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고려아연 ’75년 동맹’ 붕괴, 남은 건 진흙탕 싸움뿐?
신사업에 총력 기울인 고려아연, 대기업으로 성장
'눈엣가시' 된 영풍의 경영 간섭, 협력 관계 끊어져
이해관계 따지며 분쟁 이어가는 양사, 결말은 언제쯤
영풍그룹(이하 영풍)과 고려아연의 ’75년 동맹’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다. 세대가 교체되며 두 기업의 유대 관계가 눈에 띄게 흐려진 가운데, 고려아연 신사업으로 인한 차입금 증가와 영풍 측의 경영 간섭 등 누적돼 온 갈등이 폭발한 것이다. 두 기업은 지분 경쟁과 소송을 불사하며 본격적인 ‘진흙탕 싸움’을 벌이고 있다.
덩치 차이 벌어지며 ‘결별’ 본격화
14일 업계에 따르면, 최근 고려아연은 수십 년간 유지돼 온 협력 관계를 속속 끊어내고 있다. 같은 길을 함께 걸어오던 ‘파트너’ 기업 영풍이 눈엣가시로 전락한 까닭이다. 이 같은 두 기업의 분쟁은 ‘3대’ 경영자가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본격화했다.
고려아연 최씨 일가 3세인 최윤범 회장은 2022년부터 신재생에너지, 2차전지 소재, 리사이클링(자원 순환) 등으로 사업을 확장해 왔다. 공격적인 신사업 확대는 막대한 지출을 수반했고, 2018년 300억원 수준이었던 고려아연의 차입금은 2022년 1조원을 넘어섰다. ‘무차입 경영’을 원칙으로 삼는 영풍의 오너 장형진 고문은 고려아연의 투자 행태에 여러 차례 반대 의사를 드러낸 것으로 전해졌다.
이후 고려아연이 신사업을 바탕으로 본격적인 ‘대기업’ 반열에 오르면서 두 기업 사이 긴장감은 더욱 고조됐다. 두 기업의 체격차가 지나치게 커졌기 때문이다. 고려아연의 지난해 매출액은 9조7,045억원, 영업이익은 6,599억원에 달한 반면, 영풍은 지난해 고려아연을 비롯한 종속회사로부터 총 1,672억원의 배당 수익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430억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몸집을 불린 고려아연은 영풍 측의 경영 관여를 본격적으로 경계하기 시작했다. 최 회장은 영풍 측의 간섭을 끊어내기 위해 다수의 대기업을 우호 지분으로 끌어들였다. 이에 따라 현재 최씨 일가(현대자동차, LG화학 등의 우호 지분 포함)의 고려아연 지분율은 전체 중 33.2%까지 상승했다. 이는 영풍 측의 지분율(약 32%)을 소폭 웃도는 수준이다. 이후 고려아연 측이 양사 동맹의 중심축이었던 종속회사 ‘서린상사’ 내에서 영풍과의 협업을 중단하겠다는 뜻을 밝히며 두 가문의 결별이 사실상 확정됐다.
동맹은 끝, 이제는 경쟁사
그간 고려아연과 영풍은 서린상사를 통해 원료를 공동구매하고, 각 사가 만든 비철금속 제품을 유통해 왔다. 서린상사가 양사의 우호를 상징하는 그룹 핵심 계열사로 꼽히는 이유다. 서린상사 지분 66.7%를 보유하고 있는 최대주주 고려아연은 지금껏 영풍의 장씨 일가(지분율 33.3%)에 경영을 일임해 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 고려아연이 이사회를 재구성, 본격적인 경영권 회복에 나설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서린상사 경영 구조 정리를 통해 영풍과의 협력 관계를 끊겠다는 의사를 표명한 것이다.
고려아연 측은 영풍과 동업 관계를 이어가는 것이 ‘사업상 손해’라 판단했다고 설명했다. 영풍의 석포제련소 가동률이 낮아지며 원료 도입 및 판매 계획이 축소됐고, 이로 인해 사업 불확실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실제 영풍 석포제련소는 지난해 줄줄이 발생한 산업재해의 영향으로 낮은 기동률을 기록했다. 지난달에는 석포제련소의 올해 아연 생산량이 절반 이상 줄어들 수 있다는 외신 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영풍의 경영 간섭에 대한 불만이 쌓여가는 가운데, ‘실익’은 인연을 끊어낼 만한 좋은 명분이 됐다. 고려아연 측은 영풍과 완전히 갈라서서 경쟁자가 될 것이라 못 박았다. 한편 영풍 측에서는 “고려아연이 서린상사의 이사회를 장악하고 영풍의 현금줄을 끊으려 한다”며 고려아연 측의 결정에 대한 반대 의견을 드러낸 상태다.
협력 관계 무산부터 소송까지
75년이라는 긴 인연의 끝에는 수많은 분쟁이 따라붙었다. 영풍은 고려아연이 HMG글로벌(현대차·기아·현대모비스가 공동 투자해 설립한 해외 법인)을 대상으로 진행한 제3자배정 유상증자에 대해 신주발행을 무효로 해달라며 최근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소장을 제출했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의 우호 지분으로 취급되는 HMG글로벌은 지난해 5,272억원을 투입해 고려아연 주식 104만 주가량을 취득한 바 있다. 이는 지난해 말 기준 고려아연 전체 지분 중 5%에 해당한다.
영풍은 과거 진행한 유상증자의 적법성을 문제 삼고 있다. 외국 현지 합작법인에만 예외적으로 제3자 신주 발행을 허용하는 정관 규정을 임의로 확대 적용해 우호 지분을 확보했다는 주장이다. 고려아연 정관은 제3자에게 신주를 발행하기 위한 조건 중 하나로 ‘회사가 경영상 필요로 외국의 합작법인에 신주를 발행하는 경우’라고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고려아연은 “모든 절차는 합법적으로 이뤄졌으며 영풍은 최근 HMG글로벌 임원을 기타비상무이사로 선임하는 안건에도 찬성했다”고 일축했다.
영풍과 고려아연 사이의 협력 고리도 속속 끊어지고 있다. 고려아연은 서린상사를 통한 양사 협업을 중단한 데 이어, 오는 6월 30일로 만료되는 영풍과의 ‘황산취급 대행 계약’ 역시 더 이상 연장하지 않고 종료할 예정이다. 75년간 유지돼 온 동맹 관계가 ‘진흙탕 싸움’ 속에서 막을 내리고 있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