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옥시아 딜레마’에 직면한 SK하이닉스, 거듭된 평가손실 속앓이
키옥시아, 상반기 평가손실 2,000억
4조원 쏟아부은 SK하이닉스 '눈물'
'버티기'냐 '출구전략'이냐, 고심
SK하이닉스가 일본 반도체기업 키옥시아(KIOXIA) 투자로 올해 상반기 2,000억원 수준의 평가손실을 냈다. 최근 솔리다임이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를 중심으로 흑자 전환한 가운데 소비자용 SSD 위주인 키옥시아는 회복이 더딘 모습이다.
SK하이닉스의 ‘아픈 손가락’ 키옥시아, 또 평가손실 기록
21일 SK하이닉스의 올해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키옥시아의 특수목적 법인(BCPE Pangea Intermediate Holdings Cayman, LP, BCPE Pangea Cayman2 Limited)은 올 상반기 1,912억원의 평가손실을 기록했다. SK하이닉스가 갖고 있는 키옥시아 지분이 이전 평가 시점보다 감소했을 때 인식하는 손실로 실제 현금 흐름에는 영향이 없지만, SK하이닉스의 자산 가치와 재무 건전성에 영향을 미친다.
SK하이닉스는 낸드플래시 1위인 삼성전자를 따라잡기 위해 대규모 인수합병(M&A)을 추진, 지난 2018년 키옥시아 지분 일부를 사들였고 2020년에는 미국 인텔 낸드·SSD사업부(현 솔리다임)를 인수했다. 각각 약 4조원, 10조원 규모다. 낸드 업황 침체로 고민에 빠졌던 SK하이닉스는 인수 이후 솔리다임이 개선세를 보이면서 고민을 덜었다. 솔리다임은 2021년 2분기 이후 적자를 지속하다 올 2분기 787억원의 순이익을 냈다. 상반기 기준으로는 아직 710억원의 손실을 보고 있지만, 기업용 SSD 시장이 회복되며 2분기 들어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문제는 소비자용 SSD가 주력인 키옥시아다. SK하이닉스는 2018년 키옥시아의 미국 사모펀드 베인캐피털 컨소시엄에 참여해 지분 19%를 간접 확보했다. 지분 인수 이후 SK하이닉스의 키옥시아 평가이익은 2020년 1조6,683억원으로 안정적인 수익을 냈지만 낸드 시장 침체로 인해 2021년 3,719억원으로 쪼그라들었다. 이에 키옥시아는 2020년 말 생산량 30%를 감산하고, 지난해로 계획했던 최첨단 낸드 생산 시점도 내년 가을로 늦췄다. 특히 2022년부터는 평가손실로 돌아선 상태다. 키옥시아는 SK하이닉스에 2022년 1조882억원, 2023년 1조6,558억원 규모의 평가손실을 안겼다.
이렇다 보니 SK하이닉스는 키옥시아 투자로 번 것보다 잃은 게 더 많다. 키옥시아의 지분가치는 당초 4조원에서 올 상반기 말 3조4,390억원까지 줄어들었고, 최근 간신히 흑자 전환에 성공했음에도 엔저로 SK하이닉스는 평가손실을 면치 못했다. 최근 진행한 2024회계연도 1분기(올해 2분기) 실적 발표에 따르면 키옥시아는 매출 4,285억 엔(약 3조9,200억원), 영업이익 1,259억 엔(약 1조1,500억원)을 기록했다.
다시 도는 키옥시아 ‘IPO 시계’
이에 SK하이닉스는 기업공개(IPO)를 기점으로 키옥시아 투자금 회수(엑시트)를 타진하고 있다. 키옥시아는 올해 말 자체적으로 도쿄에서 IPO를 진행할 예정이다. 낸드 업황 침체로 IPO를 중단했던 키옥시아는 지난해 IPO를 계획했으나 좌절된 바 있다. 증권거래소 승인까지 받았지만 미국 정부가 키옥시아의 주 거래처인 중국 통신 장비 대기업에 대한 규제를 강화하면서 실적 우려로 상장이 철회됐다. 당시 시장에서 예상한 시가총액은 약 2조~2조5,000억 엔(약 22조~28조원)이었다.
키옥시아가 IPO를 재추진하는 이유는 거액의 자금을 확보하기 위해서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지난 2월 키옥시아와 미국 스토리지 전문기업 웨스턴디지털(WD)의 최첨단 낸드 양산 계획에 대규모 투자를 약속한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양사의 총 투자금액인 7,288억 엔(약 6조6,800억원) 중 2,430억 엔(약 2조2,300억원)을 지원하는데 이 보조금을 받기 위해 자금 조달은 필수다.
다만 전문가들은 키옥시아가 기업가치를 제대로 인정받으려면 온디바이스 인공지능(AI)이 본격화해야 한다고 보고 있다. 온디바이스 AI에 탑재되는 소비자용 SSD는 시장 개화가 더뎌 가격 상승이 제한되고 있기 때문이다. 일본 외신 보도에 따르면 키옥시아는 올해 완공한 최첨단 낸드 공장 ‘K2’를 내년 하반기에 본격 가동해 AI 시장에 대응할 계획이다.
이런 가운데 업계에서는 키옥시아가 IPO를 물꼬로 WD와의 M&A까지 다시 노릴 것으로 보고 있다. 키옥시아와 WD는 2021년부터 M&A 협상을 진행해 왔지만 양사 간 가치 평가 의견 차이, 일본 정부의 자국 기업 유출 우려, 중국 당국의 견제 등으로 무산됐다. 이후 지난해에도 추진했으나 SK하이닉스가 미국 정부의 설득에도 반대 의사를 굽히지 않아 좌절됐다. 지난해 4분기 기준 키옥시아와 WD의 낸드 시장 점유율이 각각 12.6%, 14.5%로 합병 시 SK하이닉스(21.6%)를 뛰어넘기 때문이다. 지난 2월에는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이를 막기 위해 직접 일본을 찾아 경제산업성과 면담하기도 했다.
이에 키옥시아는 IPO를 통해 SK하이닉스의 보유 지분 중 구주를 우선 매각해 M&A를 재추진하려는 모습이다. 하지만 외부 상황이 여전히 해소되지 않아 이번에도 무산될 가능성이 크다는 게 업계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더욱이 이들 간 합병이 마냥 장밋빛 전망인 것도 아니다. 현재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 등 키옥시아와 WD를 제외한 낸드 시장 주요 플레이어들이 D램 사업도 함께 진행하고 있어서다. 즉 낸드 사업만 진행하는 두 기업이 힘을 합쳐도 업태에 변화가 없어 메리트가 부족한 가운데, 투자 부담은 여전히 큰 셈이다.
평가손실에도 희망 갖는 이유
한편 반도체업계 일각에서는 SK하이닉스의 키옥시아 지분 투자를 실패한 투자로 단정 짓긴 이르다는 분석도 나온다. 낸드플래시 업황이 점차 개선되고 있어 추가적인 평가손실 가능성이 제한적인 데다 최근에는 키옥시아가 8세대와 9세대 낸드플래시를 양산하겠다는 전략을 발표하며 성장을 모색하고 있기 때문이다.
키옥시아는 이르면 2025년 3분기부터 일본 미에현과 이와테현 공장에서 8세대와 9세대 낸드플래시를 양산할 계획이다. 총투자금은 7,000억 엔(약 6조4,000억원)으로, 생산시설을 공유하는 WD와 공동으로 분담한다. 키옥시아의 낸드플래시 생산량 대부분이 6세대에 머물러 있는 만큼 경쟁사가 200단 이상 8세대 공정으로 전환을 서두르는 상황에 더 이상 투자를 지체할 수 없다는 판단이 깔린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키옥시아가 IPO를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경우 SK하이닉스가 갖고 있는 지분을 매각해 수조원의 현금을 챙길 수도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SK하이닉스 입장에서 투자한 키옥시아 지분 가치가 하락하는 게 달갑지는 않겠지만, 키옥시아가 자구책을 내놓은 만큼 일단은 가치가 더 떨어질 가능성은 작다”며 “키옥시아에 남은 방안은 상장 혹은 합병인데, 두 시나리오 모두에서 SK하이닉스가 자사에 유리한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