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빙하기’ 비상장주식에도 ‘봄 바람’, IPO 훈풍이 시장 녹였나
비상장주식 거래 건수 '두 자릿수 성장세', 왜? "IPO 대어 영향 컸다"?, 일각선 "시장 위축에 세컨더리 시장 열린 셈" 투자시장 회복 요원할 듯, 업계서도 "올해는 완전 회복 힘들 것"
지난해 비상장주식 플랫폼의 거래가 확연히 늘어난 것으로 확인됐다. IPO(기업공개) 시장이 활기를 띠면서 비상장주식 거래 수요가 늘어난 영향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이에 시장에선 올해도 △에이피알 △HD현대마린솔루션 △SK에코플랜트 등 IPO 대어들이 기다리고 있는 만큼 이 같은 흐름이 이어지리라 기대하고 있지만, 일각에선 관점을 달리 해야 한다는 의견도 나온다. IPO 대어가 다수 포진한 것보단 시장 위축이 이어지면서 소위 주식을 ‘던지고 나가는’ 이들이 많아진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비상장주식 거래량 ‘급증’, 시장선 “IPO 훈풍 덕인 듯”
15일 벤처투자업계에 따르면 증권플러스 비상장의 2023년 거래 건수는 13만4,948건으로 전년 대비 12.6% 증가했다. 서울거래 비상장도 거래 건수가 크게 늘었다. 2023년 서울거래 비상장의 거래 건수는 전년 대비 74% 증가하며 두 자릿수 성장세를 보였다. 비상장주식 거래 플랫폼은 2020년 3월 금융위원회의 혁신금융서비스(금융규제 샌드박스) 일환으로 탄생했다. 비상장주식 거래에서 발생하는 극심한 정보 비대청성을 해소하고 일반 투자자들도 안전하게 거래할 수 있도록 하겠단 취지다. 비상장주식 거래 플랫폼은 일종의 장터로, 매도자와 매수자 간 가격의 눈높이가 맞으면 거래가 체결되고 플랫폼과 연동된 증권계좌로 주식을 주고받을 수 있다. 증권계좌를 통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비상장주식 거래에서 발생하는 허위매물 등의 사기를 막을 수 있으며, 비상장주식 거래 활성화를 통해 스톡옵션을 활용한 인재 영입에도 도움을 줄 수 있다.
비상장주식 거래가 활발해지자 시장에선 “지난해 IPO 훈풍 덕에 기대감이 커진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실제 2023년엔 스팩(SPAC·기업인수목적회사)과 리츠(REITs·부동산투자신탁)를 제외한 일반기업 82곳이 상장했는데, 이는 전년 대비 12곳 늘어난 수준이다. 상장일 공모수익률 역시 2023년 83.79%(시초가 매도 기준)으로 2022년 29.87%보다 크게 높아졌다. 이에 상장이 기대되는 비상장주식을 미리 선점해 더 큰 수익을 노리는 일반 투자자들이 늘어났다는 게 시장의 시선이다.
비상장 거래량 증가의 핵심은 IPO 대어?, “글쎄”
다만 이에 대해선 반론의 여지도 적지 않다. 비슷한 상황이었던 2022년 당시엔 비상장 주식 거래시장이 오히려 위축돼 있었단 것이다. 빅데이터 플랫폼 업체 모바일인덱스에 따르면 서울거래 비상장의 MAU는 2022년 7월 전월 대비 4,351명 줄어든 1만9,059명을 기록하는 데 그쳤다. 증권플러스 비상장의 경우 7월 전월 대비 1만1,153명 줄어든 15만2,076명을 기록했다. 특히 2021년 12월과 비교하면 더 큰 폭의 감소세를 보였는데, 서울거래 비상장은 2021년 12월 대비 2022년 8월 33.5% 감소했으며 동기간 증권플러스는 MAU가 무려 50.8% 감소했다. MAU는 한 달 동안 해당 서비스를 이용한 순수한 이용자 수를 나타내는 지표로, 서비스가 얼마나 활성화됐는지 보여준다.
즉 당시 비상장 거래 시장은 상당 부분 얼어붙어 있었단 소리다. 올해 IPO 공모 금액이 2022년 대비 77.6% 급감하며 2019년 이후 최저 수준을 기록했음을 고려하면, 올해 비상장 주식 거래량과 IPO 대어 사이의 관계성은 사실상 없다시피 하다 해도 무방하다는 지적이 쏟아진다.
IPO 대어에 대한 기대감이 비상장주식 거래량에 묵흔을 남긴 거라면 거래액 자체도 크게 늘어야 하는데, 정작 거래 건수 증가량 대비 거래액 증가량은 미미하다는 의견도 나온다. 당장 증권플러스 비상장만 봐도 거래 건수는 전년 대비 12.6% 증가했지만 동기간 거래액은 2,447억원에서 2,359억원으로 오히려 3.6% 줄었다. 이는 곧 가격을 낮춰 거래한 비율이 높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서울거래 비상장의 경우 거래액이 늘긴 했지만, 거래 건수가 전년 대비 74% 늘어난 데 비해 거래액은 37% 증가하는 데 그쳤다. 이에 대해 투자업계 관계자는 “결국 벤처기업의 가격 폭락이 가시화함에 따라 싼값에 주식을 ‘털고 나가는’ 인원이 많아지면서 덩달아 거래 건수가 늘어난 것이란 방증 아니겠나”라고 설명했다.
키 포인트로 떠오른 ‘세컨더리 시장’
이를 종합해 확인해 볼 수 있는 올해 투자 흐름의 키 포인트는 ‘세컨더리 시장’이다. 세컨더리란 기존에 PEF(사모펀드) 운용사나 VC들이 이미 투자한 지분을 사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초기 투자자는 조기에 투자금을 회수할 수 있고, 후속 투자자는 검증된 회사에 투자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통상적으로는 증시 상장 이후 지분을 매각하는 방식으로 자금을 회수하지만, 최근엔 펀드 만기 시기보다 IPO까지 걸리는 시기가 길어지면서 세컨더리 방식이 시장의 주류로 자리 잡았다. 실제 올해 초부터 VC들은 그간 쌓인 드라이파우더(미집행 투자금) 소진을 위해 구주 투자에 주목하는 분위기다. VC들의 드라이파우더가 상당히 쌓여 있는 만큼 세컨더리 시장에서 받아줄 여력 또한 충분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정부와 스타트업 업계도 세컨더리 시장 활성화를 환영하는 모양새다. 정부 차원에서의 규제 완화책도 나왔다. 중소벤처기업부와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4월 ‘혁신벤처·스타트업 자금지원 및 경쟁력 강화 방안’을 통해 현행 벤처투자촉진법에 규정된 세컨더리펀드의 20% 신주투자 의무 규정을 완화하겠다고 발표했다. VC업계가 세컨더리펀드 운영의 어려움으로 제기했던 신주투자 의무 규정을 없애 펀드 결성과 투자를 활성화하겠단 취지다. 스타트업 관계자는 “세컨더리에 구주를 매각한 VC들은 새로운 펀드를 결성할 수 있어 벤처투자의 돈맥경화가 뚫릴 수 있다”며 “스타트업 입장에서도 펀드 일정에 맞춰 무리하게 IPO를 추진하지 않아도 돼 긍정적일 것”이라고 전했다.
다만 세컨더리 수요 증가에 따라 비상장 주식 거래량도 당분간은 증가세를 유지할 것으로 보이지만, 결국 IPO 지연이 이어지면 시장 회복이 더뎌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투자업계에서도 올해 투자시장의 완전 회복은 요원할 것이란 예측이 우세한 것으로 알려졌다. 밸류를 낮춰서라도 투자금을 유치하고자 하는 벤처들이 늘어나는 만큼 VC 사이의 ‘옥석 가리기’도 점차 심화할 가능성이 있다. 이와 관련해 한 투자업계 관계자는 “투자 유치에 어려움을 겪으면서 올해 스타트업의 옥석 가리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것”이라며 “확실하게 자금을 회수할 수 있고 리스크가 적은 곳들을 위주로 기회를 노리고 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고금리 기조 장기화에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등 국내 경제의 뇌관이 속속 나타나고 있는 시기인 만큼 세컨더리 이후 시장 기조를 미리 예측해 대비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