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달러 환율 152엔 깨지나” 엔화 가치 33년 만의 최저치 근접
엔화 팔고 달러화 사는 ‘엔 캐리 트레이드’, 엔화 약세의 주범 수출 기업 이익은 증가한 반면, 석유류 등 수입 물가 상승에 서민들은 부담 한편 국내선 ‘엔테크’ 활발, 엔화 환전액 전년 동기 대비 4배 이상 늘어
일본 엔화 가치가 올해 들어 가장 낮은 수준까지 떨어지면서 최저치 돌파를 눈앞에 두고 있다. 고금리 장기화에 따른 긴축 기조를 유지하는 미국과 소위 ‘돈 풀기’를 고수하는 일본의 상반된 통화정책에 따라 미·일 금리차가 확대된 영향이다. 이 같은 역대급 엔저 현상은 일본의 각 경제 주체에 엇갈린 영향을 주고 있다. 엔화 가치 하락에 일본 수출 기업들은 수혜를 누리고 있지만, 석유 원자재를 비롯한 수입 물가 상승에 서민들은 고통을 느끼고 있다.
1990년대 이후 ‘슈퍼 엔저’ 눈앞에 둔 일본
13일(현지 시간) 미 뉴욕 외환시장에서 엔·달러 환율은 달러당 151.92엔까지 상승하며 지난해 최고치(151.94엔)에 근접했다. 이 수준을 넘어서면 달러화에 대한 엔화 가치는 1990년 이후 약 33년 만의 최저로 떨어지게 된다. 다음날 도쿄 외환시장에서 151.6엔대에 거래되며 소폭 하락했지만, 지난주 심리적 저항선인 150엔을 돌파한 뒤로 엔화 가치 반등은 나오지 않고 있다.
엔화 약세의 주범으론 미국과 일본의 금리 차(엔 캐리 트레이드)가 꼽힌다. 최근 미국 국채금리가 4% 중후반대로 올라서자 금리가 낮은 엔화를 팔고, 금리가 높은 달러를 사는 거래가 활발해지면서 엔저가 심화된 것이다. 여기에 미 연방준비제도(Fed)가 현재 수준의 고금리 기조를 길게 끌고 가려는 의도도 내비치고 있어 엔 캐리 트레이드가 장기화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의 고금리 장기화 전망에 일본 중앙은행(BOJ)은 지난달 말 10년물 국채 금리 상승을 사실상 허용하는 정책을 내놓은 바 있다. 그러나 글로벌 금융시장에서 심리적 저항선으로 여겨지던 달러당 150엔 선이 무너지면서 엔·달러 환율이 재차 상승 중이다. 여기에 무역·해외투자 외화자금이 일본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점도 엔저 현상을 심화하는 요인으로 꼽힌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수출 기업 가운데 최근 엔저로 인해 자금을 외화로 보유하는 경우가 늘었다”며 “일본보다 성장 기대가 큰 해외에 자금이 머물게 되면 엔저가 더 장기화할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고 분석했다.
수출 기업은 웃지만, 서민들에겐 부담만 키우는 ‘엔저’
엔저 현상은 경기 침체에 빠진 경제를 되살리려는 일본 정부 의도에 따라 발생한 측면도 있다. 엔화 가치 하락에 따른 수출 기업의 경쟁력을 바탕으로 기업 투자 확대와 임금 상승효과를 확대하고, 늘어난 소비를 통해 경제 성장을 이끌겠다는 구상이다.
그러나 수출 기업들이 투자나 인건비 등 내수 활성화에 소극적으로 나오면서 일본 정부의 예상과 달리 경기 회복이 더디게 나타나고 있다. 특히 가파른 엔저 여파로 수입 물가가 급격히 오르는 등 오히려 국내 소비자 부담이 커졌다는 비판이 나온다. 니혼게이자이는 “당초 엔저 현상이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된다는 견해를 바탕으로 당국이 일정 부분 엔화 가치 하락을 용인했지만, 최근 수출은 늘지 않는 반면 수입 물가는 크게 오르고 있어 엔저로 인한 효과에 부정적인 견해가 더 많다”고 설명했다.
이날 스즈키 슌이치 일본 재무상도 “추가경정예산이나 경제대책으로 엔화 약세에 따른 마이너스 영향을 완화하면서 긍정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것이 중요할 것으로 보인다”고 언급하며 이 같은 문제의식에 어느 정도 공감을 드러냈다.
역대급 엔저에 엔화예금으로 몰리는 국내 자금
한편 기록적인 엔저에 국내 금융시장에선 엔화 투자가 활발히 이뤄지고 있다. 같은 날 금융권에 따르면 KB국민·신한·하나·우리 등 4대 시중은행 엔화예금 잔액은 지난 9일 기준 1조1,090억 엔(약 9조5,606억원)으로 집계됐다. 지난달 1조 엔을 넘긴 이후 열흘 만에 1,000억 엔(약 8,621억원)이상 증가한 셈이다.
4대 은행의 엔화예금은 올해 4월까지 지속 감소세를 보였으나 5월부터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난 4월 엔화예금 잔액(5,789억엔)과 비교하면 사실상 거의 2배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엔저 현상이 정점에 달했던 지난달 올해 처음 1조 엔을 넘어선 뒤로 증가세가 지속되고 있다.
시중은행에서 취급하는 대다수 엔화예금 상품의 이자율이 0%대임에도 엔화예금이 늘어난 이유는 역대급 엔저 현상에 따른 환차익을 기대하는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원‧엔 재정환율은 지난 6일 100엔당 867.38원을 기록하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최저 수준까지 떨어졌다.
아울러 엔화 환전액도 큰 폭으로 증가했다. 지난달 말 기준 5대 은행의 엔화 매도액은 약 3,138억 엔(약 2조7,053억원)으로 전년 동기 4배 가까이 늘었다. 이 역시 엔저 현상에 따라 일본 여행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한국관광데이터랩에 따르면 지난 9월 일본을 방문한 국내 관광객 수는 58만 명으로 전년 대비 1,640%나 증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