니콘(기업가치 1조원 이상의 비상장 기업)으로 성장하는 데 발목이 붙잡히는 경향이 적지 않았다. 당시 중기부 관계자는 “무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지만 꽃을 피우지 못하고 사장되는 벤처들이 많다”며 “유니콘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정교한 맞춤형 정책이 필요하다는 판단 아래 제도 도입 추진을 기획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금융기관 입장에서도 후속 투자 가능성이 큰 벤처에 대출을 해줘 회수 가능성을 높이고 동시에 지분인수권을 통해 기업이 성장했을 때 금리보다 높은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는 만큼 큰 장애 없이 제도 도입이 가능할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다만 관련 제도의 국무회의 의결이 이뤄진 시점은 제도 도입 논의가 시작된 지 2년여가 지난 지난 6월께였다. 이날 국무회의를 통과한 벤처투자법 개정안은 오는 21일부터 본격 시행될 예정이다. 사실상 도입 논의가 시작된 지 3년이 지난 시점에서야 첫 삽을 뜨게 된 셈이다. 정부정책에 시차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여기서 정책을 시행해야 할 원인이 발생해 관련 정책을 수립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을 내부시차(inside lag), 수립된 정책이 실제로 집행돼 정책효과가 나타나는 데 걸리는 시간을 외부시차(outside lag)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정부 정책은 정책이 수립되기까지의 내부시차가 긴 반면 정책효과가 나타나는 데 걸리는 외부시차는 짧다. 적절한 입법 절차를 거치는 데 시간이 걸리긴 하지만, 일단 정책이 수립되고 나면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데 그리 많은 시간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는 벤처정책에 있어선 시의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단 점이다. 당장 1년이란 시간만 지체돼도 성장 가능성 있던 기업이 무참히 짓밟힌다.

2023.06.13-국무회의
6월 13일 서울 용산 대통령실에서 국무회의가 열리고 있다/사진=대통령실

여전한 ‘정부 중심’ 시장, “한계 뚜렷해”

우리나라 벤처시장의 경직도가 높아진 건 국내 벤처시장 자체가 민간 중심이 아닌 국가 및 정부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민간에 탄탄한 자본이 형성돼 있지 않으니 정부 차원에서 억지로 투자 체계를 갖춰나가고 있는데, 상황이 이런 만큼 벤처시장이 필요로 하는 유연성을 갖추기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민간 투자기관을 관리하는 부처와 관련 법률이 상이해 규제 차이가 발생하고 있단 점도 민간 투자를 가로막는 요소 중 하나다.

예컨대 벤처투자법의 적용을 받는 중소기업창업투자회사(창투사)는 설립 자본금 20억원이 필요하지만 여신전문금융업법의 적용을 받는 신기술사업금융업자(신기사)는 100억원의 설립 자본금이 필요하다. 또 창투사는 운용 중인 총자산의 50% 이내에서 대통령령으로 정하는 비율 이상을 벤처기업 등 법에서 정한 기업에 반드시 투자해야 하는 등 투자 관련 규제를 받는 반면, 신기사는 규약상 신기술 사업자에 투자하면 되고 법 단계에선 일정 규모 이상의 투자 의무를 부여하지 않는 등 투자에 있어 상대적으로 자유롭다. 

이처럼 벤처투자 관련 민간 투자기관이 다양한 부처와 법률로 각각 관리되는 경우는 우리나라를 제외하고 전 세계적으로 유례를 찾기가 어렵다. 이 또한 국내 벤처시장이 정부 주도 아래 발전했단 역사가 발목을 잡은 결과다. 실제 국내 벤처시장은 1986년 중소기업창업지원법이 제정된 이래 정부 주도의 부처별 정책적 지원으로 발전해 왔다. 이 과정에서 파편화된 투자 규제책이 마련된 건, 시대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음에 분명하다. 다만 벤처투자 시장이 한 단계 더 성장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결국 민간 주도의 시장으로 변화할 필요가 있다. 산재돼 있는 벤처투자 관련 법을 정비해야 한단 목소리가 높아지는 이유다. 미국처럼 모험자본의 새로운 도전이 장려되는 사회가 구성돼야만 벤처시장 내에서도 몇 년가량의 정책 시차가 불가피한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