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기의 이혼’ 재산분할도 역대급, 지배구조 위기 속 자금 마련 ‘비상’
서울고법, 최·노 이혼 소송 항소심서 노 손들어줘
위자료 20억원·재산 분할 1조3,808억원 지급 판결
지분율 낮은 최태원 회장, 지배구조 영향 불가피
‘세기의 이혼’이라 불리는 최태원 SK그룹 회장과 노소영 아트센터 나비 관장의 이혼소송이 2심에서 크게 뒤집혔다. 재판부가 노태우 전 대통령의 비자금으로 추정되는 ‘자금 유입’을 언급하며 이를 판결에 적용했기 때문이다. 법원이 1조원 넘는 재산을 분할하라고 판결함에 따라 SK그룹의 지배구조가 흔들릴 위기에 놓인 가운데, 이번 재판을 계기로 해외 헤지펀드들의 움직임이 본격화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서울고법, 노 관장의 ‘재산 형성 기여도’ 인정
30일 서울고법 가사2부는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2심 선고 공판에서 최 회장이 노 관장에게 위자료 20억원, 재산분할금 1조3,808억1,7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재산 추산액 약 4조원을 최 회장과 노 관장이 각각 65%, 35%로 나눠야 한다고 본 것이다. 이는 2022년 12월 1심이 인정한 위자료 1억원과 재산분할 665억원에서 20배 넘게 늘어난 금액이자, 국내 이혼소송 재산분할 규모로는 역대 최대 금액이다.
2심에서 재산분할 액수가 ‘조’ 단위로 바뀐 것은 SK 주식 가치 상승에 대한 노 관장의 기여가 인정됐기 때문이다. 앞서 1심 재판부는 SK 주식을 최 회장이 아버지 최종현 전 SK그룹 회장에게 상속받은 고유 재산인 ‘특유재산’으로 보고 재산분할 대상에서 제외했다. 특유재산은 배우자가 기여한 점이 없다고 봐 이혼할 때 원칙적으로 재산분할 대상이 아니다.
그러나 2심 재판부는 SK 주식을 최 회장의 특유재산이 아닌 부부간 ‘공동재산’으로 봤다. 재판부는 “최 전 회장이 1998년 사망하고 20여 년간 최 회장은 자수성가형 사업가와 유사한 성격을 가지고 긴 시간 (경영활동을) 해 왔다”며 “주식 가치 증가에 대해 노 관장의 기여가 있다고 봐야 한다”고 밝혔다.
특히 재판부는 노 관장의 부친인 노 전 대통령 역시 최 회장 보유 SK 주식의 형성과 가치 증가에 유무형적으로 도움을 줬다는 점을 인정했다. 최 전 회장이 1991~1992년 노 전 대통령에게 교부한 ‘50억원 약속어음 6장’을 근거로 노 전 대통령 측에서 최 전 회장에게 상당한 자금이 유입됐다고 판단한 것이다. 약속어음 6장은 노 관장 측이 2심에서 노 전 대통령의 ‘비자금’이 최 전 회장에게 흘러들어갔다는 증거로 제출한 것으로, 이번에 처음 공개됐다.
이에 최 회장 측은 “SK그룹에 비자금이 유입된 적이 없다”며 “이는 1995년 노 전 대통령 비자금 수사 때도 확인된 사실”이라고 반박했지만, 재판부는 노 관장 측 손을 들어줬다. 또 재판부는 최 회장에 대해 “혼인 관계가 해소되지 않았는데도 2019년 2월부터 신용카드를 정지시키고, 1심 판결 이후에는 현금 생활비 지원도 중단했다”며 “소송 과정에서 부정행위에 대해 진심으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일부일처제를 전혀 존중하지 않는 태도를 보인다”고 질타하기도 했다.
2심 판결 이후, SK 주가 9% 이상 폭등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소송 항소심 직후 SK 주가가 급상승세를 타는 등 증시도 크게 출렁였다.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30일 SK의 주가는 전일 대비 1만3,400원(9.26%) 뛴 15만8,100원에 거래를 마감했다. SK 주가는 이날 장 중 14만3,200원까지 밀렸으나, 최 회장과 노 관장의 이혼 소송 2심 결과가 나온 오후 2시 30분부터 반등, 한때 상승 폭을 키우면서 16만7,700원까지 뛰어오르기도 했다.
주가 상승을 견인한 세력은 개인과 기관투자자였다. 개인과 기관은 SK 주식을 각각 200억원, 318억원 순매수했다. 사모펀드들도 매수에 가담했다. 사모펀드의 SK 순매수액은 42억원으로 파악됐다. 반면 외국인은 530억원 규모의 주식을 팔아치우며 차익 실현에 나섰다.
투자자들의 매수세는 장 마감 이후에도 이어졌다. 시간외단일가 거래에서 SK 주가는 최대 4.11%까지 올랐고, 거래량은 15만4,609주로 전날 거래량(260주) 대비 594배나 급증했다. 31일 역시 오름세를 이어가는 모습이다. 31일 오후 1시 45분 기준 SK는 전일 대비 5,900원(3.73%) 오른 16만4,000원에 거래되고 있다. 장 초반에는 16만9,500원까지 오르며 7.21% 상승률을 기록하기도 했다.
이 같은 주가 급등은 SK의 경영권 리스크가 부각된 데 따른 것으로 해석된다. 주식도 재산분할 대상에 포함되면서 경영권에 변수가 생긴 만큼 주가에 단기 모멘텀이 붙은 결과다. 실제로 2심 판단이 그대로 유지된다면 재산분할액을 지급하는 과정에서 최 회장의 지분이 상당 부분 희석될 가능성이 있는 데다, 앞으로 경영권 분쟁이 불거질 가능성도 크게 점쳐지고 있다. 이 과정에서 공격적인 매수세가 유입될 수 있다는 점에서 경영권 분쟁은 단기적 호재로 작용하기도 한다.
1.4조 마련해야 하는 최 회장, 셈법 분주
이런 가운데 세간의 눈은 최 회장의 이혼 자금 마련 방안에 쏠리고 있다. 먼저 최 회장 보유의 SK 지분 매각 가능성이 제기된다. 다만 최 회장 보유 지분이 많지 않은 데다 자칫 지배구조를 위협당할 수 있는 우려가 상존하는 만큼 쉽지만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도 그럴 것이 SK그룹은 최 회장이 지주사인 SK㈜의 최대주주로 있으면서 SK㈜가 다시 사업 회사를 지배하는 구조인데, 특수관계인을 포함한 최 회장 측 SK㈜ 지분이 25.57%에 불과해 경영권 방어에 취약하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통상 안정적으로 경영권을 방어하려면 35% 정도가 필요하다.
더욱이 지분 매각을 통해 최 회장의 경영권이 취약해질 경우 헤지펀드 등 외부 세력이 경영권을 타깃으로 뛰어들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경영권 분쟁 가능성이 있는 국내 대기업은 해외 헤지펀드들이 가장 눈여겨보는 대상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SK그룹은 과거에도 타이거펀드(1999년), 소버린(2003년) 등 미국 헤지펀드의 공격을 받은 바 있다.
특히 소버린 사태는 당시 그룹의 지배구조까지 뒤흔들었다. SK㈜ 지분율을 14.99% 수준까지 끌어올리며 최 회장의 퇴진을 요구한 것이다. 이에 이듬해인 2004년 SK㈜ 정기 주주총회에서 표 대결 끝에 최 회장이 승리하면서 경영권 방어에 성공, 결국 2005년 소버린이 SK㈜ 지분을 전량 매각하며 사태가 마무리됐지만, 또 다시 재현되지 않으리란 보장이 없다. 경영권의 핵심인 SK㈜ 주식 매각은 최후의 보루로 남겨둘 수밖에 없는 이유다.
매각 대신 최 회장이 보유한 지분을 담보로 대출을 받을 가능성도 거론된다. 재계 서열 1위 삼성가도 총 12조원에 달하는 이건희 삼성 선대회장의 상속세 납부를 위해 홍라희·이부진·이서현 모녀가 삼성 계열사 지분 매각과 담보 대출을 병행하고 있다.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역시 삼성 지배구조 유지를 위해 지분 매각 없이 개인 신용대출 등을 활용해 상속세를 내고 있다. 다만 최 회장은 이미 SK㈜ 주식 가운데 절반 이상인 767만 주(약 4,100억원)가 담보로 잡혀 있어 현실적으로 1조원 넘게 대출을 받기란 쉽지 않다. 또한 추가 대출에 따른 이자 부담도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
이에 재계에서는 SK그룹 경영권과 무관한 SK실트론 지분 매각을 유력한 해법으로 꼽고 있다. 최 회장은 SK실트론 지분을 29.4%를 보유하고 있는데, 이는 지난 2017년 SK㈜가 ㈜LG로부터 기업을 인수할 당시 총수익스와프(TRS·Total Return Swap) 형태로 지분을 인수한 것이다. 업계에 따르면 현재 SK실트론의 기업 가치는 3조원대로 추산되고 있다. 만일 최 회장이 보유한 SK실트론의 지분 29.4%를 매각할 경우, 약 1조원대의 현금을 확보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