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플레 덫에 빠져버린 영국, 기업 탓하는 영란은행 총재

앤드류 베일리 영란은행 총재 “영국 인플레이션이 ‘2차 효과’에 의해 촉진되고 있어” 통화정책위원회 “노동시장 긴축과 임금 상승률 등 인플레이션 지속성 지표에 주의” 2% 인플레이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기준금리 인상 암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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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오르면 통화량이 늘어 물가 상승으로 이어지는 ‘임금주도 인플레’, ‘임금·물가 스파이럴’(임금 물가 악순환)로 인해 영국이 고통받고 있다고 영란은행 총재가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중앙은행이 12차례 연속 금리 인상이라는 강수를 두며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는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영국의 물가 상승률은 지속적으로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영국 CPI 상승률은 지난해 10월 41년 만에 최고치인 11.1%를 기록한 이래 △지난해 11월(10.7%) △지난해 12월(10.5%) △올해 1월(10.1%) △올해 2월(10.4%) △올해 3월(10.1%) 등 꾸준히 10%대를 유지 중이다. 10월 이후 물가가 63% 상승한 것이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한 그릇에 8,000원 하던 국밥이 반년 만에 13,000원이 된 셈이다.

베일리의 공식적 인정

17일 런던에서 열린 영국 상공회의소 연례 컨퍼런스 연설에서 베일리는 영국이 인플레이션의 ‘2차적’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인정했다. 인플레이션이 에너지 및 식료품 가격에서 기업의 임금 및 판매가격 인상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을 임금-가격 스파이럴이라 부른다. 베일리는 “근원 인플레이션의 강세 중 일부는 에너지 가격 상승의 간접적인 영향을 반영한다”면서도 “그러나 한편으로 이는 외부 충격이 국내 경제 상황과 상호 작용하는 2차 효과도 반영하며, 이러한 2차 효과는 빠르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헤드라인 인플레이션이 하락하기 시작하더라도 이러한 2차 효과는 빠르게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기도 했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인플레이션이 고착화되고 있다는 뜻이다. 일련의 조치에도 불구하고 3월 영국의 인플레이션율은 놀랍게도 10%를 상회했으며, 핵심 인플레이션은 5.7%로 유지됐다. 이 핵심 인플레이션은 식품, 에너지, 주류, 담배와 같은 변동성이 큰 품목을 제외한 수치다.

또한 베일리는 일자리 감소로 노동 시장의 완화가 중앙은행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디게 진행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명목임금 상승률과 서비스 가격 인플레이션이 은행의 전망과 일치함에도 불구하고 베일리는 임금 상승률 둔화 조짐이 분명하다고도 말했다. 아울러 서비스 인플레이션이 여전히 높다고도 지적했다. 이러한 상황은 결국 임금-가격 스파이럴의 위험을 증가시킨다. 인플레이션이 상승하면 근로자는 더 높은 임금을 요구하고, 이에 따라 기업은 비용 증가를 충당하기 위해 물품 판매 가격을 인상하게 된다. 근로자들이 경제 활동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더 높은 임금이 필요한 만큼, 이러한 사이클은 소위 ‘2차 효과’를 지속시킬 수 있다.

영란은행의 실패

그러나 모두가 베일리의 상황 분석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다. 많은 경제학자들이 베일리의 발언, 특히 지속적인 인플레이션에 대해 기업들에게 임금 협상을 자제하라고 비난하는 등 인플레이션 위기에 대한 책임을 근로자와 기업에 전가하는 것은 옳지 않을뿐더러 영란은행의 자체 정책과 팬데믹 기간 동안 영란은행이 실시한 막대한 양의 화폐 발행이 원인일 가능성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오늘날 임금 인상은 임금 상승률이 인플레이션과 일치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플레이션을 20% 이상 초과하던 1970년대 오일 쇼크와도 같은 규모가 아니기 때문이다. 오히려 반대로 임금 인상률은 물가 상승률에 뒤처지고 있다. 즉 실질적으로 임금이 인상됐음에도 불구하고 근로자들의 체감은 더 나빠지고 있는 것이다.

쇄도하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베일리 총재와 통화정책위원회는 2% 인플레이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에 따라’ 기준금리를 계속 조정하고 있다. 인플레이션에 대한 리스크가 상승 쪽으로 상당히 치우쳐 있다는 것이 위원회의 주장이다. 이에 베일리는 “인플레이션을 은행의 목표치인 2%로 되돌리기 위해 필요한 만큼의 금리를 인상하겠다”고 약속하며 “지난 18개월 동안 높은 에너지 및 식품 비용이 국내 임금과 물가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반복해서 언급했다.

글로벌 상황은 나아지는데

영국의 상황과는 달리 유럽연합을 비롯해 미국의 경제학자와 정책 입안자들은 최근 자국 경제에서 더 이상 임금-물가 스파이럴의 위험이 크지 않다고 분석했다. 인플레이션과 역사적인 경기 침체를 따라잡기 위해 임금이 상승할 여지가 있지만 문제가 될 수준은 아니라는 것이다. 안드로메다 캐피털 매니지먼트의 최고 투자 책임자인 알베르토 갈로는 영국이 임금 가격 상승의 가장 큰 위험에 처한 선진국 경제라고 주장했다. 그 요인으로 영국 파운드화 약세, 식량 및 에너지 수입에 대한 의존도, 브렉시트 이후 규칙에 의해 제약을 받는 타이트한 노동 시장 등을 꼽았다.

한편 휴 필 영란은행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지난달 팟캐스트에서 한 발언으로 인해 베일리와 비슷한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필은 “판매하는 제품에 비해 구매하는 제품이 많이 올랐다면 더 나빠지게 될 것”이라며 “따라서 영국에서는 누군가는 자신이 더 나빠졌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임금을 올리든 에너지 비용을 고객에게 전가하든 가격을 인상하여 실질 소비력을 유지하려는 시도를 중단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베일리는 임금-물가 스파이럴과 연이은 금리 인상에도 불구하고 인플레이션이 지속되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현재 영국이 직면한 중대한 경제적 어려움을 강조했다. 경제학자들이 임금 및 물가 상승에 대한 태도 변화를 촉구하는 가운데 영란은행이 필요에 따라 금리를 조정하겠다고 공언할 만큼 현재 영국의 경제는 불확실하다. 영란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지속 가능한 목표치로 되돌리기 위한 조치를 계속 취하고 있지만, 이는 단순한 통화 정책 조정 이상의 것을 필요로 하는 복잡한 문제임이 분명하다.

베일리와 필이 지적했듯 영국인들은 임금 가격 상승을 억제하고 영국 경제의 안정을 되찾기 위해 실질 소비력 감소를 받아들여야 할 수도 있다. 영란은행은 현재 한편으로는 고질적인 인플레이션을 해결해야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인플레이션이 경제 성장을 과도하게 저해하지 않도록 해야 하는 진퇴양난에 처해 있다. 오늘날 금융 시스템의 상호 연결된 특성을 고려할 때 영란은행의 결정은 영국뿐 아니라 세계 경제에도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