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저에 수출 호황 맞은 일본, 정작 노동자 실질임금은 ’23개월 연속’ 감소세
식료품 수입 비중 높은 일본, 엔저-수입물가 상승에 가계 부담도 올라
수출업계는 호황 맞았지만, 내수기업은 울상 '폐업 1년 새 1.5배 증가'
실질임금도 1.3% 감소, "슈퍼 엔저에 소비 침체 벗어날 동력 상실할 수도"
역대급 엔저 현상이 장기간 이어지면서 일본 내부에서도 불안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물가 상승으로 가계 부담이 크게 늘고 내수 산업을 중심으로 한 중소기업들이 문을 닫는 등 부작용이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들의 실질임금도 하락세를 걷고 있다. 실질임금은 물가 변동을 고려했을 때 임금 수준을 의미하는 것으로, 결국 실질임금이 하락했다는 건 임금 상승률보다 물가 상승률이 더 높아 국민 고통이 가중되고 있다는 뜻이다.
엔·달러 환율 150엔 중후반대, 물가 상승에 가계 부담↑
3일 일본 언론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엔저는 일본 경제에 플러스’라는 디플레이션 시대의 속박이 일본을 가난하게 만들고 있다”는 보도를 내놨다. 엔저 장기화에 따른 부작용이 다수 나타나고 있단 분석이다. 엔·달러 환율은 연초 달러당 140엔 수준에서 출발했지만 지속적으로 상승(엔화 가치 하락)해 최근엔 150엔 중후반대에 머물고 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엔저에 부정적인 의견을 표출한 건, 엔저로 인해 중장기 국력 향상에 필수적인 인재, 과학기술, 국방력이 위축되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급여 비교 사이트 levels.fyi에 따르면 지난해 말 기준 도쿄의 정보기술(IT) 엔지니어 평균 연봉은 달러 환산 시 6만2,530달러(약 8,600만원)였는데, 이는 미국 샌프란시스코 베이 지역의 4분의 1 수준이자 싱가포르, 베이징보다도 30%가량 낮다. 임금 기대치가 그만큼 낮단 것이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자료를 봐도 일본의 달러 환산 평균 임금은 38개국 중 25위로 하위권에 머물러 있다. 이에 대해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엔저로 인해 해외에서 바라보는 (일본 국내) 임금 수준은 더 열악해졌다”며 “고급 인력은 물론이고 인력 부족 현장을 지원하는 기능 실습생도 확보하기 어려워지고 있다”고 전했다.
가계의 부담도 크게 늘었다. 식료품의 60% 이상을 수입에 의존하는 일본의 특성상 엔저에 따른 수입물가 상승이 그대로 식료품 가격에 영향을 미친 탓이다. 실제 현지 언론에 따르면 일본 내 미국산 쇠고기의 도매가는 1991년 수입 자유화 이후 최고 수준까지 올랐고, 쌀과 우유 가격도 9%씩 상승했다.
수출은 호황인데, 내수 중심 기업들은 ‘줄폐업’
물론 엔저로 호황을 맞은 곳도 있다. 수출을 중심으로 하는 제조업계가 대표적이다. 일본의 수출은 엔저를 기점으로 크게 늘었다. 일본의 2023회계연도(2023.4∼2024.3) 수출액은 102조8,983억 엔(약 911조원)을 기록하며 1979년 이후 역대 최대를 기록했고, 지난 3월 집계된 2022년 일본 상장 제조업의 순이익 역시 사상 최고치를 경신했다. 일본 주요 기업으로 꼽히는 도요타자동차도 매출액 45조 엔(약 398조원), 영업이익 5조3,500억 엔(약 47조원)을 기록하며 역대 최고 성적을 냈다. 도요타의 매출액과 영업이익의 전년 대비 증가율은 각각 21.4%, 96.4%에 달한다.
반면 내수 산업을 중심으로 하는 중소기업들은 엔저로 인한 피해가 막심하다. 일본 시장조사기관인 도쿄상공리서치에 따르면 지난해 엔저로 어려움을 겪다 문을 닫은 회사는 56곳으로 전년 대비 1.5배 증가했다. 물가 상승 탓에 도산한 기업도 지난해 684건으로 전년 대비 1.7배 늘었다. ‘한계 상황’이 가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셈이다.
스위스 투자은행 UBS가 일본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도 현장 관계자들의 불안이 여실히 나타났다. 당시 조사에 참여한 기업 중 35%는 ‘엔화 약세로 인해 매출에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답했고, 63.9%는 ‘이익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받고 있다’고 응답했다. 참여 기업의 절반 이상이 달러·엔의 적정 수준이 최근의 높은 환율 수준보다 낮은 110~120엔 사이라고 답하기도 했다.
23개월 연속 감소한 실질임금, 다급해진 일본 정부
이렇다 보니 일본 정부도 다급해진 모양새다. 우에다 가즈오 일본은행 총재가 지난 4월 “현재는 엔화 약세가 기조적인 물가 상승률에 큰 영향을 주고 있지는 않다”며 엔화 약세를 자극하는 발언을 내놨다가 기시다 후미오 총리로부터 수정 요구를 받은 게 대표적인 사례다.
총리의 요구를 받은 이후인 지난달 8일 우에다 총재는 도쿄에서 열린 강연회에서 엔저와 관련해 “수입물가 상승을 기점으로 하는 비용상승 압력이 안정화될 것이라는 전망의 전제를 약화시킬 가능성이 있다”며 “과거에 비해 물가에 환율 변동이 영향을 미치기 쉬워진 측면이 있다”고 언급했다. 엔저를 경계하는 방향으로 의견을 선회한 것이다.
이처럼 정부가 우에다 총재의 발언 하나에도 크게 반응한 건 엔화 가치 하락세가 지나치다는 인식이 확산한 영향이 크다. 당초 일본경제신문사와 일본경제연구센터가 추정한 2023년 7~9월 균형환율은 1달러당 133엔이었다. 달러당 150엔 중후반대에 머물면서 ‘슈퍼 엔저’가 장기화한 건 일본 입장에서 비정상적인 상황이란 것이다.
무엇보다 큰 문제는 엔저 상황 아래 일본 노동자의 실질임금이 줄어들고 있단 점이다. 일본 후생노동성에 따르면 2월 기준 5인 이상 업체의 노동자 1인당 월평균 명목임금은 전년 동기 대비 1.8% 오른 28만2,265엔(약 250만원)을 기록했다. 절대적 금액이 다소 오른 셈이지만, 막상 물가 변동을 고려한 실질임금은 오히려 1.3% 줄어들었다. 23개월 연속 감소세다. 실질임금이 줄면 국민들은 소비를 줄일 수밖에 없고, 이 같은 기조가 장기화할 경우 소비 침체 상황을 벗어날 동력을 완전히 잃을 수 있다. 수출 호황에만 기대고 있기엔 일본 경제 전반이 위기에 처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