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외교 문제로 비화한 고려아연-영풍 분쟁, 호주도 MBK 사업 역량에 의문 제기
영풍-MBK 공세에 호주 우려, "고려아연 호주 사업 무위로 돌아갈 수 있어"
국내서도 반발 여론 "고려아연 중국 기업에 매각될 가능성 크다"
영풍 측도 공세 본격화, 고려아연 회장 두고 배임 등 의혹 제기하기도
고려아연과 영풍, MBK파트너스를 둘러싼 경영권 분쟁이 심화하자 호주 정·재계에서 우려의 목소리가 쏟아지고 있다. 고려아연은 제련업과 수소·신재생에너지 사업을 비롯한 신성장 사업의 핵심 거점으로 호주를 활용해 온 만큼 해외 사업 경험이 부족한 영풍이 고려아연을 인수하면 그간 추진해 온 관련 사업이 무위로 돌아갈 수 있어서다.
고려아연-영풍 경영권 분쟁 심화, 호주는 고려아연에 힘 싣기
19일 호주 최대 경제지 중 하나인 파이낸셜리뷰는 MBK의 고려아연 인수 시도에 대해 “(MBK가) 호주 퀸즐랜드주에서 가장 큰 규모의 신재생에너지와 수소사업에 대한 미래를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며 비판의 목소리를 냈다. 호주 퀸즐랜드주 경제 단체인 타운즈빌 기업협회도 강력한 경고를 내놨다. 클라우디아 브룸-스미스 타운즈빌 기업협회 대표는 “단기 수익을 쫓는 사모펀드(MBK)로 인해 사업 축소, 구조조정에 따른 일자리 감소를 포함한 심각한 문제가 발생할 것”이라고 일갈했다.
호주 정계 역시 MBK에 비토를 쏟아내는 모양새다. 밥 카터 호주 연방의원은 지난 17일(현지 시각) 현지 매체를 통해 “제련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외국 사모펀드가 호주 내의 중요한 자산인 제련소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연방 총리에게 MBK와 고려아연의 경영권 분쟁 사실을 알리고, 향후 고려아연 경영권에 변경이 있을 경우 외국인투자심의위원회가 개입할 것을 강력하게 요구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해외사업 경험 부족한 영풍, 고려아연 사업 유지 어려울 것”
호주는 고려아연의 신사업 핵심 거점 중 하나다. 고려아연은 지난 1999년 호주 퀸즐랜드주 타운즈빌에 아연제련소 선메탈(SMC)을 건설해 현재까지 운영하고 있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재임 시절인 2018년엔 SMC 제련소 안에 125MW급 태양광 발전소를 건설해 신재생에너지 사업도 펼쳤다. 또 2021년엔 신재생에너지와 그린수소 사업화를 위해 설립한 아크에너지를 통해 호주 뉴사우스웨일스주에서 풍력터빈 54개 335MW급 보우먼스크릭 풍력발전소 개발 사업 허가를 획득했으며, 지난 5월엔 6,700억원을 들여 호주 퀸즐랜드주에 건설 중인 남반구 최대의 풍력발전소 맥킨타이어의 지분 30%를 사들이기도 했다.
문제는 영풍과 MBK 측이 고려아연의 호주 신사업을 이어 나갈 만한 역량이 없단 점이다. 호주를 비롯한 해외 사업은 대부분 고려아연 측이 자체 역량을 활용해 키워왔다. 반면 영풍은 일본에 지사를 세우거나 계열사 영풍전자 등을 통해 베트남, 중국에 진출한 이력만 있을 뿐 호주 등 해외에서 직접 사업을 운영한 경험은 전무하다. 호주 정·재계가 MBK의 고려아연 인수 시도에 반발하고 나선 이유다.
국내 정치권에서도 MBK의 행보에 비판 여론이 확산하고 있다. 특히 고려아연의 온산제련소가 소재한 울산을 중심으로 우려가 쏟아진다. MBK가 고려아연을 중국계 기업에 매각할 수 있단 것이다. 이에 대해 김두겸 울산시장은 지난 18일 기자회견을 열고 “중국계 자본이 대거 유입된 MBK로 경영권이 넘어갈 경우 고려아연이 중국계 기업에 팔리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다”며 고려아연의 중국 매각 가능성을 언급하기도 했다. 기업 간 경영권 분쟁이 외교·정치 문제로까지 비화한 셈이다.
압박 수위 높이는 고려아연, 영풍-MBK 측은 ‘최 회장 때리기’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에 대한 정·재계의 우려가 커지자 업계에선 영풍-MBK의 부담만 가중되는 모양새란 평가가 나온다. 각계의 우려가 영풍-MBK의 고려아연 인수 시도 자체를 무마하는 구실로 작용할 수 있단 시선에서다.
고려아연 측이 정치권의 목소리에 편승해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기도 하다. 고려아연은 입장문을 통해 “영풍 오너 일가는 환경법과 중대재해처벌법의 잦은 위반과 대규모 적자를 기록하고 있어 경영 능력이 부족하다”며 영풍의 역량 부족 문제를 재차 부각한 것이 대표적이다. 영풍의 아연생산업체인 영풍석포제련소는 지난 2020년 4월에만 총 11건의 환경 관련법 위반을 적발당한 바 있다. 지난 4일엔 석포제련소 근로자 사망 사고에 따라 박영민 영풍 대표와 배상윤 석포제련소장이 중대재해처벌법 위반 혐의로 구속되기도 했다.
MBK의 고려아연 지분 공개매수 건에 대해서도 적극적인 공세를 펼쳤다. 앞서 지난 13일 MBK는 특수목적법인(SPC)인 한국기업투자홀딩스를 통해 고려아연의 지분 최대 14.6%(302만4,881주)를 주당 66만원에 매입한다고 발표했다. 공개매수 가격은 공개매수일 이전 3개월 및 6개월 간의 평균종가(거래량평균가중 가격 51만6,735원, 50만7,393원)에 각각 27.7%와 30.1%의 프리미엄(할증)을 더해 산정됐다. 매수 기간은 13일부터 내달 4일까지다. 이를 두고 고려아연 측은 “이번 공개매수는 아무런 사전 협의나 논의 없이 진행된 적대적 M&A”라며 “비철금속 제조업의 특수성을 고려할 때 산업 전문성과 경영 노하우가 필요하고, 투자수익률 극대화라는 단기적 관점에서 경영은 불가능하다”고 역설했다. 지분율 분쟁을 MBK의 ‘역량 부족’ 문제와 결부해 자사 측에 유리한 여론을 결집하겠단 전략을 취한 것으로 풀이된다.
영풍과 MBK 측은 자사를 둘러싼 비판 여론에 적극 반박하고 나섰다. 우선 고려아연이 자사의 공개매수를 적대적 M&A로 규정한 데 대해선 “어불성설”이라고 일축했다. MBK에 따르면 9월 기준 고려아연의 최대 주주는 지분율이 33.1%에 달하는 영풍 오너 일가다. 반면 최 회장 측은 지분율이 15.6%로 영풍 오너 일가의 1/2 수준이다. 영풍 측은 “공개매수는 명백한 최대 주주 및 1대 주주의 경영권 강화 차원”이라며 “영풍 오너 일가와 최 회장 측의 지분 격차만 봐도 적대적 M&A라는 주장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된 중국 매각 가능성도 부인했다. MBK는 18일 별도의 입장문을 내고 “MBK는 2005년 설립된 국내 사모펀드로 출자자들도 국내와 세계 유수의 연기금과 금융기관”이라며 “중국계 자본이 대부분을 구성하고 있다는 건 사실이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고려아연이 ‘울산 기업’으로서 사회적 책임을 다하고 울산지역 경제, 대한민국 경제에 이바지하는 기업이 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일 것”이라고 힘줘 말했다.
경영권 분쟁이 여론전으로 전환된 만큼 전략을 수정하는 모습도 포착됐다. 최 회장에게 배임과 주가조작 관여, 선관주의의무 위반, 상법 위반, 일감 몰아주기 등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며 법적 리스크를 덧씌운 게 대표적이다. 현재 영풍과 MBK는 서울중앙지방법원에 고려아연의 회계장부 등에 대한 열람 및 등사 가처분 신청을 제기한 상태다. 최 회장 개인에 대한 핀포인트 공세를 통해 급격한 여론 반전을 꾀하겠단 계획으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