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도체 업계 ‘NPE 대리 소송전’ 확산, SK하이닉스-미미르IP도 마이크론에 특허침해 소송
불문율 깨진 반도체 업계, NPE 활용한 특허 소송 급증
국내 업계 '특허 리스크' 가시화, 삼성·SK는 반격 나선다
미미르IP에 특허 넘긴 SK, 마이크론에 특허침해 소송 제기
SK하이닉스로부터 1,500여 개 반도체 관련 특허를 넘겨받은 한국계 특허관리기업(NPE) 미미르IP가 미국 마이크론을 상대로 특허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국내 반도체 기업의 특허를 사들인 NPE가 미국 반도체 기업을 제소한 첫 사례다. AI 반도체를 둘러싼 기업 간 전쟁이 ‘특허 대리 소송전’ 형식으로 본격화하는 양상이다.
반도체 업계 ‘특허 소송’ 본격화, NPE 대리 소송 성행
17일 반도체업계에 따르면 미미르IP는 지난 3일 미국 텍사스 동부지방법원과 미국 국제무역위원회(ITC)에 마이크론과 마이크론 제품을 사용한 테슬라, 델, HP, 레노버 등을 특허침해 혐의로 제소했다. ‘특허 사냥꾼’으로 불리는 NPE는 기업으로부터 특허를 사들인 뒤 소송을 통해 손해배상금과 합의금 등을 받아내는 게 주요 수익 모델이다.
당초 반도체 업계에선 ‘크로스 라이선싱’ 등을 통해 서로의 특허를 공유하는 등 협력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서로 얽히고설킨 기술이 많은 반도체산업 특성상 소송전이 발발하면 일이 걷잡을 수 없을 만큼 커질 거란 걸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 같은 룰을 깬 건 AI 반도체와 NPE다. 범용 D램 제품을 생산해 어디에나 팔던 시대가 지나고 엔비디아 등 특정 큰손에 자사 반도체를 대량 매입해 달라고 구애하는 방향으로 산업 패러다임이 바뀌면서 협력의 필요성이 하락, 소송을 통해 협력관계를 깨뜨리기 시작한 것이다. NPE가 활동 무대를 넓히면서 직접 등판해야 하는 부담 없이 ‘대리 소송’을 할 수 있게 된 점도 소송 확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외 업체 특허 116.4% 증가, “국내 기업 취약할 수밖에”
NPE에 의해 암묵적 룰이 깨지면서 글로벌 기업 간 특허 소송은 급격하게 늘기 시작했다. AI 반도체 패권 경쟁에 특허 소송을 이용하는 사례가 반복적으로 나타난 것이다. 실제 최근엔 해외에서 국내 기업에 소송을 거는 사례도 속속 나타나고 있다. 당장 반도체 식각 분야 세계 1위 램리서치만 해도 현재 최소 2건의 특허 소송을 국내 기업과 진행 중이고, 증착 분야 10대 기업 중 하나인 일본 고쿠사이일렉트릭 역시 2월 총 4건의 소송을 제기했다. 업계 내 ‘특허 리스크’가 가시화하기 시작한 것이다.
글로벌 장비업체들의 특허 공습에 국내 소재·부품·장비(소부장) 기업들은 속수무책이다. 국내 중견·중소기업들이 글로벌 기업의 특허를 피해 제품을 개발하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기 때문이다. 특허청의 최근 5년간 해외 반도체 기업의 국내 특허 등록 현황 자료에 따르면 미국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AMAT), 네덜란드 ASML, 미국 램리서치, 일본 도쿄일렉트론 등 글로벌 장비 1∼4위 업체의 특허 등록 건수는 2019년 585건에서 지난해 1,266건으로 116.4% 급증했다. 이들 기업은 최근 3년간 매년 총 1,000건 넘게 국내에 특허를 등록하고 있다. 국내 기업이 특허 리스크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반격’ 준비하는 삼성, SK도 소송 돌입
다만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등 국내 대기업의 경우 해외의 공세에 반격에 나설 것이란 전망이 많다. 이미 지난해 마이크론으로부터 선제공격을 당한 전례가 있기 때문이다. 앞서 지난해 3월 마이크론은 미국 반도체 특허 151건을 NPE ‘로드스타 라이선싱 그룹’에 이전했다. 사실상 특허침해 대리 소송을 준비한 셈이다.
업계에서도 “로드스타가 삼성전자를 상대로 특허침해를 경고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의견이 적지 않다. 마이크론이 특허를 이전한 지 3개월 만에 삼성전자도 삼성디스플레이 자회사 IKT에 미국 반도체 특허 96건에 대한 배타실시권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배타실시권은 특허침해소송을 진행할 수 있는 권리가 포함된 개념이다.
이와 관련해 한 업계 관계자는 “제조사가 직접 특허침해소송을 제기하면 상대로부터 또 다른 특허침해소송을 받을 수 있지만, NPE를 통해 분쟁을 제기하면 상대로부터 침해소송을 당할 가능성은 없어지고 무효심판과 비침해주장 등으로 대응하면 된다”며 “삼성전자가 특허 배타실시권을 부여한 것도 결국 마이크론의 소송에 대비하면서 반격을 준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미미르IP가 SK하이닉스로부터 특허를 건네받자마자 마이크론에 소송을 제기한 것 역시 반격의 일환이다. 사실상 SK하이닉스가 NPE를 통해 대리 소송을 진행한 셈이기 때문이다. SK하이닉스는 미미르IP와 마이크론의 특허 소송을 통해 자사 고대역폭메모리(HBM) 경쟁력을 강화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앞서 마이크론은 올해 초 HBM3를 건너뛰고 HBM3E 대량생산을 시작했으며 엔비디아에 곧 납품할 것이란 소식을 전한 바 있다. 그간 HBM 시장을 선도하던 SK하이닉스 입장에서 후발주자 격인 마이크론의 급성장은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을 거란 게 전문가들의 전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