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촌들이 판 뒤집은 ‘한미그룹 경영권 분쟁’, 해결 과제 첩첩산중
임씨 남매 사촌들, 주주총회서 막판 형제 측 지지 모녀 vs 형제 분쟁, 결국 형제 측 승리로 막내려 상속세 납부 및 신약 개발 R&D 재원 마련 숙제
한미약품그룹 경영권 분쟁에서 송영숙 회장의 특별관계인으로 분류됐던 고 임성기 창업주의 조카들이 형제 측 손을 들어주면서 임종윤 전 한미약품 사장의 경영복귀가 확정됐다. OCI그룹과 통합을 두고 불거진 오너가의 분쟁은 일단락된 모양새지만, 상속세 이슈 및 R&D 재원 마련 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한미 경영권 분쟁 ‘캐스팅보터’, 사촌들의 3%
1일 업계에 따르면 임 전 사장은 지난달 28일 경기도 화성시 신텍스(라비돌호텔)에서 열린 한미사이언스 제51기 정기주총에서 본인을 포함해 차남인 임종훈 사내이사(전 한미약품 사장), 권규찬(DXVX 대표이사), 배보경 기타비상무이사(카이스트 경영대학 교수), 사봉관 사외이사(변호사) 등의 사내이사 선임 주주 제안이 모두 통과되며 이사회 다수를 차지했다.
당초 시장에서는 임 전 사장 측이 불리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했다.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지분율 12.15%, 849만8,254주)이 임 전 사장의 손을 들어줬지만, 국민연금공단(7.66%, 535만8732주)이 송 회장 측에 힘을 실어주면서 2.1%포인트 차로 역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투표에선 모녀 측인 송 회장과 임주현 부회장은 출석 의결권 수의 48% 찬성표를 받았고, 형제 측은 52% 내외 찬성표를 받으며 과반을 넘겼다. 약 4%포인트가 승패를 가른 것이다. 이에 송 회장 등 현 이사회 측이 추천한 6명의 이사 후보들은 보통결의 요건(찬성 50% 이상) 미달로 고배를 마셨다.
막판 4%포인트 격차를 만들어 낸 캐스팅보터는 임씨 남매들의 사촌들이었다. 선대 회장의 형님 측 자녀들이 형제 측에 힘을 실은 것이다. 이들이 보유한 지분은 약 3.2%다. 애초 모녀 측은 사촌들이 자신들에게 힘을 실어주거나 기권할 것으로 예상했으나, 사촌들은 주주총회 막판에 극적으로 형제 쪽에 합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형제 측과 모녀 측이 소수점 지분 경쟁을 벌이고 있었던 만큼 사촌들의 변심이 판세에 미치는 영향력은 실로 컸다.
소액주주의 표도 결정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주총에는 2,160명의 주주가 참여했고 이들의 소유 주식 수는 5,962만4,506주로 의결권 있는 주식 총수(6,776만3,663주)의 88%를 차지했다. 양측이 확보한 주요 주주를 제외하면 의결권 행사에 참여한 소액주주의 지분율 합계는 4.5% 정도였다. 이들의 의결권 행사로 2.09%p의 우호지분 차이를 뒤집었으니 소액주주 대부분이 형제 측의 손을 들어준 셈이다.
상속세 재원 마련 ‘발등의 불’
모녀와 형제의 경영권 분쟁은 결국 형제의 승리로 막을 내렸지만, 상속세 납부 등은 과제로 남았다. 당초 이번 한미약품의 경영권 분쟁은 상속세로 인해 촉발됐다. 지난 2020년 창업주가 타계하면서 유족에게 총 5,400억원의 상속세가 부과되자, 납부 자금 마련을 위해 송영숙 회장 모녀가 OCI그룹과의 통합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형제 측과 갈등이 빚어진 것이다. 현재 오너 일가는 연부연납 제도를 활용해 5년간 6차례에 걸쳐 분할 납부 중이며, 납세 의무를 다수 상속자가 함께 하는 연대납부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 3차 납부가 완료됐고 아직 2,700억원의 상속세가 남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4차 납부 기한은 4월 말이다.
오너 일가는 지금까지 지분을 처분하거나 금융권 차입을 통해 세금을 납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송 회장은 2021년 은행과 증권사 등을 통해 1,300억원 규모의 주식담보대출을 받았다. 임종윤 전 사장은 1,871억원, 임종훈 전 사장은 840억원, 임주현 부회장은 680억원가량 담보대출이 남아 있다. 송 회장은 상속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지난해 모녀 지분을 사모펀드에 매각하는 방안도 추진했으나 최종 불발됐다.
결국 모녀 측이 상속세 문제를 해결하면서 경영권을 안정시킬 방안으로 찾은 것이 OCI 그룹과의 통합이었다. 통합이 성사됐을 경우 송 회장은 유상증자와 구주 매각 및 현물출자를 포함한 패키지 딜을 통해 약 2,700억원의 현금을 확보하게 된다. 송 회장은 이를 통해 상속세를 해결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형제 측이 이사회를 장악하면서 모녀 측이 추진한 OCI그룹과 통합은 무산됐다.
문제는 임 사장의 재무 상태가 견실하지 못하다는 점이다. 현재 주식담보대출 등 금융권에 등재된 임 사장의 개인 부채는 1,700억원이 넘으며, 연간 이자만 100억원에 달한다. 임 사장이 보유하고 있는 한미사이언스 지분은 9.91%로, 이를 활용한 주식담보대출 비중은 99%를 넘어선다. 아내인 홍지윤씨와 자녀들을 합한 가족 대차 비율은 보유 주식 비중의 121%를 웃도는 것으로 확인됐다. 통상 금융사들은 기업의 최대 주주와 특수관계자들의 채무에 대해 우대 금리 등 유리한 조건을 제시한다. 하지만 임 사장의 경우 경영권 분쟁이 촉발되면서 최대 주주인 송 회장과의 특수관계를 해소했다. 채무기관으로서는 금리와 담보 조건을 유리하게 제공하기 어려워진 셈이다.
제약업계 “소액주주들 한미 사례 기준 삼을까 우려”
제약업계에서는 상속세 이슈로 인해 신약 개발을 위한 R&D 투자 등 경영 활동이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간 한미약품이 국내 제약바이오 업계에서 비만·당뇨·희귀·난치성 질환 치료제 분야에서 어느 기업보다 혁신 신약 개발에 앞장서 왔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만큼 한미약품은 R&D 투자에 집중해 왔다.
실제로 한미약품은 상속세로 인한 경영권 갈등이 불거지기 전까지 앞선 기술력을 통해 지난 2015년 글로벌 제약 업체 사노피와 5조원 규모의 기술이전 계약을 체결한 바 있다. 이밖에도 그 해에만 일라이릴리, 얀센, 베링거인겔하임 등 글로벌 제약 업체와 6건의 기술이전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창업주 별세 이후 상속세 문제가 주요 사안으로 불거지면서 신약 개발 등 회사 경영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무엇보다 제약업계가 주목하는 것은 한미약품 정도 규모의 국내 제약사가 합병 및 통합 과정에서 경영권 리스크를 극복하지 못해 무산되는 선례를 남겼다는 것이다. 국내 제약업계에서는 전례가 없는 ‘이종업계와의 통합’이라는 형태가 어떤 시너지를 발행하게 될 것인가를 기대했던 업계 일각에서는 아쉽다는 평이다. 또 제약 R&D 투자 개발과 규모 한계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업계 관계자들은 “앞으로 이같은 이종업계간의 인수합병 사례는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다. 국내 제약 규모는 사실상 글로벌 규모에 비하면 경쟁 구도가 될 수 없다”며 “소액주주들이 인수합병 시 경영권 분쟁 등 한미 사례를 기준으로 삼는다면 제약업계에 긍정적이지 만은 않다”고 우려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투자은행(IB)업계에서는 형제가 결국 막대한 개인 빚과 잔여 상속세 해결을 위해 해외 자본에 한미사이언스 지분을 매각할 것이란 관측도 나온다. 형제 측은 지분 매각설을 부인하고 있으나, 뚜렷한 대안 역시 제시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경영권을 두고 다툰 한미그룹 현 경영진도 이점을 걸고 넘어졌다. 앞서 형제 측은 5년 내에 1조원 이상의 투자를 유치해 한미그룹을 시가총액 200조원대 기업으로 성장시키겠다는 목표를 제시한 바 있다. 하지만 형제는 자금 조달 방안을 명확히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투자처 역시 밝히지 않은 상태다.
이에 임 부회장은 “상속세 문제와 관련해 구체적인 대안과 자금의 출처를 밝혀달라”고 요구했고, 송 회장 역시 상속세와 1조원 투자의 출처를 밝히라며 “둘의 자금 사정은 그 누구보다도 내가 잘 안다. 장남과 차남은 OCI와 통합을 저지한 후 일정 기간 경영권을 보장해 준다는 해외 자본에 지분을 매각하는 선택을 할 것”이라고 내다봤다.
시장에서는 잔여 상속세를 해결하지 못하면 보유 중인 한미사이언스 주식이 매물로 대거 나오면서 ‘오버행’이 발생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 상속세 납부가 지연될 경우 세무당국에 담보 설정된 주식에 대한 반대매매로 매각이 진행되기 때문이다. 오버행은 언제든 시장에 쏟아져 나올 수 있는 잠재적 과잉 주식 물량을 뜻하는 말로, 오버행이 발생하면 한미사이언스 주가는 폭락하게 된다. 결국 피해는 소액주주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