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벤처 업계가 먹거리가 없나, 한국에 먹거리가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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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 업계에 먹거리가 없는 것이 아니라 한국 시장에 먹거리가 없다는 인식 확산
해외로 사업체를 이전하거나, 이민을 떠나는 사업가들 크게 늘어
국내에서 영업이익 내는 스타트업 만들기 쉽지 않다는 업계 전체의 인식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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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부터 벤처기업 담당자들과 만나본 결과 금리가 인하된다고 해도 투자를 받아서 회사 키우기는 어려운 시대가 왔다는 생각들을 하는 것이 보인다. 특히 강남 일대에 있는 IT업체들에서 그런 경향이 짙고, 한국을 벗어나려는 움직임도 강하게 나타난다. 한국에서 무슨 사업을 해도 대기업이 만들어 놓은 문을 뚫지 못하면 영업이익을 내기가 어렵다는 불평도 자주 들려온다.

지난 2000년대 초반 IT 버블기에 한 차례 벤처 업계가 성장한 바 있지만, 2003년 들어 정부가 신용카드 버블을 정리하면서 벤처 업계도 인력들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다시 벤처 투자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은 2015년부터다. 하지만 10년 이상 침체기에 빠졌던 2003년 하반기와 최근 벤처 업계들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 20년 이상 업력을 가진 업계 관계자들의 공통된 견해다.

벤처 투자 시대의 종말

일부 벤처 관계자들은 한국에 먹거리가 없는 것이지 벤처에 먹거리가 없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7년째 벤처기업을 운영하다 지난해부터 해외 사업으로 피벗(Pivot, 사업 방향 및 모델 전환)을 한 스타트업 대표 A씨는 인맥이 없는 상태에서 B2B(기업간거래) 사업의 판로를 뚫는 것은 거의 기적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으나, “한국에서는 상품의 품질을 판단해주는 경우가 없었고, 오직 대기업에 납품하느냐 아니냐로 평가를 당했다”며 한국에서도 B2B 시장을 뚫기 힘들었던 것은 마찬가지였다고 답했다. 이어 해외 시장으로 나간 이후 회사의 상세한 포트폴리오가 구글 검색에 노출되고 지식을 갖춘 담당자와 이메일이 오고 가는 경우를 1년 이상 겪게 되자, “한국에서 (지식이 전혀 없는) 판매처를 다시 뚫으려고 노력할 생각을 버렸다”고 말했다.

스타트업들이 해외 판매처를 확보하는 과정에서 ‘캐즘(Chasm, 일시적 수요 정체)’을 겪는 경우들이 많긴 하지만 미국 및 서유럽 업체들일수록 질문의 수준의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내에서 투자받는 것을 포기하고 독일에서 투자 유치를 진행하다 현재 베를린에서 스타트업을 운영 중인 B씨는 투자자를 만났을 때 받는 질문의 눈높이가 다르다고 설명한다. 한국에서는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뿌리고, 사업성을 과대포장하는 기사가 여럿 나가 있어야만 투자자들이 만나주는 반면, 독일에서는 이미 웹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내용들을 이해한 상태에서 웹사이트에 올라오지 않은 내용들을 질문한다는 것이다. B씨는 “한국은 테마주 따라다니는 여의도 객장 아저씨들이 벤처캐피탈(VC)을 하고 있다고 치면, 독일은 석·박사 연구원들이 사업 하다가, 사업을 잠깐 쉬는 중에 VC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전했다. 전문성이 본질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상품을 구매하는 대기업, 투자금을 제공하는 벤처 투자업계가 모두 전문성이 매우 낮은 것은 벤처 업계에 투입되는 자금의 근간인 모태펀드 운용 실패라는 분석도 나온다. 즉 모태펀드를 운영하고 벤처 투자업계의 방향성을 좌우할 수 있는 중소벤처기업부 및 관련 정부 부처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이다. 실제로 정부 산하기관에서 내놓는 IT 프로젝트들의 심사역으로 선발된 인원들 중 상당수가 전문성 없이 대학의 교수, 협회의 임원이라는 이유로만 선정된 탓에 옥석 가리기를 제대로 못한다는 질책은 어제오늘 나온 이야기가 아니다.

“한국 벤처 업계는 망했다고 봐야죠”라는 벤처기업가들

2017년까지 IT업계의 광고 산업으로 경력을 쌓다 창업 5년 만에 사업을 접고 파산 절차를 밟고 있다는 40대 후반 여류 사업가 C씨는 매출처를 뚫던 것을 포기하고 인스타그램, 유튜브 등의 인플루언서들과 광고주를 연결해 주는 소일거리로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고 밝혔다. 구글, 메타 등의 빅테크 기업들이 제공해 주는 고급 광고 상품을 팔면서 한국 시장에서도 기술 사업들의 가능성을 봤지만, 외국계 회사를 나와서 직접 현장에서 느낀 한국 시장의 기술 상품 이해도는 답답한 수준일 만큼 낮았다고 토로했다.

C씨는 기술 이해도가 낮은 상황이 비단 소비자들에게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벤처 투자자, 업계 전문가들에까지 두루 퍼져 있는 만큼, 한국에서 기술 역량을 인정받아 사업을 키우기는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이에 대해 네이버, 카카오와 더불어 크래프톤 같은 게임사나 토스 등 핀테크 기업들의 사례를 들며 반론을 제기했으나, 곧바로 이들 기업 모두 해외 투자자들의 자금으로 성장했다는 점과 기술력을 갖춘 기업이라기보다 개발자들이 빠르게 상품을 만들어 내는 기업이라는 반박이 돌아왔다. 개발자는 기술자가 아니라 기능인이라는 업계의 상식을 꼬집은 것이다.

이어 대체 불가능한 고급 기술과 지식을 가진 것으로 관심을 얻고 투자를 받아 상품을 출시하는 실리콘밸리 방식의 사업 성장 공식이 먹히지 않는 시장이라는 것을 벤처 업계 전체가 지난 10여 년간 확인했다는 점을 지적하며, “한국 벤처 업계는 망했다고 봐야죠”라는 자조적인 평가를 내놓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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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처투자업계, 2000년대 초반과 판박이

이에 업계에서는 2003년 이후 신용 경색과 더불어 급격하게 벤처 투자 시장이 축소됐던 것과 유사한 상황이 지난해부터 벌어지고 있다고 진단한다. 실제로 2022년 하반기부터 유동성이 급격하게 줄어들었고, 지난해부터는 다운 라운드로도 투자를 받지 못하는 스타트업들이 결국 폐업 수순을 밟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일부 스타트업들은 ‘유니콘’ 대신 ‘낙타’를 지향하는 방식으로 사업 모델을 바꾸기도 한다. 희박한 성공 가능성에 모든 것을 걸고 빠른 상품 출시와 도전을 하는 방식이 아니라, 확실히 돈을 벌 가능성이 있는 사업을 단계적으로 키우는 전략으로, 미래를 포기하고 생존에 초점을 맞춘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국내 사업을 사실상 접었다는 A씨도 한국에서 써야 하는 인력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는 만큼, B씨처럼 해외로 사업체를 옮기거나 100% 온라인으로 사업을 대체할 고민도 하는 중이라고 밝혔다. 이미 대부분의 인력이 온라인으로 일하는 외국인이라 한국 사무실을 유지해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A씨는 해외 B2B 사업이 성장하자 인력의 구성과 함께 성장 전략도 함께 바꿨다. 더 이상 투자를 받아 고속 성장을 꿈꾸는 것이 아니라, 낙타를 지향해 단계적으로 사업을 키우는 쪽으로 선회한 것이다. 지난해 하반기에 ‘브레이크 이븐(Break-even, 비용보다 수익이 더 많아지는 단계)’에 도달하고, 올해 상반기에 추가 수익이 나오자 투자자에게 원금을 돌려주기도 했다. A씨는 더 이상 유니콘을 도전하지 않는 만큼 투자금을 갖고 있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밝혔다.

C씨는 투자금으로 성장한 국내 주요 스타트업들도 여전히 수익성을 내지 못하는 상황이라는 점을 지적하며, ‘사회적 실험’이 한 차례 지나간 것으로 평가했다. 정부 사업을 안정적으로 수주할 수 있는 일부 대기업들을 제외하면 국내 기업 환경은 그저 투자금을 소진해가며 외형 성장만 할 수 있을 뿐, 단기간에 내실 성장을 이루기는 어렵다는 것을 시장 참여자 대부분이 인지했다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