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KR, 금융 경색·상속세 등으로 어려움 겪는 한국 기업들에 투자 확대
KKR, 2020년부터 SK E&S·HD현대·LS·무신사·태영 등 韓 기업 투자 확대
부동산 PF로 위기 빠진 국내 주요 부동산에도 적극적으로 투자 나서
한미약품, 효성 등 상속세 마련에 어려운 기업들도 주요 투자처로 부상
글로벌 2위 사모펀드(PEF) 운용사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가 한미약품그룹의 경영권 분쟁에 참여할 것으로 알려진 가운데, KKR이 지난해부터 국내 시장에 투자해 온 주요 자산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올해 2월 KKR은 64억 달러(약 8조3천억원) 규모의 ‘아시아 태평양 인프라Ⅱ펀드’ 모집을 완료했고, 이미 지난해부터 약 10건에 대한 프로젝트에 투자를 진행 중이다. 지난 2019년 1호 펀드를 조성한 이래 운용자산이 130억 달러(약 17조원)까지 성장한 가운데, 국내 기업 중 에코비트, SK E&S, HD현대마린솔루션, LS오토모티브, 무신사와 최근 들어 워크아웃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태영건설에도 투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한미약품그룹 경영권 분쟁에 참여하는 것과 더불어 상속세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주요 한국 기업에도 KKR이 투자를 확대할 것으로 내다본다.
한국 시장에 보폭 넓히는 KKR
3일 업계에 따르면 KKR의 공동최고경영자(CEO) 조셉 배(한국명 배용범) 대표는 오는 6월 한국경제신문에서 주최하는 ‘한경 글로벌마켓 콘퍼런스 NYC 2024’에 불확실성의 시대를 타개할 투자 전략을 강의할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배 대표가 대외 강연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선 일이 드문 만큼 이례적인 행보라는 평가다. 배 대표는 지난 2011년 아내인 제니스 리 작가의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The Piano teacher’ 홍보를 겸한 연세대학교 강연에 나선 이후 국내 기관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얼굴을 비춘 일이 드물었다.
업계 관계자들은 이번 배 대표의 행보가 최근 들어 KKR이 아시아 태평양 지역, 특히 한국에 투자 보폭을 넓히고 있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해석이다. 지난 1월 8일 태영의 지주회사 티와이홀딩스(TY홀딩스) 공시에 따르면 KKR은 워크아웃에 돌입한 태영과 환경기업 에코비트 지분을 담보로 잡고 TY홀딩스가 발행한 4천억원 규모의 사모 회사채 인수를 포함해 7천억원을 태영에 투자했다. 앞서 지난해 1월 TY홀딩스는 KKR을 대상으로 4천억원의 사모채를 발행한 바 있다. 당시 사모채 발행 조건은 4년 만기에 표면금리 13%로 매년 이자만 500억원이 넘는다. 당시 BBB-급 사모 회사채 금리가 11.5% 내외였던 것을 감안하면 담보로 잡힌 에코비트 지분을 고려할 때 KKR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는 평가다.
TY홀딩스와 KKR이 50%씩 지분을 들고 있는 에코비트는 지난해 매출 6,427억원과 영업이익 1,209억원, EBITDA(상각 전 영업이익) 1,960억원을 기록한 알짜 자회사다. 태영 측의 워크아웃 자구안 중 핵심은 에코비트 지분 매각으로, 태영 측은 보유 지분 50%에 대해 EBITDA의 15배 수준의 매각 가액을 기대하고 있지만, 시장에서는 10배인 1조원 수준에서 거래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에코비트에 KKR이 지분 매입에 들어갔던 것은 지난 202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태영(T)과 SK그룹(SK)의 이름을 딴 ‘TSK코퍼레이션’이었던 당시, KKR은 소액주주 지분을 사들인 후 보유 중이던 이젤에스피브이와 합병하는 방식으로 50%의 지분을 확보하게 됐다. 지난해부터 이어진 7천억원 규모의 태영 투자도 사실상 에코비트 인수에 대한 포석이라는 것이 업계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KKR은 지난해 12월 TY홀딩스와 창업주 일가가 보유한 태영인더스트리 지분 전량을 2,400억원에 인수했고, 이어 평택싸이로 지분 37.5%를 TY홀딩스로부터 600억원에 매입하기도 했다.
국내 부동산 시장에도 손 뻗는 KKR
KKR과 더불어 한국 시장에 그간 관심을 보이지 않던 주요 글로벌 PEF들도 한국 부동산 시장에도 관심을 보이고 있다. 국내 금융기관과 기관투자자들이 해외 상업용 부동산에서 막대한 손실을 본 후 위축된 만큼, 대형 부동산 매물들을 받아줄 수 있는 국내 기관이 드물 것이라는 판단이 깔린 것이다. 지난 1일 블랙스톤은 강남 오피스 랜드마크 중 하나인 아크플레이스를 코람코에 매각했다. 매각가는 7,920억원으로, 합계 3,200억원의 매각 차익을 거둔 것으로 추산된다. 아크플레이스는 네이버의 서울 사무소, 토스 그룹 등의 국내 주요 기업들이 입점해 있다. 코람코는 시티코어와의 컨소시엄으로 서울시 중구 무교동 소재 CBD(중심권역)의 ‘더 익스체인지 서울’ 빌딩에 대해서도 인수 절차를 진행 중이다.
국내 부동산 시장이 열린 가운데 KKR은 홍콩계 렌탈하우징기업인 위브리빙(WEAVE LIVING)과 합작 벤처를 설립하고 서울 내 도심형 임대주택을 선보인다. 지난달 27일 KKR에 따르면 양사는 초기 자본금으로 1,200세대의 임대주택을 확보한 뒤 추이를 봐가며 확장해 나갈 계획이다. KKR은 과반수 지분을, 위브리빙은 나머지 소수 지분을 보유한다. 그간 상업용 부동산에만 관심을 보일 것으로 예상됐던 KKR이 국내 임대주택 시장까지 손을 뻗은 것이다.
지난해 12월 파트너로 승진한 김양한 KKR 한국사무소 부대표는 IB업계에 널리 알려진 인프라 및 부동산 전문가다. 이번 임대주택 사업뿐만 아니라, 2021년 SK E&S에 대한 2조4천억원 투자, 에코비트 투자 등의 굵직한 투자들이 모두 김 파트너의 손을 거친 것으로 알려졌다. IB업계에서는 김 파트너의 승진이 한국 부동산 시장에 대한 KKR의 전략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인사로 해석한다. 재생에너지와 전력 및 유틸리티, 상하수도, 디지털 인프라, 운송 등은 대표적으로 변동성이 낮고 하방이 보호되는 핵심 인프라 투자처다.
상속세로 어려움 겪는 한미약품그룹 경영권 분쟁에도 참여
지난달 28일 주주총회에서 승부가 결정 난 한미약품그룹 경영권 분쟁에도 KKR이 깊숙하게 관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미-OCI 통합을 반대했던 임종윤·종훈 형제 측이 지분 12.15%로 ‘캐스팅보트’를 행사했던 신동국 한양정밀 회장의 지분을 KKR이 경영권 프리미엄까지 얹어 인수해 주는 조건으로 설득에 나섰던 것이라는 후문이다. 그 외 한미약품 집안 사촌들의 소액주주 지분도 KKR에서 같은 조건으로 인수하는 조건을 타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9일 별세한 조석래 효성그룹 명예회장의 경우도 높은 상속세 탓에 자녀들이 지분 일부를 매각해야 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지는 만큼, 주요 PEF들의 관심이 쏠리고 있는 상황이다. KKR 내 사정에 정통한 한 관계자는 상속세 납부를 위한 우군이라는 관점에서 지분 인수에 들어가기보다, 에코비트 사례처럼 장기적으로 기업 경영권을 인수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높은 기업들의 지분 인수에 관심을 보일 것이라고 내다봤다. 실제로 경영계에서는 한미약품의 특수관계인 지분 상당수가 KKR로 넘어가게 될 경우 과거 오스템임플란트 경영권이 공개매수를 통해 MBK파트너스로 넘어갔던 사례가 반복될 가능성도 점쳐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