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물가 목표 2%는 그린스펀 시대의 유산
연간 인플레이션 목표를 2%에서 4%로 올려야 한다는 주장 꾸준히 제기돼
물가 목표 2%는 80년대 확립된 정책 목표, 당시엔 팽창 재정 심하지 않았기에 가능
코로나19 거치며 각국 정부마다 재정 확대 중, 당장 물가 목표 2% 회귀 쉽지 않은 상황
다만 이번에 4%로 조정할 경우 수십년간 고인플레이션 각오해야 할 수도
월스트리트저널(WSJ)이 미국인들이 인플레이션을 매우 싫어한다는 점을 제외하면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의 연평균 물가 상승 목표치인 2%를 상향 조절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제 경제학계에서도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경제 상황이 변했기 때문에 더 이상 연평균 2%의 인플레이션을 고집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 수석 이코노미스트를 지낸 경제학자 올리비에 블랑샤르(Olivier Blanchard)는 연준이 향후 제로금리 하한 문제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인플레이션 목표치를 연 4%로 상향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양적완화 정책에 따라 이미 금리를 크게 낮췄던 상황에서 팬데믹이 터지자 더 이상 금리를 낮출 수 없었던 문제를 말하는 것이다. 통화정책이 효과를 잃게되면 중앙은행의 경제 시스템 관리가 어려워지고, 자칫 일본처럼 중앙은행의 역할이 무의미해지는 장기 불황에 직면할 수도 있다는 지적이 지난 10여 년간 경제학계에서 끊임없이 제기된 바 있다.
물가 목표 2%는 그린스펀 시대의 유산
연평균 물가 상승 목표치가 2%로 정리된 것은 1980년대 앨런 그린스펀(Alan Greenspan) 전 연준 의장이 통화정책을 결정하면서부터다. 1970년대까지만 해도 중앙은행은 물가 상승률을 목표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통화량 공급을 목표로 해야 한다는 주장이 거시경제학계에 널리 퍼져 있었고, 그 밑바닥에는 금본위 통화제가 깔려 있었다. 금태환이 가능한 수준의 통화 공급량을 유지하면 물가는 자동으로 관리가 된다는 사고방식이다.
그러나 두 차례의 중동발 오일 위기를 겪으면서 금과 통화량 간의 비율 유지만으로는 물가 관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이 경제학계에 널리 받아들여졌다. 기름도 중요 소비 상품 중 하나로 자리 잡으며 물가를 크게 좌우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 ‘볼커 룰(Volker rule)’ 등의 다양한 거시 경제 모델들과 기준치가 등장했고, 거시경제학계는 ‘손실함수(Loss function)’의 개념을 갖고 와 물가 상승이 지나칠 경우 미래 손실, 경제 성장 속도에 적합한 통화량 공급에 실패할 경우 물가 하락으로 이어진다는 양쪽 손실 개념을 정립했다.
안정적인 경제 성장과 물가 관리를 위해서는 거시 경제의 평균 성장 속도, 혹은 잠재성장률에 맞춰 통화량 공급을 늘려야 한다는 이론이다. 물가 상승에 따른 약간의 손실을 감안하더라도 디플레이션이라는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연평균 물가 상승률 목표 2%라는 개념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다.
그러나 2008년 금융위기부터 10여 년간 지속됐던 양적완화에도 불구하고 경기 회복이 더뎠던 와중에 2020년 들어 팬데믹이 확산되자 각국의 중앙은행들은 고민에 빠졌다. 금리를 추가로 인하해야 경기 위축을 방지할 수 있는 상황인데, 이미 금리가 0%에 가깝게 내려간 상태였기 때문이다. 통화정책이 힘을 못 쓰는 사이에 각국 정부는 재정정책을 통해 코로나19로 무너지는 가계를 지원해 줬다. 정부 지원금이 시장에 대규모로 공급되자 물가는 강한 상승 압력을 받았고, 2022년부터 본격적으로 인플레이션이 가시화된 것이 최근 상황이다.
오일에 이어 정부 지출 규모라는 또 다른 변수를 고려할 시점이 됐다?
경제학자들은 지난 1980년대에 오일 위기에 대응하기 위한 거시 경제 모델이 등장했듯이, 제로 금리 시대에 정부 지출 규모 확대에 맞춰 거시 경제 모델을 다시 변화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특히 중앙은행의 역할론을 강조했던 로렌스 볼(Laurence M. Ball) 존스홉킨스대 경제학 교수, 조지프 스티글리츠(Joseph Stiglitz) 컬럼비아대 석좌교수 등은 이미 2022년부터 연준이 물가 목표치를 4%대로 변경하지 않을 경우 경제가 극심한 충격에 휩싸일 것으로 전망한 바 있다.
이들의 주장은 정부 지출 규모가 늘어난 상태에서 과거와 같은 통화정책을 고집할 경우 국내총생산(GDP) 규모 중 정부의 이전 지출 비중이 증가할 뿐만 아니라, 재정정책 기반 통화량 증대 정책 탓에 물가 수준이 과거보다 더 높을 수밖에 없다는 것으로 함축된다. 이전에는 정부의 간헐적인 재정정책이 통화량 조절 정책과 맞물려 물가 상승률 2% 범위를 유지할 수 있었으나, 지난 2020년 이후 정부가 코로나19 피해 가계에 전폭적인 이전 지출을 감행했던 것, 최근 복지 사회에 대한 시장 요구 증가로 복지 예산이 증가한 것 등을 들어 중앙은행이 과거와 같은 정책을 취해도 시장에 공급되는 통화량이 늘어난다는 분석이다.
반면 일각에서는 이런 현상은 위기 대응을 위한 일시적인 상황인 만큼, 물가 목표를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도 강하다. 스테파니 스탠체바(Stefanie Stantcheva)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는 인플레이션에 대한 미국인들의 부정적인 반응을 정리한 논문에서 물가 상승에 대해 1980년대 기준 통화정책 모델에서 정리된 ‘손실함수’ 개념을 또다시 제시했다. 일시적으로 기준을 완화할 경우 시장의 신뢰를 잃게 되고, 결국 향후 물가 상승률 수준 자체가 높아진 상태를 피할 수 없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문제의 원인은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실패가 아니라 무리한 재정정책
시장 전문가들은 지난 4년간의 기준 물가상승률 논의를 중앙은행의 통화정책 실패 관점에서 해석하기보다, 정부의 무리한 재정정책을 지적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난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주요 서방 정부는 대규모 예산을 투입해 국방력을 강화하거나 무기를 구입하는 데 활용했고, 코로나19로 신음하는 가계에 지원금을 크게 늘렸다. 한국도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 4월 발표된 ‘2023 회계연도 국가결산 주요 내용’에 따르면 GDP에 견준 국가채무비율이 사상 처음으로 50%를 넘어섰다. 한국은행의 금융통화위원회 회의에서는 정부의 부동산 지원 정책 탓에 통화 긴축이 부동산 가격 하락을 이끌지 못한다는 불만이 반복적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지난 1980년대에 고착화된 물가 상승률 목표 2%도 사실은 0%를 목표로 해야 하지만 디플레이션에 대한 우려와 경제 성장을 지원하기 위한 완만한 인플레이션에 대한 필요가 시장에서 공감대를 얻었기 때문에 등장한 값이다. 그러나 최근처럼 재정정책이 지나치게 시장에 개입하게되면 물가 상승률 목표를 지키기 위해 또 다른 비용을 희생해야 한다. 특히 한국의 경우 아파트 같은 주거 부동산 시장을 유지하기 위해 부동산 프로젝트 파이낸싱(PF)과 소상공인들이 더 큰 비용을 지불하고 있다. 이에 반해 미국은 금융권, 상업용 부동산, IT업계가 부진을 겪는 가운데 보조금이 가장 많이 투입된 제조업계와 가계 지원금이 투입된 덕분에 주거용 부동산 월세 시장은 오히려 활황세다.
당장이라도 물가 상승을 막고 싶으면, 금리를 내리고 싶으면 정부가 긴축 재정에 들어가면 된다. 그러나 경기 침체가 와 있는 상황에 그 어떤 정부도 선뜻 긴축 재정이라는 선택지를 고르기는 어려울 것이다. 경제 정책이라는 것이 한 국가의 단독 결정으로 움직이는 것도 아니고, 하룻밤 사이에 바꾼다고 바뀌지도 않는다. 코로나19로 인한 팽창 재정의 문제를 시장이 천천히 떠안는 동안 긴축 통화정책으로 시장의 균형을 맞추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다만 조정이 늦어진다는 이유로 인플레이션 목표를 바꾸면 스탠체바 하버드대 교수의 주장대로 앞으로 오랫동안 매년 더 비싼 손실을 경제 시스템 전체가 지불해야 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