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시장 휩쓰는 ‘AI 투자’ 광풍, 약인가 독인가
"AI, 너무 과장됐다" 구글 딥마인드 CEO의 우려 가라앉은 실리콘밸리까지 되살리는 'AI 광풍' 기준금리 인하 지연·시장 거품 등 부작용 우려 커져
생성형 인공지능(AI) 분야가 암호화폐와 같은 ‘과장 광고’ 상품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AI 관련 사업에 대규모 자금이 유입되며 과대광고가 잇따르는 가운데, 정작 AI 기술이 과학·기술계에 안겨줄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은 뒷전으로 밀려났다는 지적이다. 구글 딥마인드의 공동 창업자 데미스 하사비스(Demis Hassabis) 최고경영자(CEO)는 지난달 31일(현지시간) 파이낸셜타임스(FT)를 통해 이같이 밝혔다. 최근 스타트업계를 중심으로 AI 투자 과열의 조짐이 관측되는 가운데, 곳곳에서 시장 부작용에 대한 우려가 흘러나오는 양상이다.
“AI, 과거 암호화폐 시장과 유사해”
하사비스는 “생성형 AI 스타트업과 제품에 쏟아지는 수십억 달러의 자금이 과대광고, 어쩌면 그를 넘어선 ‘사기성 사건’들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일갈했다. 실제 2022년 11월 오픈AI가 챗GPT를 최초로 선보인 이후, 투자업계에는 그야말로 ‘AI 광풍’이 불어닥쳤다. 스타트업들은 앞다퉈 생성형 AI를 개발하며 자금 유치에 나섰고, 투자자들은 이에 화답했다. 시장조사 업체 CB인사이츠에 따르면 지난해 벤처캐피탈이 투자한 AI 스타트업 개수는 2,500개, 투자 규모는 총 425억 달러(약 57조원)에 달한다. 공개 시장 투자자들도 마이크로소프트, 알파벳(구글 모회사), 엔비디아 등 AI 관련 빅테크 종목에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하사비스는 암호화폐 시장에서 펼쳐졌던 일들이 AI 산업을 통해 재현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암호화폐 시장에 몰렸던 자금이 이제 AI 시장에 넘쳐흐르게 됐는데, 이는 다소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이는 경이로울 수 있는 과학 및 연구에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이어 “어떤 점에서 AI는 충분히 과장되지 않았으나, 또 어떤 점에서는 너무 과장됐다”며 “우리는 현실이 아닌 온갖 것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고 부연했다. AI 기술이 단순 투자 수단으로 전락하며 ‘혁신’의 가능성이 외면받는 현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다만 그는 “여전히 AI는 인류 역사상 가장 변혁적인 발명품 중 하나라고 확신하고 있다”며 “아직 우리는 AI 기술력의 겉부분만을 보고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는 아마도 (AI를 중심으로 하는) 새로운 황금시대(Golden Era), 새로운 르네상스의 시작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짚었다. AI가 혁신을 이끈 사례로는 딥마인드의 ‘알파폴드’ 모델을 들었다. 2021년에 출시된 알파폴드는 현재 전 세계 100만 명 이상의 생물학자들이 사용하는 모델로, 2억 개의 단백질 구조를 예측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AI 열풍 타고 날아오른 실리콘밸리
하사비스 CEO가 지적했듯, AI 광풍은 스타트업계에 거대한 변화를 몰고 왔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입지가 위축됐던 미국 샌프란시스코 실리콘밸리가 AI 투자 유행을 타고 ‘부활’한 것이 대표적인 예다. 팬데믹 당시 실리콘밸리는 △빅테크 기업의 대규모 해고 △높은 생활비 △원격 근무 확대 등 겹악재를 떠안았다. 스타트업들은 하나둘 실리콘밸리를 떠났고, 업계 일각에서는 실리콘밸리가 전통적인 스타트업 허브로서의 기능을 상실했다는 분석마저 흘러나왔다.
하지만 AI를 중심으로 스타트업 투자 시장이 활기를 되찾으며 상황이 변했다. 미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지난해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 내 스타트업에 대한 투자 규모는 전년 대비 12% 줄어든 634억 달러(약 84조원)로 집계됐다. 이는 텍사스 오스틴, 로스앤젤레스(LA), 마이애미 등 여타 지역에 비교하면 안정적인 수준이다. 특히 마이애미의 경우 지난해 벤처투자 규모가 자그마치 70% 급감했다.
최근 들어서는 과거 실리콘밸리를 떠났던 기술 기업들의 ‘복귀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LA, 뉴욕, 마이애미 등을 떠돌던 핀테크 스타트업 ‘브렉스’ 경영진은 지난해 말 샌프란시스코로 복귀했다. 미국 스프레드시트 앱 스타트업 ‘에어테이블’ 경영진 역시 LA에서 샌프란시스코까지 영업 범위를 확대했다. AI 스타트업인 ‘스케일 AI’ 투자자 측도 마이애미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재차 활동 지역을 옮겼고, 일론 머스크 테슬라 CEO가 작년 설립한 신생 AI 스타트업 ‘xAI’도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에 둥지를 틀었다.
AI 과열이 시장에 미치는 영향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 같은 AI 산업 과열이 ‘혁신 저하’ 이상의 문제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일례로 지난달 미국 경제 전문지 비즈니스인사이더(BI)는 아폴로글로벌매니지먼트의 토르스텐 슬록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인용, 미국 증시를 이끄는 AI 광풍이 연방준비제도(Fed)의 금리 인하를 막을 수 있다는 비관적 전망을 보도했다. AI 산업의 과열이 인플레이션 장기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시각이다.
슬록 이코노미스트는 “올해 Fed가 금리를 전혀 인하하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는 극단적 전망을 제시했다. Fed 측이 연내 3회 금리 인하를 점친 것과는 대조되는 의견이다. 그는 한 인터뷰에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AI 거품 속에 빠져 있다”며 “기술주가 오르면 금융 여건이 완화된다는 부작용이 있다. 이는 Fed(금리 인하 결정)를 어렵게 만들고 있다”고 주장했다. 금융 여건 완화는 Fed의 긴축 목표에 역행하며, 이대로 경제 성장이 가속화될 경우 Fed가 올해 말 금리 인상을 재개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다.
업계 일각에서는 AI 시장이 90년대 인터넷 확산 시기 ‘닷컴 버블’ 사태와 유사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는 평도 나온다. 인터넷이 급속도로 보급되며 일반인의 인터넷 사용이 보편화한 1990년, 각국 인터넷·통신 관련 기업에는 막대한 투자 자금이 몰리기 시작했다. 여태껏 없었던 ‘첨단 기술’인 인터넷 산업이 시장을 장악, 산업계 전반에 거대한 지각변동을 불러올 것이라는 기대가 실리며 관련 시장이 과열된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이들의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고, 얼마 안 가 투자자들은 막심한 손해를 떠안게 됐다.
AI 산업 역시 이와 유사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AI 광풍’이 본격화한 것은 챗GPT 등 AI 관련 지식이 전무한 이용자도 쉽게 접할 수 있는 모델이 시장의 주목을 받으면서부터였다. 첨단 기술인 AI의 미래 가능성을 무조건적으로 신뢰하는 투자자들은 관련 시장에 대규모 자금을 쏟아붓고 있다. 이 같은 이상과열 현상은 AI의 본질적인 발전 가능성을 해칠뿐더러, 관련 시장의 건강한 성장을 저해할 위험이 있다. 업계 일각에서는 AI 광풍이 ‘유행’에 따른 일시적인 거품일 뿐이며, 차후 시장 흐름에 따라 수많은 이가 손실을 떠안을 수 있다는 우려마저 흘러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