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사업구조 개편 두고 시장 대혼란, 금감원 정정 요구에 합병 계획 철회까지
금감원, 두산 측 합병 신고서 두 차례 정정 요구
이복현 원장 "주주환원 기조에 맞게 수정해야"
논란된 '합병 비율' 수정은 구체적인 지침 없어
이복현 금융감독원장이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해 주주가치 환원 기조에 맞게 증권신고서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 올해 7월 두산그룹은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 간 합병 계획을 발표했는데 합병 비율을 두고 주주 이익을 침해한다는 비판이 일자 금감원은 두산 측 증권신고서에 대해 두 차례에 걸쳐 정정 요구를 했다. 결국 지난달 두산 측이 밥캣과 로보틱스 간 합병 계획을 철회했지만 합병 비율의 수정 없이는 금감원의 문턱을 넘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합병 증권신고서 18%가 부실, 두산은 2건 정정 요구
16일 국회 정무위원회 소속 김현정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금감원으로부터 받은 ‘2020년~2024년 합병 관련 증권신고서 제출 현황’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제출한 합병 관련 증권신고서 66건 중 12건(18%)이 금감원으로부터 정정 요구를 받았다. 정정을 요구한 보완 사항으로는 △지배구조 변경에 따른 위험 △신규 사업 진출에 따른 위험 △불성실공시법인 지정 관련 위험 △수익성·재무안정성 관련 위험 △주총 완료 후 합병 진행 관련 투자자 보호 방안 △구조개편 경과·주가 변동 추이·주가 희석화 위험 등이 있었다.
이 중 두산그룹은 두 차례의 분할 합병 시도에서 모두 정정 요구를 받았다. 올해 두산에너빌리티와 두산로보틱스의 분할 합병 관련한 증권신고서에 대해 2차례 정정 요구가 있었고, 2021년 두산에너빌리티의 전신인 두산중공업과 두산인프라코어 투자사업 부문의 분할 합병 과정에서도 1차례 정정 요구가 있었다. 김 의원은 “기업 간 합병은 시장에 큰 변화를 불러올 수 있는 만큼 회사가 소액주주에게 충분한 정보를 제공하고 소통해야 한다”며 “금감원은 합병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투자자 피해 방지를 위해 더욱 세심하게 증권신고서를 검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다음날인 17일 오전 국회에서 진행된 정무위원회의 금감원 국정감사에서도 김 의원은 두산그룹의 지배구조 개편안에 대해 “대주주 이익을 위해 소액주주가 피해를 보는 것을 넘어 두산 오너가 경영권 승계를 위해 편법을 쓰고 있다”며 “금융당국이 나서 이러한 행위를 개선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에 대해 이복현 금감원장은 “두산 측이 좀 더 시장 요구에 부응하고 주주가치 환원 기조에 맞는 방향으로 증권신고서를 수정할 것으로 기대하고 잘 살펴보겠다”고 말했다.
금감원 “합병 시너지 등에 대한 주주 간 소통 부족해”
앞서 지난 7월 11일 두산그룹은 두산에너빌리티의 자회사로 있는 두산밥캣을 분할해 두산로보틱스의 100% 자회사로 편입시키는 지배구조 개편안을 발표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두산밥캣과 두산로보틱스의 합병 비율이 1대 0.63으로 선정되면서 논란이 됐다. 두산밥캣은 연 매출 10조원, 영업이익 1조원을 넘어서는 캐시카우인 데 반해 두산로보틱스는 설립 이후 한 번도 흑자를 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투자자들 사이에서도 알짜회사와 적자기업의 합병이 합리적인지, 합병비율이 공정한지 등을 두고 의문이 제기됐다.
합병 시너지에 대한 주주와의 소통이 없었다는 지적도 나왔다. 두산 측이 일부 기관 투자자와는 소통했지만, 합병 시너지가 어느 시점에 나타나 성과로 이어질지 등에 대한 설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논란 속에 두산그룹에 대한 투자자 신뢰가 떨어졌고, 이는 두산로보틱스의 주가에 반영됐다. 두산밥캣 주주 입장에서는 합병 비율을 두고 저평가된 주식을 고평가된 주식으로 받는다는 불만이 나왔다. 두산밥캣에 대한 두산그룹의 실질 지분율만 끌어올리고 오히려 정부가 추진하는 밸류업 프로그램에는 찬물을 끼얹었다는 평가다.
비판이 이어지자 지난 7월 금감원은 두산 측이 제출한 ‘주식의 포괄적 교환·이전에 대한 증권신고서’에 대해 정정을 요구했다. 당시 금감원은 합병 비율에 관한 직접적인 지적 대신 구조 개편의 목적, 의사결정의 내용, 수익성·재무 안전성 등 투자자의 판단에 필요한 정보를 충실히 공시하도록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에 두산 측은 논란이 된 1대 0.63의 합병 비율은 조정하지 않고 합병 시너지에 관한 상세한 설명을 담아 정정신고서를 수정했다. 하지만 지난 8월 26일 금감원은 두 번째 정정 신고를 요구했다.
금감원의 연이은 증권신고서 정정 요구로 혼란이 가중되자 두산그룹은 지난 8월 29일 긴급 이사회를 열고 양사 간의 계약을 해제하기로 했다. 이에 따라 두산밥캣을 두산로보틱스의 100% 자회사로 만든 뒤 두산밥캣을 상장 폐지하려던 계획도 사실상 무산됐다. 이후 지난달 10일 두산그룹과 두산로보틱스, 두산에너빌리티는 금감원 전자공시를 통해 세 번째 정정 보고서를 제출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두산그룹은 같은 달 25일로 예정됐던 임시 주주총회 일정을 모두 연기하고 향후 변경 일정이 확정될 경우 추가 정정을 통해 재공시하겠다고 밝혔다.
상대가치·미래 수익 반영하지 않고 기업가치 낮춰
계열사 간 합병과 관련한 논란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5년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은 주식 교환 방식으로 합병을 추진했는데 합병 비율은 1대 0.35였다. 삼성물산의 주식이 저평가되면서 당시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하고 있던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 매니지먼트가 반대 의사를 제출했고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회사인 ISS도 자문 보고서에 “절차가 법을 준수하지만, 삼성물산 주식 가치가 저평가돼 주주에게 현저히 불리하다”는 의견을 내놨다. 하지만 두 달 뒤, 반대 여론에도 불구하고 합병안은 임시 주총을 통과했고 그 여진은 1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2018년 현대자동차그룹도 헤지펀드에 의해 합병이 무산됐다. 당시 현대차그룹은 현대모비스의 일부 사업부를 인적 분할해 현대글로비스와 합병하기로 했다. 삼성과 유사한 방식으로 정의선 회장의 지분이 높은 현대글로비스의 주가가 고평가됐고 주식을 거의 보유하지 않은 현대모비스의 주가가 가장 낮은 시기에 주식 교환 방식으로 합병을 시도했다가 엘리엇의 반대로 무산됐다. 올해 7월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도 논란이 됐다. 두 계열사의 합병 비율을 1대 1.19로 정했는데 자산 가치가 아닌 시가를 합병의 가액 기준을 삼으면서 비판이 제기됐다.
두산의 사례에서도 두산밥캣의 지분을 보유한 신설 투자회사의 가치 산정 방식이 논란이 되고 있다. 두산로보틱스는 신설 투자회사의 수익가치를 현재 주가로 계산하면서 기업 평가액을 끌어내렸다. 이에 대해 시장에서는 미래 수익을 반영하지 않고 기업 가치를 일부러 낮춘 정황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금감원이 명확한 시정조치를 요구하지 않은 점도 문제다. 합병 비율 산정 시 유사 업종을 영위하는 기업의 상대가치를 기재해야 하는데 두산 측은 유사 기업이 존재하지 않는다며 산정하지 않았고 금감원은 아예 상대가치 명시를 요구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