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 부족해진’ 삼성전자, 투자 자금 마련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전략적 자산인 ASML 지분 매각
삼전, 설비 투자 및 R&D 자금 조달 위해 ASML 지분 매각 제조업 불황으로 영업 실적 부진 겪은 게 지분 매각의 이유 업계선 투자자들이 설비 투자 안 하자, 삼전이 어쩔 수 없이 부족분 메꿨다는 분석 지배적
반도체 업황 부진으로 인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역대 최악의 영업실적을 기록한 삼성전자가 시설 투자 자금 마련을 위해 ASML 지분을 매각했다. ASML은 반도체 생산업체로, 삼성전자가 전략적 협업 관계 유치 차원에서 지난 2012년 지분 3%를 매입한 바 있다. 이에 전문가들은 최근 최악의 영업실적을 기록한 삼성전자가 ‘시스템 반도체’ 산업 제패 및 ‘반도체 클러스터’ 투자 자금 마련을 위해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식으로 전략적 자산을 매각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2개월 연속 우리나라의 ‘불황형 흑자’가 이어지면서, 향후 제조업 분야의 미래를 회의적으로 느낀 시장 참여자들이 제조업을 외면하고 단기안전자산인 머니마켓펀드(MMF)에 유동성을 옮기고 있는 만큼, 위 삼성전자의 상황처럼 우리나라 제조업들이 외부 투자를 받지 못하고 향후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기존 보유한 자산을 매각 후 스스로 자금 조달에 나설 것이란 암울한 미래가 전망된다.
ASML 지분 매각으로 3조 확보
15일 삼성전자가 발표한 반기보고서에 따르면 회사가 보유한 ASML 주식은 2분기 기준 275만72주로 직전분기 629만7,787주보다 지분율이 0.9% 줄었다. 아울러 동기간 지분 가치는 5조5,971억원에서 2조6,010억원으로 감소했다. 이외에도 삼성전자는 2분기에 중국 전기차 기업 비야디(BYD) 주식 238만 주, 국내 종합 장비 기업 에스에프에이 주식 154만4,000주 또한 각각 처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지분 매각으로 삼성전자는 약 3조1,500억원 가량의 자금을 확보했을 것으로 추산된다. 아울러 앞서 지난 2월엔 자회사인 삼성디스플레이로부터 20조원을 단기 차입한다고 밝히기도 했다.
ASML은 세계에서 유일하게 극자외선(EUV) 노광장비를 생산하는 네덜란드 기업이다. 삼성전자는 ASML과 전략적 협업 관계를 맺고 회사 반도체 산업을 독보적인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2012년 ASML의 지분 3.0%(1259만5,575주)를 3,630억원에 사들였고, 2016년 3분기에는 보유한 ASML 지분의 약 절반에 해당하는 1.4%를 팔아 7,500억원을 챙겼다.
투자 대비 수익으로만 놓고 보면 삼성전자가 어마어마한 이득을 봤다는 평이다. 실제 삼성전자는 이번 처분을 통해 2012년 매수했던 ASML 지분 전체 가격보다 10배 높은 수익을 얻은 것으로 보인다. 그간 삼성전자, TSMC 등 반도체 생산 기업들이 한정된 극자외선 장비를 하나라도 더 확보하기 위해 ASML에 뭉칫돈이 대거 쏠리면서 회사의 몸값이 그새 껑충 뛰었기 때문이다.
영업이익 부진으로 지갑 홀쭉해진 삼성전자
그러나 삼성전자가 이번에 ASML 지분을 매각한 것은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악 수준의 영업 실적으로 인해 부족해진 미래 투자 자원을 메꾸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올 1분기 연결기준 삼성전자는 매출 63조원, 영업이익 6,000억원을 기록했는데, 이는 전년 동기 대비 매출은 19%, 영업이익은 95.75% 감소한 수치다. 삼성전자가 영업이익이 1조원을 밑돈 것은 2009년 1분기(5,900억원)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가장 최근인 올 2분기 실적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다. 올 2분기 연결기준 삼성전자는 매출 60조원, 영업이익 6,000억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각각 22.3%, 95.7% 감소했다. 이같은 부진은 글로벌 경기침체 및 미중 갈등 등 대내외적 여건이 악화하면서 ‘반도체 한파’가 불어닥친 게 주요인으로 꼽힌다. 한편 삼성전자는 올 상반기 반도체 부문에만 8조9,400억원의 적자를 기록했지만, 역대 최대 수준인 25조3,000억원(반도체 23조2,000억원 및 디스플레이 9,000억원)의 시설 투자를 단행했다.
현재 MMF로 시중 유동성이 몰리고 있는 국내 금융 시장의 상황도 삼성전자를 비롯한 제조업 분야 기업들의 악재로 인식되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투자협회가 9일 공개한 데이터에 따르면 7일 기준 국내 MMF 총잔액은 189조5,778억원으로 나타났다. 작년 말 기준 MMF 잔액이 150조원을 조금 웃돌았던 점을 감안하면, 올해 내내 200조원 턱밑 수준까지 몸집을 불려오고 있는 것이다. MMF는 고객들로부터 자금을 조성 받고 1년 이내의 단기 우량채권에 투자하는 단기금융펀드로, 통상 투자자들의 경기에 대한 기대치를 엿볼 수 있는 일종의 시장 지표로 해석된다.
이처럼 최근 MMF 규모가 커지고 있는 것은 기관을 포함한 시장 참여자들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는 불황형 흑자 등으로 인해 향후 경기를 회의적으로 보고 안전 자산으로 취급되는 MMF에 자금을 묶어두고 있기 때문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시장 참여자들이 경기 불황에 공포를 느낀 나머지 금융 시장의 유동성이 모두 MMF로 몰리면서, 제조업에 해당하는 삼성전자가 자금 유치에 난항을 겪고 ‘울며 겨자 먹기’로 ASML이라는 전략자산을 매각해야 하는 상황에 몰렸다는 분석이다.
시스템 메모리 산업 제패, 미국의 반도체 견제 탈압박을 위해선 전략적 자산 매각 불가피
업계에선 삼성전자가 향후에도 보유한 기업 지분을 추가 매각할 가능성이 클 것으로 보고 있다. 반도체 산업 ‘각축전’에서 삼성전자가 기술적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대규모 투자 재원 마련이 절실하다는 이유에서다. 삼성전자는 올해 3나노 공정 신기술을 앞세워 파운드리 업계 세계 1위인 대만의 TSMC를 추격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시장조사업체 트렌스포드에 따르면 TSMC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작년 3분기 기준 56.1%로, 동기간 삼성전자 점유율(15.6%)의 4배에 가까운 수치다. 파운드리는 외부 업체가 설계한 반도체 제품을 위탁받아 생산·공급하는 시스템 반도체 사업을 말하는데, 삼성전자는 그간 메모리에 치우쳐 있는 반도체 산업을 다각화하기 위해 파운드리 사업에 뛰어들었다. 이에 2019년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이 시스템 반도체 업계 1위를 목표로 당찬 포부를 밝혔으나 4년 동안 삼성전자의 파운드리 사업은 되레 정체되는 모습을 보였다. 반면 TSMC는 AMD, 애플, 엔비디아, 퀄컴 등 글로벌 IT 기업 주문을 전부 쓸어가며 파운드리 세계 최강자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다.
메모리는 소품종 대량 산업인 데 반해 파운드리는 다품종 소량 생산 산업이다. 즉 두 산업이 같은 반도체 산업으로 분류되더라도 실상은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는 만큼, 삼성전자가 아무리 메모리 글로벌 1등이라고 하더라도 확실한 기술 혁신 없이는 파운드리 업계의 판도를 뒤집긴 어렵다는 것이다. 그런데 삼성전자가 지난해 6월 3나노 공정에 반도체 구성요소인 트렌지스터 구조에 게이트어올라운드(GAA) 기술을 적용하면서 반전에 나섰다. GAA는 트랜지스터의 전류 흐름을 더 세밀하게 조절하는 기술로, 기존 ‘핀펫’ 기술보다 반도체 전력 소비 및 성능을 크게 개선할 수 있다. 여기에 올해 들어 고성능 컴퓨팅용 반도체 수요가 급증하는 데다 확장현실 기기(eXtended Reality·XR) 시장이 커질 것이란 예측이 맞물리면서, 반도체 전력 효율과 성능 향상이 올 하반기 파운드리 업계의 주요 화두로 자리 잡게 될 가능성이 커졌다. 즉 삼성전자가 R&D 투자를 통해 칼을 갈면서 기회만 잘 잡는다면 조만간 기술적 우위를 바탕으로 TSMC를 누르고 파운드리 업계의 왕좌를 가져올 수도 있게 된단 뜻이다.
이와 동일한 맥락으로, 삼성전자는 올해 반도체 불황으로 저조한 실적을 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현재 20년 중장기 프로젝트인 ‘반도체 클러스터’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경기도 용인에 2042년까지 무려 300조원을 투입해 반도체 제조단지를 짓겠다는 목표다. 이는 기존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로 우뚝 선 메모리 반도체 생산뿐만 아니라 시스템 반도체 생산 밸류체인을 구성하는 패키지·테스트 외주기업(OSAT)과 파운드리 사업을 한 데 엮는 유례없는 대규모 프로젝트다. 즉 메모리 경쟁력은 유지하는 한편, TSMC에 밀려 상대적으로 취약한 시스템 반도체 산업을 크게 키우겠다는 획기적인 승부수인 것이다. 또한 이번 ‘반도체 클러스터’가 성공적으로 조성되면, 그간 미국이 반도체 및 과학법(CHIPS and Science ACT)을 통해 삼성전자를 비롯한 우리 기업의 미국 공장 진출에 대한 보조금 지원을 빌미로 기업 기밀을 요구해 오고 있었던 난처한 상황을 타개할 수 있게 된다. 이와 관련해 전문가들은 국내 대규모 투자를 통해 삼성전자의 영업 기밀이 경쟁 상대인 미국 기업들로 유출되는 것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을 막는 한편, 해외 추가 공장 건설로 인한 반도체 부품 공급 과잉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런 배경에서 삼성전자가 영업 이익 저조로 지갑이 홀쭉해졌음에도 불구하고, 3나노 공정과 GAA 기술, 그리고 메가 반도체 클러스터에 대규모 투자를 위해 어쩔 수 없이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식의 ASML이라는 전략자산 매각이 이뤄졌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여기에 현재 2년간 지속되고 있는 ‘불황형 흑자’에 MMF로 눈을 돌린 투자자들이 설비 투자를 근 1년간 방치하면서, 투자 부족분을 기업 스스로 메꿔야 하는 상황이 가까운 미래까지는 지속될 것이라는 암울한 미래가 점쳐지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