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총]”무조건 아낀다” 대규모 적자 떠안은 SK하이닉스, 설비투자 절제 계획 발표
대규모 증설 이후 닥쳐온 반도체 불황, SK하이닉스의 '비명' 누적되는 적자와 부채, 지난해 부채총액만 38조4,310억원 시설투자 절제·고부가가치 상품 중심 공급으로 수익성 제고
지난해 극심한 반도체 경기 불황을 겪은 SK하이닉스가 올해도 절제된 설비투자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매출을 기준으로 고대역폭메모리(HBM) 등 고부가가치 인공지능(AI) 메모리반도체 경쟁력 제고에 우선순위를 두고, 설비 투자의 효율성을 극대화하겠다는 구상이다. 곽노정 SK하이닉스 대표이사 사장은 27일 경기 이천 SK하이닉스 본사에서 열린 제76기 정기주주총회에 참석, 이같이 밝혔다.
“투자 증가 최소화하겠다” SK하이닉스의 결단
곽 사장은 주주총회 자리를 빌려 “투자 효과를 극대화하고, 주주 가치를 높이기 위해 당해년도 매출을 기준으로 ‘캐팩스 디시플린(CAPEX Discipline, 설비투자 규범)’을 수립하고 준수할 것”이라며 “장기적인 성장과 재무 안정성의 균형을 고려해 설비투자 수준을 결정하며 재무 건전성을 높이겠다”고 밝혔다. 이어 “고수익 제품 비중을 확대하고, 신규 제품은 적기에 개발하며 시장 환경에 맞춰 양산 규모를 조절해 수익성과 투자 효율성을 개선할 것”이라고도 부연했다.
곽 사장의 발언은 올해 메모리 반도체 업황이 회복되며 투자 환경이 개선된다고 해도 설비투자 절제 전략을 추진하겠다는 의미로 풀이된다. 실제 SK하이닉스는 지난해 4분기 실적발표회에서도 “2024년 설비투자는 철저하게 고객 수요와 수익성에 기반한 투자 집행과 효율성 강화로 전년 대비 증가분을 최소화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구체적인 설비투자 전망치가 제시되지는 않았으나, 시장 반등을 앞두고 과거와 같은 대규모 증설에 나설 가능성은 사실상 상당히 낮을 것으로 보인다.
이 같은 전략은 SK하이닉스가 지난해 하반기부터 강조하던 ‘수익성 중심 경영’의 일환으로 풀이된다. 이전과 같이 시장 점유율 확대를 위한 무조건적으로 대규모 증설을 단행하고, 공급과잉으로 막대한 손실이 발생하는 상황을 경계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SK하이닉스의 공급 전략은 다량의 반도체를 양산하는 방식보다 소량을 판매해도 높은 수익을 받을 수 있는 고성능 AI 메모리 반도체를 중시하는 방향으로 기울고 있다.
대규모 설비 투자가 부른 폐단
SK하이닉스가 이처럼 ‘수익성’에 방점을 찍는 이유는 무엇일까. SK하이닉스는 지난 2022년 시설 투자에 20조원에 달하는 거금을 지출했다. 영업이익이 약 7조원으로 전년(12조4,000억원) 대비 급감했음에도 불구, 반도체 호황기였던 2018년(약 17조원)보다도 공격적인 투자를 단행한 것이다. 하지만 2022년 4분기부터 미국의 긴축 기조가 본격화하며 반도체 시장 전반이 얼어붙었다. PC, 스마트폰, 데이터센터 등 반도체 수요 전반이 위축된 영향이다.
메모리 시장은 순식간에 공급과잉 상태로 접어들었고, SK하이닉스의 실적은 급속도로 악화했다. 지난해 SK하이닉스의 연간 매출은 32조7,657억원, 영업손실은 7조7,303억원 수준이다. 글로벌 반도체 시장 불황으로 자그마치 24%에 달하는 영업손실률을 기록한 것이다. 같은 기간 순손실은 9조1,375억원, 순손실률은 28%에 육박한다. 4분기에는 3,460억원의 영업이익을 기록하며 흑자 전환에 성공했지만, 이전의 손실을 메꾸기는 역부족이었다.
가파른 실적 악화는 ‘빚’을 불러왔다. 지난해 2월 SK하이닉스는 1조3,900억원 규모의 회사채(발행금리 3.825~4.903%)를 발행하며 자금을 끌어모았다. 같은 해 4월에는 1조9,744억원 규모의 해외교환사채(표면이자율 1.75%)를 찍어내기도 했다. 하반기에는 신한은행, SK증권 등에서 기업어음(이자율 4.40~4.86%)으로 약 8,000억원을 대출받았다. 2022년 9월 1.2배에 불과했던 상각 전 영업이익(EBITDA) 대비 차입금 배율은 2023년 9월 14.7배까지 급상승했다.
급증한 부채, 이제는 달라질 때
재벌닷컴이 매출 10조원 이상 30대 대기업의 2023 회계연도 감사보고서(별도 기준)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SK하이닉스의 부채총액은 전년 대비 21.5% 증가한 38조4,310억원에 달했다. 부채비율은 전년보다 18%포인트(p) 상승한 70.5%로 확인됐다. 부채총액이 급증함에 따라 이자 비용 역시 1조1,510억원으로 전년(3,530억원) 대비 226.2% 불어났다.
막대한 손실과 부채를 떠안은 SK하이닉스는 ‘변화’를 다짐했다. 이번 주주총회를 통해 시설투자 절제를 통한 수익성 관리 의지를 드러낸 것이다. 업계에서는 SK하이닉스가 주로 선단공정 전환, HBM 생산을 위한 실리콘관통전극(TSV) 생산능력 확대, 국내 신규 팹(공장) 건설 투자 등 투자가 필수적인 분야에만 자원을 집중할 것이라는 전망이 흘러나온다.
공급 전략의 중심축 역시 고부가가치 AI 반도체로 이동할 것으로 보인다. AI 메모리 반도체는 고객과의 협의를 거쳐 가격과 물량을 조절한다. 이전과 같이 공급 과잉 사태로 대규모 손실이 발생할 가능성이 적다는 의미다. SK하이닉스 자체 기술력으로 성능과 품질에 따른 차별화가 가능한 만큼, 오히려 ‘찍어내기’식 생산보다 높은 수익성을 확보할 수도 있다. 현재의 SK하이닉스 입장에서는 고부가가치 제품을 안정적으로 판매하는 것이 최선의 전략이 될 수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