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임금 시대 저무나” 美 기업들 또 감원 칼바람, 임금 인상도 주줌
美 기업들, 경기 둔화 흐름에 신속 대응
WSJ “고임금 시대의 종언” 분석
해고 삭풍에 美 사무실 공실률 사상 최고
최근 미국 고용시장의 위축 신호가 잇따르는 가운데 주요 기업들이 선제적인 감원 조치에 돌입했다. 뛰어난 노동시장 유연성을 자랑하는 미국은 그간 기업들이 선제적인 인력 구조조정으로 다가오는 경기 상황에 대응해 왔다. 그러나 고용시장의 주도권이 근로자에서 고용주로 전환되는 최근 흐름과 맞물려 팬데믹 이후 두둑했던 ‘고임금 시대’가 저물고 있는 모습이다.
테슬라·시스코·스텔란티스 등 감원 칼바람
9일(현지시간)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미국 네트워크 장비업체 시스코 시스템즈는 올해 두 번째 인력 구조조정을 추진한다. 지난 2월 4,000명을 줄인 데 이어 이번에도 수천명대 감원이 예상된다. 지난 2∼4월 매출이 1년 전 대비 12.8% 줄어드는 등 실적 부진에 따른 인원 감축이다.
다국적 자동차 기업 스텔란티스도 같은 날 최대 2,450명의 미 공장 근로자를 감원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는 올 연말 미시간주 공장에서 구형 픽업트럭 생산이 중단되는 데 따른 것이다. 지난 8일에는 미국의 미디어 기업 파라마운트글로벌도 스카이댄스 미디어와의 합병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인력 감원을 단행한다고 발표했다. 파라마운트 글로벌은 미국 내 인력 15%에 해당하는 2,000명을 감원할 계획이다.
앞서 지난해에는 미국 빅테크 기업들이 줄줄이 대규모 감원 행렬에 나선 바 있다. 구글은 지난해 1월 전 직원의 약 6%에 해당하는 1만2,000명을 감원하겠다는 계획을 밝혔고 아마존(1만8,000명), 메타(1만1,000명), 마이크로소프트(1만 명) 등 실리콘밸리 빅테크 기업들이 줄지어 대규모 정리해고를 단행했다. 지난해 빅테크 기업들이 대규모 감원에 나선 데 이어 올 들어서는 기업 전반이 고용을 줄이는 분위기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올 들어 실업률이 꾸준히 상승하면서 지난달 4.3%를 기록한 바 있다. 이는 올해 1월(3.7%) 대비 0.6%포인트 오른 수준이다.
고용시장이 전반적으로 둔화하면서 임금 인상폭도 크게 줄었다. 고용주 자문 업체 WTW가 올해 2분기 1,900개 미국 회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올해 임금 인상폭 중간값은 4.1%로 나타났다. 이는 전년(4.5%) 대비 0.4%포인트 줄어든 수치다. 설문 결과에 따르면 기업들이 계획하고 있는 내년도 임금 인상폭 중간값은 3.9%로 나타났다. 기업들은 내년에도 임금 인상폭을 줄일 것으로 예상된다.
이는 팬데믹 이후 최근 수년간 경제 활동 재개(리오프닝) 효과로 과열됐던 고용시장이 냉각되고 있다는 또 다른 신호라고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최근 분석했다. WSJ는 고용시장 둔화세와 관련해 “두둑한 급여 상승 시대(The era of hefty pay increases)가 종말을 고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위축된 채용 시장에서 고용주들이 보너스를 삭감하거나 동결하고 성과급 인상 폭을 점점 줄이는 방식으로 급여 지출을 통제할 것이라는 분석이다.
기술 인력들 비(非)기술 기업으로 러시
빅테크 기업들이 대규모 구조조정을 이어가는 가운데 해고된 기술 인력들은 비(非)기술 기업에 새 둥지를 틀었다. 기술면접 플랫폼 카라트(Karat)의 지난해 데이터를 보면 비기술 기업은 기술 인력 10명 중 9명을 성공적으로 채용했다. 과거 기술 인력들은 하고 있는 업무나 실험적인 새로운 인공지능(AI) 분야 기술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안정적 고용이 보장되지 않게 되자 경제적 수입과 승진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고 이에 비기술 기업으로 가는 인력들이 많아진 것으로 풀이된다. Karat의 조사에 따르면 기술 인재들은 비기술 기업에서 이직하지 않고 장기적으로 경력을 성장시킬 수 있고, 자신의 생각대로 기술을 구현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만족도가 높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같은 추세는 올해도 이어질 전망이다. CNBC는 기술 기업에서 일하는 기술 인력의 60%가 올해 현 직장을 그만두고 싶어 한다고 보도했다. 이는 전년(52%)대비 증가한 수치다. 비기술 기업은 실리콘밸리에 있을 필요가 없어 보다 물가가 저렴한 도시에 위치한다. 이에 통근 시간이 적고 실질 생활 수준도 높아질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기술 직업 마켓플레이스 다이스(Dice)의 CEO(최고경영자) 아트 지엘르에 따르면 기술 인력은 항공우주, 컨설팅, 의료, 금융 서비스 및 교육 산업에서 수요가 높다. 다만 기술 기업에 비해 아직 근무 환경의 유연성이 적은 점은 단점으로 꼽힌다.
대규모 구조조정에 실리콘밸리 공실률도 증가
한편 테크 기업의 대규모 감원은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의 공실률을 끌어올리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글로벌 부동산 서비스기업 쿠시먼앤드웨이크필드(Cushman&Wakefield) 보고서에 따르면 올해 2분기 샌프란시스코 사무실의 공실률은 34.5%를 기록했다. 이는 1분기의 33.9%를 웃도는 사상 최고치다. 1년 전 같은 기간(28.1%)에 비해선 6%포인트 이상 올랐고, 코로나 팬데믹 기간 이전(5%)보다는 30%포인트 가까이 급상승했다.
공실률이 오르면서 임대료는 2015년 말 이후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2분기 평균 호가 임대료는 제곱피트(0.09㎡)당 68.27달러(약 9만4,553원)로 1년 전 72.90달러보다 6.3% 내렸다. 최고치였던 2020년 84.70달러보다는 19.3% 하락했다.
코로나19 팬데믹 기간 자리 잡은 재택근무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는 점도 공실률 상승을 견인했다. 미국 빅데이터 분석전문기관 플레이서닷AI(Placer.AI)에 따르면 팬데믹 이후 사무실로 복귀한 RTO(Return-to-office) 비율은 지난해 말 기준 샌프란시스코가 45%로 미국 주요 대도시 중 가장 낮았다. 뉴욕(77%)과 마이애미(78%), 워싱턴(67%), 시카고(57%)와 비교해 현저히 낮은 수준이다.
이에 대해 실리콘밸리에 본사를 둔 국내 테크 기업 관계자는 “구글이나 메타 등 기업들은 팬데믹 후 직원들을 사무실로 복귀시키려고 했지만 자유롭게 원하는 장소에서 일하고 싶은 직원들의 반발이 커 재택근무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다”며 “본사 방침에 따라 한국 법인도 일주일에 2~3일 정도는 재택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