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퍼저축은행 1,000억원 적자 기록, 벼랑 끝에 몰린 저축은행들 ‘부실 PF 구조조정’ 태풍 주의보
페퍼저축은행 지난해 순손실 1,000억원대, '업계 최대'
지난해 79개 저축은행 총 순이익 '마이너스'로 돌아서
정부 "저축은행 PF 부실사업장 우선적으로 정리해야"
국내 10대 저축은행 중 하나로 꼽히는 페퍼저축은행이 지난해 1,000억원대의 적자를 낸 것으로 파악됐다. 전체 저축은행업계의 적자 규모가 5,559억원임을 고려하면 20%가량의 순손실이 페퍼저축은행에서 발생한 셈이다. 페퍼저축은행뿐만 아니라 부동산 PF(프로젝트파이낸싱) 부실 여파로 전체 저축은행의 절반 정도가 지난해 순손실을 낸 것으로 집계된 가운데, 금융당국이 부실 사업장을 대상으로 한 구조조정 작업에 본격 착수하면서 업계는 폭풍전야 분위기에 휩싸였다.
페퍼저축은행, 1,072억원 적자 “업계 최대 규모”
12일 금융권에 따르면 페퍼저축은행은 지난해에만 1,072억원의 순손실을 기록하며, 전년(513억원)과 비교해 1,585억원가량의 이익이 줄었다. 손실 규모면에서 업계 최대 수준이다. 페퍼저축은행 이외에 적자 규모가 컸던 곳은 KB저축은행(-936억원), HB저축은행(-757억원), 애큐온저축은행(-633억원), NH저축은행(-562억원) 등이다.
페퍼저축은행은 지난 2013년 10월 호주계 다국적 기업인 페퍼그룹이 웅진그룹으로부터 늘푸른저축은행의 지분 100%를 사들이며 한국 시장에 진출했다. 출범 초기 몇 년간은 적자가 지속됐으나 2016년 191억3,893만원의 순익을 기록하며 첫 흑자 달성에 성공한 이후 꾸준히 순익 규모를 키워왔다. 2021년에는 817억원의 당기순이익을 시현하면서 실적면에서 상위권 대형 저축은행들과 어깨를 나란히 견주기도 했다.
이런 사실에 비춰볼 때 천억원이 넘는 페퍼저축은행의 지난해 적자 규모는 건전성에 대한 우려감을 키우고 있다. 적자로 돌아섰을 뿐만 아니라 적자 규모도 갑자기 큰폭으로 확대됐기 때문이다. 대손충당금 부담과 영업실적 부진이 동시에 찾아오면서 예상 이상으로 적자 규모가 늘어난 것으로 분석된다.
실제로 지난해 페퍼저축은행의 업무이익(충당금적립 전 이익)은 377억원으로 전년도 1,953억원에서 80.7% 급감했다. 반면 충당금 적립액은 1,267억원에서 1,723억원으로 36.0% 증가했다. 적극적으로 충당금을 쌓았지만 주요 건전성 지표는 나아지지 않았다. 대손충당금은 부실채권으로 분류되는 고정이하여신의 확대가 주요인으로 꼽힌다. 지난해 말 기준 페퍼저축은행의 고정이하여신은 4,630억원으로 전년(2,545억원) 대비 두 배가량 늘었다. 고정여신을 제외한 부실여신(회수의문·추정손실여신) 규모 역시 2,652억원으로 전년 1,944억원과 비교해 증가했다.
연체율도 2022년 말 4.12%에서 지난해 말 기준 9.39%까지 올랐다. 특히 부동산 업종 관련 연체율 상승세가 두드러졌다. 페퍼저축은행의 부동산 PF 대출 연체율은 지난해 말 기준 13.24%에 달했다. 2022년 말 기준 0%대였다는 점을 고려하면 가파른 상승폭이다. 건설·부동산업 여신 연체율도 크게 올랐다. 건설업 대출 연체율은 2022년 말 2.29%에서 지난해 말 15.52%까지 올랐고 부동산업 대출 역시 1.07%에서 9.79%로 치솟았다.
총선 끝, 금융당국 ‘부실 PF 사업장’ 구조조정 착수
부동산 PF에 따른 부실은 페퍼저축은행만의 문제가 아니다. 저축은행 업계에 따르면 국내 자산 순위 10개 저축은행을 비롯해 79개 저축은행의 총 순이익이 마이너스로 돌아선 것으로 파악됐다. 이에 금융업계를 중심으로 총선 이후 부실이 터지는 PF 사업장이 대거 나올 것이란 우려가 컸다. 이른바 ‘4월 위기설’이다.
정부는 “부실이 한꺼번에 드러날 위험은 없다”며 과도한 우려라고 일축했지만, 한편으로는 부실 사업장 옥석 가리기를 추진하고 있다. 최근 당국은 제2금융권 건전성 등을 고려할 때 저축은행 PF 부실사업장을 우선적으로 정리해야 한다고 강조하며 ‘부동산PF 경공매 활성화’를 요구했다. 이에 저축은행중앙회는 저축은행 부동산PF 정리를 위해 경매, 공매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 이를 중앙회 표준규정에 반영해 지난 1일부터 시행 중이다.
표준규정 개정안에 따르면 저축은행들은 6개월 이상 연체된 PF 대출에 3개월 단위로 경·공매를 실시해야 한다. 이에 중앙회는 기존의 규정에 ‘3개월’이라는 주기를 명시했다. 또 공매가는 실질담보가치, 매각 가능성, 직전 공매회차 최저입찰가격을 감안해 적정하게 산정하도록 했다.
아울러 금융당국은 부실 사업장 정리를 활성화하는 방향으로 사업성 평가 기준과 대주단 협약 등 각종 제도 개편을 추진하고 있다. 업계에는 경·공매 시 최저 입찰가에 충당금(30%)을 반영해 가격을 더 낮추도록 유도하고 있다. 또한 금융당국은 11일부터 다음 주까지 주요 시중은행을 비롯해 상호금융기관, 여신전문금융회사, 저축은행, 보험사 등과 개별 또는 업권별 면담에도 나선다. 부실 사업장과 회생 가능 사업장을 구분하는 과정이다.
나아가 오는 4월 중 공개되는 올해 1분기 저축은행 대출 연체율이 집계되는 대로 점검에 착수할 예정이다. 중점 점검대상은 연체채권 관리의 적정성으로, 새롭게 적용하는 가이드라인에 따라 부실 PF 사업장의 연체채권을 정리하고 있는지 등을 조사할 방침이다. 또 5월부터 사업자 연체채권 매각 채널 확대에 따른 준비도 점검사안에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M&A 시장 매물 쏟아질 수도, “저축은행 주인 바뀌나”
금융당국이 부실 PF 사업장에 대한 구조조정에 속도를 내고 있는 가운데 일각에서는 사업 운영에 어려움을 겪는 일부 저축은행의 경우 M&A 시장에 매물로 나올 수 있다는 관측도 제기된다. 지난해부터 시장 내 PF 사업장 매물은 쏟아졌지만, 저축은행은 부동산 PF 위기 속 가장 ‘약한 고리’로 꼽히면서 M&A 물망에서 번번이 제외돼 왔다.
하지만 올해부터 토지담보대출이 부동산 PF로 분류됨에 따라 대손충당금을 추가 적립해야 하는 등 재무건전성 압박이 커진 만큼, BIS(국제결제은행) 기준 자기 자본 비율이 7%(자산 1조원 이상 8%)로 떨어질 경우 당국으로부터 경영 개선을 위한 적기 시정조치가 부과될 수 있어 ‘시장 자율 조정’의 일환으로 M&A가 활성화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앞서 금융당국은 지난해 7월 ‘저축은행 대주주 변경·합병 인가 기준’ 개정안을 마련해 비수도권 저축은행에 대해서는 동일 대주주가 최대 4개까지 소유·지배할 수 있도록 했다.
다만 저축은행의 연내 매각 진행을 장담하긴 어렵다는 게 업계의 중론이다. 지난해 말 상상인저축은행이 매물로 나온 뒤 우리금융지주가 인수를 검토했으나 인수 의사를 철회했고, 2022년부터 매물로 나온 HB, 애큐온, OSB저축은행은 아직도 새 주인을 찾지 못하는 등 저축은행에 대한 수요가 부족하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더욱이 앞으로도 어려운 생존 싸움을 벌여야 할 업황을 고려할 때 저축은행에 대한 메리트가 부족하다는 평이다.
이런 가운데 업계 일각에서는 과거 2011년 저축은행 부실 사태와 같이 국내 주요 금융지주들이 해결사로 등장하는 시나리오도 점쳐진다. 당시 저축은행 사태에 따른 구조조정 속에 제일·토마토·제일2·에이스·삼화저축은행이 각각 KB·신한·하나·우리-NH농협 금융지주 산하로 편입된 바 있다. 인수할 당시만 하더라도 저축은행은 금융지주 내 애물단지 취급을 받았지만, 코로나19 충격 이후 풍부한 유동성에 힘입어 효자 노릇을 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