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리 하락에 회사채 물량 급증, 8월에만 수요예측 3조원 넘어서
8월 말·9월 초, 20여 개 기업 회사채 발행 추진
SK 4,500억원 등 우량 등급기업도 회사채 발행
금리 인하 기대에 회사채 시장 순발행으로 전환
미국 기준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에 국고채와 회사채 금리가 동반 하락하면서 이 시기 현금을 확보하려는 기업들이 회사채 발행을 늘리고 있다. 휴가철과 반기보고서 제출 기한이 끝나는 8월 말부터 추석 전인 9월 초까지 20여 개 기업이 회사채 발행을 추진 중으로, 채권 발행시장의 호황은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일각에서는 단기 금리보다 장기 금리가 높아 운용 수익률이 낮아지는 ‘역(逆) 캐리’ 현상으로 투자자의 부담이 가중될 것이란 지적도 나온다.
국고채·회사채 동반 하락, 추석 전까지 발행 물량 몰려
25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8월 말 들어 기업 조달 금리가 빠르게 하락하면서 회사채 발행이 증가하고 있다. 그동안 반기보고서 제출과 휴가철이 겹치는 계절적 영향으로 회사채 시장이 한동안 고요했지만, 9월 이후 금리 불확실성을 피하고자 20곳가량이 8월 말과 9월 초에 회사채를 발행에 나선다. 다음 달 미국이 기준금리 인하를 단행할 것이란 전망이 우세한 가운데 정책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으로 국고채와 회사채 금리가 동반 하락하면서 기업 입장에서는 저리로 유동성을 확보할 기회로 작용하는 모습이다.
금융투자협회 채권정보센터에 따르면 26일 기준 국고채 3년물 금리는 연 2.92%, 10년물 금리는 연 3.01%를 가리키고 있다. 3년물 금리는 지난달 1일 연 3.21%와 비교해 29bp(1bp=0.01%포인트) 하락했고 10년물 금리는 같은 기간 30bp 내렸다. 회사채 금리도 하락했다. 무보증 회사채 AA- 3년물 금리는 지난달 초 연 3.68%에서 연 3.44%로 24bp 낮아졌고, 같은 조건의 BBB- 등급도 연 9.77%에서 연 9.40%로 37bp 내려왔다.
이달 들어 회사채 시장도 다시 순발행으로 돌아서는 분위기다. 올해 8월 1주차부터 3주차까지는 발행이 거의 없었지만 8월 4주차부터 채권 발행이 몰리면서 8월 회사채 수요예측 금액이 3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8월 마지막 주(26~30일)에만 에쓰오일, KB증권, HL홀딩스, 한솔테크닉스, 동원산업, 종근당, 삼양패키징 등이 수요예측에 나선다. 오는 9~12월 만기 도래하는 회사채도 약 15조원으로 전년 동기 대비 4조원 증가했다. 여기에 금리 인하에 대한 기대감이 더해져 올해 회사채 발행은 지난해보다 늘어날 전망이다.
우량 기업의 회사채 발행도 이어지고 있다. SK그룹 지주사인 SK가 최대 4,500억원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한다. 지난 21일 2,500억원어치의 채권을 발행하기 위해 전날 실시한 수요예측에 1조원이 넘는 투자금이 몰리면서 회사채를 최대한도로 증액해 발행할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다. 밥캣을 분리해 두산로보틱스에 넘기기로 한 두산에너빌리티도 최대 1,500억원 규모의 회사채 발행을 추진한다. 9월에도 삼성물산, 포스코인터내셔널 등이 수천억원대 회사채 발행을 계획하고 있다.
건설사·BBB등급 기업도 잇따라 회사채 발행에 성공
금융사의 발행도 증가하는 추세다. KB증권과 키움증권은 일반 회사채 발행에 나섰고 한화손해보험, KDB생명보험, 흥국화재 등 보험사는 후순위채 발행을 앞두고 있다. 신한지주, 농협금융지주 등 지주사와 한화생명보험은 신종자본증권 발행을 추진 중이다. 그동안 채권 발행이 쉽지 않았던 건설사도 잇따라 회사채 발행에 성공하고 있다. 최근 롯데건설과 SK에코플랜트가 각각 1,500억원과 2,600억원 규모의 공모채를 발행했고 한국토지신탁 등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 우려로 자금 조달이 어려웠던 기업도 채권 발행에 성공했다.
개인 투자자들의 고금리 채권 수요에 힘입어 저(抵) 신용등급 기업의 채권 발행도 활발하다. 최근 BBB+ 등급인 SK해운과 코오롱이 각각 4%대와 5%대에 사모채를 발행했다. 사모채는 공모채와 달리 증권신고서, 수요예측 등의 공모 절차 없이 특정 투자자를 대상으로 발행하는 채권이다. BBB+ 등급인 한솔테크닉스는 공모채 발행을 준비 중이며, BBB 등급인 이랜드월드는 1년 6개월 만기의 사모채를 6%대 금리로 300억원어치 발행했다. 이랜드월드가 6%대 금리로 채권 발행에 성공한 것은 2022년 9월 이후 약 2년 만에 처음이다.
회사채 시장에 불이 붙자 증권사의 주관 경쟁도 치열해지고 있다. 부동산 시장 침체가 장기화하면서 증권사들이 채권자본시장(DCM) 등 전통 기업금융 부문 강화로 돌파구를 찾는 것으로 보인다. 지난 1일 공식 출범한 우리투자증권은 신생기업으로는 드물게 기업금융 영역에 진출한다고 공표했고 DCM 부문 업계 1, 2위를 다투는 한국투자증권은 지난 7월 조직 개편을 통해 그룹 내 기업금융을 전담하는 전략본부를 신설했다. 부동산 PF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던 중소형 증권사도 최근엔 전통 기업금융 사업을 강화하는 분위기다.
금리 인하 선반영한 회사채, 당분간 역 캐리 부담 불가피
다만 업계 일각에서는 최근 국고채 금리가 금리 인하를 과도하게 선반영하고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채권시장 과열로 금리 폭이 과도하게 낮아졌다는 것이다. 심지어 우량 등급 회사채 금리조차도 양도성예금증서(CD) 금리보다 낮은 역 캐리 상황에 진입했다. 채권정보 시스템 본드웹(BONDWEB)에 따르면 지난 23일 기준 국고채 3년물 금리는 한국은행 기준금리인 3.50%보다 58bp 낮았다. 반면 CD 91일물 금리와 기업어음(CP) 91일물 금리는 각각 3.51%, 3.59%로 국고채 금리보다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통상 기관투자자는 CD 등 단기물로 자금을 조달해 국고채 3년물 등 장기물로 자금을 운용하는데. 단기 금리가 더 높을 경우 운용 수익률이 낮아지는 역 캐리 상황이 발생한다. 특히 신용도가 높고 낮은 금리로 자체 자금 조달이 가능한 은행과 달리 증권사는 역 캐리 손실을 감수하기 어렵기 때문에 운용 수익률을 높이기 위해 국고채보다 금리가 높은 회사채로 투자 수요가 몰리는데 이 과정에서 회사채 금리도 하락한다. 실제로 회사채에 매수세가 몰리자, 회사채 3년물 AA-급 금리가 기준금리를 6bp가량 하회하는 역 캐리가 나타났다.
회사채 금리가 기준금리 아래로 내려온 건 한은이 지난 1999년 기준금리 정책을 도입한 이후 처음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와 관련해 한 증권업계 관계자는 “과거에는 국고채 금리가 CD 금리보다 낮은 역 캐리 상황에 대응하기 위해 회사채 비중을 늘렸는데, 이젠 우량 등급 회사채 투자 확대로도 역 캐리 상황을 극복하기는 힘들어졌다”며 “이러한 시장 상황으로 인해 국채 금리 급락에도 우량 회사채 매수세가 크게 증가하지 못하면서 8월 들어 크레딧 스프레드가 빠르게 확대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이제 시장은 금리 인하 여부보다는 인하 폭과 시점에 주목하고 있다. 시장에서는 한은이 미 연방준비제도(Fed·연준)가 금리를 내린 후인 10월 금융통화위원회에서나 기준금리를 조정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관측에 당분간 역 캐리를 감당해야 하는 채권시장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하반기 회사채 수급 여건은 우호적이나 올해 10월 기준금리 인하를 가정했을 때 대략 한 달 반 이상 역 캐리 국면에 채권을 사야 하는 상황에서 시장이 과도하게 움직여 가격 부담이 높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