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선은 상관 없다” 인플레이션만 보고 달리는 Fed, 멀어지는 기준금리 인하
파월 Fed 의장 "인플레이션 바탕으로 금리 고려, 정치는 무관"
준칙주의 앞세우는 Fed, 결국 금리 인하 관건은 인플레이션
3% 초중반 맴도는 미국 CPI, 탄탄한 시장 지표 등이 걸림돌
제롬 파월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섣불리 기준금리를 인하하지 않겠다는 의지를 명확히 했다. 금리 인하를 위해서는 인플레이션 하락에 대한 확신이 필요하며, 미국 대선 등 정치적 이슈는 금리 인하 결정에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는 시각을 드러낸 것이다. 파월 의장은 3일(이하 현지시간) 미 스탠퍼드대학교 경영대학원 주최 포럼 강연에 참석, 이같이 발언했다. Fed 측이 준칙에 의거한 ‘신중론’을 거듭 강조하고 나선 가운데, 글로벌 시장의 금리 인하 기대는 점차 식어가고 있다.
파월 Fed 의장의 시각
파월 의장은 3일 강연에서 “인플레이션이 목표치인 2%를 향해 지속적으로 하락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 때까지 기준금리를 인하하는 건 적절하지 않다”고 발언했다. 그는 “전년 동기 대비 기준, 올 2월 전체 개인소비지출(PCE) 상승률이 2.5%로 1년 전의 5.2%보다 낮아졌다”며 “전체적으로 인플레이션은 크게 둔화했지만, 여전히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의 목표치인 2%를 상회하고 있다”고 짚었다.
파월 의장은 “올해 초반 데이터도 견조한 성장세, 강하지만 재조정 중인 노동 시장, 울퉁불퉁한 경로를 따라 2%로 하락하는 인플레이션 등으로 요약되는 전반적 상황을 크게 바꾸지는 못하고 있다”며 “강한 경제와 현재 인플레이션 상황을 고려할 때 앞으로 들어오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금리를 결정할 시간이 있다”고 했다. 차후 시장 상황의 변화를 면밀히 관찰, 시간을 들여 금리 인하 여부를 결정하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이다.
한편 파월 의장은 Fed의 ‘독립성’에 대한 발언에 긴 시간을 할애한 것으로 전해진다. 이는 오는 11월 미국 대선을 앞두고 Fed의 통화정책에 개입·관여하려는 정치권의 움직임을 겨냥한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은 올 2월 폭스비즈니스와의 인터뷰에서 “파월 의장이 대선에서 민주당을 돕기 위해 금리를 인하하려 한다”며 “파월 의장은 정치적”이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이에 대해 파월 의장은 “Fed 정책 입안자들은 선거 주기와 일치하지 않게 장기 임기를 수행한다”며 “입법을 통하지 않는 한, Fed의 결정은 정부로 인해 번복될 수 없다”고 짚었다. 이어 “이러한 독립성 덕분에 단기적 정치적 사안을 고려하지 않고 통화 정책을 결정할 수 있고, 그렇게 해야 한다”고도 강조했다.
Fed의 ‘준칙주의적’ 판단
파월 의장의 발언을 접한 국내 전문가들은 파월 의장이 완고한 태도를 보일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평가를 내놓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제 전문가는 “통화 정책은 준칙(rule)에 입각해서 펼치는 게 기본”이라며 “(통화 정책은) 주변 환경 변화와는 무관하게 정책 목표에 초점을 맞춰 전개돼야 한다. 미국 Fed의 경우 현재 궁극적 목표인 물가 안정에 초점을 맞춰 움직이고 있는 것뿐”이라고 짚었다. 각국의 중앙은행 총재는 정치적 상황과 무관하게 ‘원칙론’을 고수하는 것이 일종의 상식이라는 설명이다.
이처럼 일정한 준칙을 정하고, 이에 근거해 통화정책을 결정하는 것을 ‘준칙주의적’ 통화 정책이라 칭한다. 정부가 경제 정책의 준칙으로 ‘물가를 자극하지 않는 경제 성장’을 내세운 경우, 중앙은행 역시 웬만한 상황에선 인위적 경기 부양에 나서지 않는 식이다. 준칙주의자들은 준칙이 정책당국의 무능과 권한 남용 가능성을 낮추는 효과가 있다고 본다. 중앙은행에 지나친 재량이 허용되면 중앙은행이 경제 상황을 오판해 시장 조정 과정에서 실수를 범할 수 있다는 시각이다.
반면 통화 정책 결정 시 재량(discretion)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재량주의 학자들도 존재한다. 정책당국이 준칙에 지나치게 얽매이면 경제 상황 변화에 유연하게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들은 예측할 수 없는 사태로 경기가 급격히 침체하고 대량 실업이 발생하는 경우, 중앙은행이 재량을 발휘해 적극적인 금융 완화 정책을 펼쳐야 한다고 본다.
흐려지는 금리 인하 가능성
파월 의장이 이번 발언을 통해 드러낸 것은 ‘준칙주의적 입장’이다. 현재 Fed는 대선, 경기 침체 등 대외적 상황보다 ‘물가 안정’이라는 준칙에 무게를 싣고 있는 셈이다. 이에 따라 차후 미국의 기준금리 인하 기준은 ‘물가 안정 여부’에 국한될 가능성이 크다. 시장에서는 6월 기준금리 인하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으나, 인플레이션이 좀처럼 잡히지 않을 경우 그 시기가 언제까지고 미뤄질 수 있다는 의미다.
미국 물가 안정세가 FOMC의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하는 가운데, 이미 곳곳에서는 금리 인하 시기가 늦춰질 수 있다는 분석이 흘러나오고 있다. 미국 노동부에 따르면 지난 2월 미국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전년 동월 대비 3.2% 상승했다. 이는 지난 1월 상승률(3.1%) 대비 소폭 높은 수준이다. CPI는 2022년 6월 9.1%로 고점을 기록한 후 하락곡선을 그려왔으나, 지난해 6월 이후부터는 3%대 초중반 선에서 정체돼 있는 상태다. 한편 지난 2월 기대인플레이션(3년 뒤)은 2.7%로 전월 대비 0.3%p 상승했다. 5년 뒤 기대 인플레이션은 0.4%p 상승한 2.9%를 기록, 6개월 만에 최고치를 경신하기도 했다.
예상 이상으로 견조한 미국의 제조업 지표 역시 금리 인하 기대감을 낮추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미국 공급관리협회(ISM)에 따르면, 3월 미국의 제조업 구매관리자지수(PMI)는 50.3으로 집계됐다. 이는 시장 전망치인 48.1을 웃도는 것은 물론, 전월(47.8)보다도 눈에 띄게 높은 수준이다. PMI의 기준선은 50으로, 지수가 기준선을 넘어설 경우 해당 산업이 경기 확장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풀이한다. 미국 제조업 경기가 17개월에 달하는 침체기를 견디고 본격적인 확장세에 접어들었다는 의미다.
이처럼 양호한 경제 지표와 좀처럼 잡히지 않는 인플레이션은 Fed 측의 의사 결정 시간을 벌어주고 있다. 실제 지난달 27일 크리스토퍼 월러 Fed 이사는 “금리 인하를 서두를 필요가 없다”는 내용이 담긴 연설을 진행하기도 했다. 당시 월러 이사는 최근 인플레이션 관련 지표가 실망스럽다고 평가하며 “(금리 인하에 앞서) 적어도 몇 달간 더 나은 지표를 보고 싶다”고 발언했다. 경제 성장과 노동 시장이 지속적으로 강세를 보이고 있음에도 불구, 인플레이션 둔화와 관련된 진전은 느려지고 있다는 지적이다. 당시 월러 이사는 해당 연설에서 “(금리 인하를) 서두르지 않는다”라는 표현을 4차례나 반복한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