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파이낸셜] 유럽 성장 가로막는 반독점 규제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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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유럽중앙은행 총재 ‘반독점법 개정 주장’ 논란
유럽 산업 경쟁력 회복 위한 ‘혁신과 성장’ 중심 ‘경쟁 정책’ 제안
“통합적 개혁 없이는 유럽 미래도 없어”

더 이코노미(The Economy) 및 산하 전문지들의 [Deep] 섹션은 해외 유수의 금융/기술/정책 전문지들에서 전하는 업계 전문가들의 의견을 담았습니다. 본사인 글로벌AI협회(GIAI)에서 번역본에 대해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유럽 경제의 글로벌 경쟁력과 성장 잠재력에 대한 의구심이 고조되는 상황에서 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i) 전 유럽중앙은행(European Central Bank, ECB) 총재가 펴낸 ‘유럽 경쟁력의 미래’(Future of European Competitiveness) 보고서가 유럽 정책 입안자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보고서에서 가장 큰 논란과 오해의 대상이 된 것은 드라기 전 총재가 이동 통신(telecoms)과 디지털 기술 분야에 대한 경쟁법(competition enforcement and regulation) 개정을 주장했다는 내용인데 정확한 메시지는 반독점 정책 및 규제의 전면적인 철회나 완화가 아니다. 유럽 경제가 글로벌 무대에서 리더십을 되찾으려면 ‘혁신’과 ‘성장’이라는 산업적 목표를 지원할 수 있는 ‘전략적 경쟁 정책’(strategic competition policy)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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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CEPR

‘유럽 경쟁력의 미래’ 보고서, ‘반독점 규제 완화 주장’ 논란

마리오 드라기(Mario Draghi) 전 ECB 총재(이하 전 총재)의 보고서는 총 400페이지에 걸쳐 ‘디지털 및 첨단 기술 정체’, ‘자본 부족’, ‘글로벌 경쟁을 위한 규모 및 조율 결여’ 등 유럽 경제를 둘러싼 근원적 이슈들을 다루면서 중앙 기구에 의해 주도되는 강력한 산업 정책, 자금 확보 방식 다양화, 규제 간소화 등을 해법으로 제시해 폭넓은 지지를 얻고 있다. 하지만 보고서 해석을 놓고 첨예한 논란도 제기되고 있는데 전 총재가 이동 통신 및 디지털 기술 분야에서 반독점 규제 완화의 필요성을 언급했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보고서가 빅테크(Big Tech, 미국의 5대 정보 기술 대기업)들이 인수합병을 노리며 규제 완화를 부르짖는 첨단 기술 산업 분야의 문을 활짝 열어주는 신호가 될 것이라는 우려도 규제 당국을 비롯한 비판론자들 사이에 제기됐다.

하지만 이러한 우려는 핵심 메시지를 잘못 해석한 결과며 빅테크와 통신사들이 인수합병 시도에 대한 거부권과 규제를 피해 가기 위해 일으킨 왜곡에 불과하다. 전 총재는 보고서에서 “경쟁법이 유럽 기업들이 규모를 갖춰 글로벌 경쟁력을 확보할 가능성 자체를 원천 차단하고 혁신을 방해한다는 의혹이 있다”고 언급했지만, 한편으로는 “강력한 반독점 규제가 저렴한 가격과 높은 생산성, 투자, 혁신을 가능하게 한다”며 경쟁 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한 바 있다.

“지나친 규제가 유럽 이동 통신 산업 성장 가로막아”

전 총재의 주장은 반독점 규제를 완화하자는 것이 아니라 규제 대상의 선별과 조사에 있어 혁신과 성장을 중심에 놓음으로써 경쟁 정책이 경제 성장의 저해 요인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것이다. 또한 혁신과 성장에 도움이 되지 않는 현재의 반독점 규제 접근 방식을 재고해 정책 입안자들은 경쟁 정책이 산업 정책 및 무역 정책과 조화를 이루도록 고민하고, 규제 기관들은 과거에 만들어진 방법론과 관행에 고지식하게 얽매이기보다는 변화하는 경제 상황을 조망하며 빠르게 적응하려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는 일침인 것이다.

전 총재가 보고서에서 상당 부분을 할애하고 있는 주제는 유럽의 ‘생산성 위기’(crisis of productivity)인데, 특히 미국, 중국과의 격차가 날로 벌어지고 있는 디지털 기술 분야 중 군소 업체들이 난립하고 있는 유럽 이동 통신 산업을 콕 찍어 지적하고 있다. 유럽 지역에만 34개 업체들이 나뉘어 있는 산업 구조 때문에 5G와 같은 첨단 기술 투자에 필요한 규모조차 확보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기업들의 성장을 방해하는 유럽 규제 장벽의 대표 사례라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전 총재는 유럽 위원회(European Commission)가 시장을 지나치게 협소하게 정의한 후 정확하지도 않은 단기적 가격 영향에만 집착해 이동 통신사 간 합병을 가로막고 있다고 비판한다. 유럽연합(EU) 국가 간 인수합병은 물론 국가 내 합병까지 사실상 불가능하게 만들어 혁신과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한 투자를 원천 차단하고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가 단위로 정의된 통신 시장을 유럽 지역 전체로 확장해 핵심 인프라 투자를 위한 규모 확대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같은 주장은 이전에도 유럽 규제 당국의 동의를 얻지 못했는데, 당국의 반대 논리는 인수합병을 허용하면 서비스 가격 상승 및 품질 하락 등 독과점으로 인한 폐해가 나타난다는 것이었다. 규제 당국은 대표적 독과점 시장인 미국 이동통신 산업이 비싼 가격 대비 낮은 품질에 머물고 있다는 사실을 증거로 내세운다. 하지만 전 총재는 합병을 무차별적으로 허용하자는 것이 아니라, 유럽 통신사들이 글로벌에서 경쟁하려면 더 큰 규모가 필요하다는 인식을 갖고 시장을 융통성 있게 정의하자는 주장이라고 반박한다.

“혁신 촉진하는 제도적 장치 도입해야”

보고서에 실린 전 총재의 가장 야심 찬 주장 중 하나는 경쟁 사무국(Directorate-General for Competition, DG Comp, 유럽 시장 내 경쟁 규정의 준수를 담당하는 기관)의 합병 심사에 ‘혁신 주장 제도’(innovation defense)을 도입하자는 것인데 기업들이 심사 대상 합병의 필요성을 설득할 수 있도록 하자는 것이다. “단기적으로는 가격 인상과 품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지만 장기적으로 더 큰 혁신으로 이어질 것이니 합병을 승인해달라”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이 제안에 대해서도 반독점 규제 당국을 비롯한 회의론자들은 “합병이 혁신으로 이어지는 경우 자체가 별로 없고, 역사적으로 혁신을 역설한 기업들의 합병이 승인된 사례도 드물며, 기업들이 혁신을 다짐하면서 약속한 투자를 다 실행하지 않는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반대할 것이 뻔하다. 하지만 전 총재는 혁신 실천 여부의 ‘사후 검증과 강제 집행’(ex-post policing)이 쉬운 일은 아니지만 새로운 성장 동력 발굴로 이어질 가능성을 감안해 고민해 달라고 강조한다.

전 총재의 또 다른 핵심 주장은 반독점 규제 당국이 경쟁 업체 간 협정 및 협업에 대해 명확한 가이드를 제시해야 한다는 것인데, 지나치게 엄격한 경쟁 규칙은 기업 간 협업을 필요로 하는 산업 분야에서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규제 당국은 이 주장에 대해서도 “친환경 산업 내 협업을 위한 가이드라인이 있었음에도 신청 회사가 많지 않았고 역사적으로 기업 간 협업이 담합이나 반경쟁 행위로 변질된 사례가 많다”고 반박하겠지만, 전 총재는 혁신이 가져올 유익과 반경쟁 행위의 부작용을 균형 있게 고려해 판단해야 한다고 말한다.

한편 전 총재는 기업결합 심사에서 해당 기업들의 보안 역량(security) 및 위기 회복력(resilience)도 평가 항목에 포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 역시 관련 없는 평가 항목을 심사에 포함시키려 한다는 비판을 받겠지만, 전 총재는 급변하는 지정학적, 기술적 환경에서 보안 및 위기 극복 문제는 경쟁 정책의 필수 항목이므로 규제 당국은 경쟁법의 근본 목적을 희생하지 않으면서 해당 항목을 평가에 포함시킬 수 있는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경쟁 정책이 산업적 목표 달성 위한 도구로 기능해야”

전 총재가 보고서를 통해 전하고자 한 가장 중요한 메시지는 오랜 기간 서로를 고려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기능해 온 경쟁 정책과 산업 정책, 무역 정책 간의 조율과 통합이다. 특히 자유 경쟁 원칙에 가려져 부정적 취급을 받아온 산업 정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경쟁 정책이 유럽 전체의 산업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할 수 있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런 차원에서 전 총재는 EU가 반독점 원칙에 근거한 사전 규제로 빅테크들을 얽매는 일에만 온통 신경을 집중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빅테크 규제에는 동의하지만 다른 경제 정책 목표와 현안을 팽개쳐 둘 정도로 지나치게 이 문제에만 몰두하고 있으며 빅테크를 길들이는 것만으로는 유럽의 생산성 위기와 미국, 중국 대비 벌어진 ‘혁신 격차”(innovation gap)를 좁힐 수 없다는 것이다.

대신 정말 필요한 것은 디지털 기술부터 인적 자본까지 유럽의 산업 인프라에 대한 충분한 투자를 불러올 수 있는 ‘포괄적 전략’이라고 강조한다. 또한 여러 분야에 자원을 분산하지 말고 글로벌에서 경쟁할 수 있는 전략 산업과 분야에 집중할 것을 제안한다. 이런 관점에서 경쟁 정책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유럽의 산업 전략과 무역 목표 달성을 지원하는 도구로 기능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고서에 되풀이되는 또 하나의 주제는 유럽의 지나친 규제 환경에 관한 것인데 전 총재는 규제 확대가 혁신과 성장을 막는 핵심 장벽 중 하나가 됐고 특히 신규 기업에 어마어마한 부담을 주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정책 입안자들에게 새로운 규제를 더하는 것에 대한 자제를 촉구한다. 규제는 필요하지만 지나치거나 충분히 고민되지 않으면 정작 지원하고 보호해야 할 산업과 기업을 질식사시킬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규제를 폐기할 수는 없으나 효율화하고 단순화해서 유럽의 경제 목표 달성에 ‘방해’가 아닌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에 강조를 거듭한다.

마지막으로 전 총재는 유럽이 겪고 있는 경제 침체와 뒤처지고 있는 생산성, 파편화된 이동 통신 산업 등의 문제가 단편적인 개혁으로 해결 가능하지 않다고 말한다. 산업적 목표와 경쟁 정책의 긴밀한 조율, 규제 효율화,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한 혁신과 성장을 모두 가능하게 하는 통합적 개혁만이 유럽을 이전처럼 글로벌 경제 강자로 살아남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원문의 저자는 크리스티나 카파라(Cristina Caffarra) 유니버시티칼리지 런던(University College London) 명예교수입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Draghi’s real message on European competition enforcement: “Not delivering on innovation and growth” | CEPR에 게재돼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