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원한 동맹도 영원한 갑을도 없다” 퀄컴·ARM, 칩 설계 라이선스 분쟁 심화
퀄컴, 자체 IP로 설계한 CPU 탑재하며 ARM과 갈등 격화
ARM, 퀄컴에 라이선스 취소 통보, 퀄컴 “근거 없는 주장”
퀄컴 AP 주력 고객사 삼성전자, 사업 계획 차질 우려
일본 소프트뱅크 소유의 영국 반도체 설계 업체 ARM이 최대 고객사 중 하나인 미국 퀄컴에 반도체 설계 지식재산권(IP) 사용 계약 해지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최근 퀄컴이 2021년 1조5,000억원에 인수한 업체 누비아(NUVIA)의 기술을 기반으로 한 ‘스냅드래곤8 엘리트’를 공개했는데, ARM은 이것이 사실상 자신들의 기술을 무단으로 사용한 것으로 보고 계약 해지를 통보한 것이다. 업계에선 양 사 갈등이 길어질 경우 삼성전자 등 스마트폰 제조업체들이 핵심 부품인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를 제대로 공급받지 못할 것이란 우려가 나온다.
ARM, 퀄컴에 ‘칩 설계 라이선스’ 취소 통보
26일 블룸버그통신에 따르면 ARM은 퀄컴에 60일의 시정 기한을 주고 ‘아키텍처 라이선스(허가)’ 계약 해지를 통보했다. 두 회사가 합의하지 못하면 퀄컴은 12월 22일부터 ARM의 IP를 사용할 수 없다. ARM은 해당 내용 통지 사실을 확인하면서 “ARM과 협력사들이 30여 년간 구축해 온 독보적인 생태계를 보호하기 위해 필요한 조치”라고 설명했다.
이에 퀄컴은 “ARM이 자신들을 압박하고 높은 사용료를 받기 위해 근거 없는 위협을 가하고 있다”며 “법적 절차를 방해하기 위한 시도로 보이며 라이선스 종료 요구는 완전히 근거가 없다”고 반박했다. 그러면서 “ARM의 반경쟁적 행위는 용서받지 못할 것”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블룸버그에 따르면 퀄컴은 현재 해지 통보와 관련해 ARM을 상대로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블룸버그는 “퀄컴은 ARM 기반으로 만들어진 AP를 매년 수억 개씩 판매하는데, 그중 대부분이 안드로이드 스마트폰에 사용된다”며 “계약이 해지될 경우 퀄컴은 연간 390억 달러(약 54조원)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제품 판매를 중단해야 하고, 막대한 손해 배상 청구에 직면할 수 있다”고 전했다.
퀄컴의 기술 자립 시도에 반발
ARM의 계약해지 통보는 퀄컴이 역대 최고 성능의 야심작 칩인 스냅드래곤8 엘리트 공개 행사를 열며 축제 분위기에 빠져있는 동안 전격적으로 이뤄졌다. 그야말로 잔칫집에 대놓고 찬물을 끼얹은 셈이다.
양사 간 갈등이 불거진 건 인공지능(AI) 반도체 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다. 2020년까지만 해도 두 회사는 핵심 협력사로서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자사 칩 제조 전 과정에 ARM 설계도를 활용하는 퀄컴은 ARM 모바일 IP 매출의 34%(2021년 말 기준)를 차지하는 최대 고객사였다. 그러나 2021년 퀄컴이 PC용 중앙처리장치(CPU) 설계 전문 기업 누비아를 인수하자 상황이 바뀌었다. 퀄컴이 PC용 프로세서 개발 과정에서 ARM 의존도를 낮추는 전략을 추진하면서 관계에 금이 가기 시작한 것이다.
퀄컴은 누비아의 설계 기술을 활용해 퀄컴 자체 칩 설계에 활용했다. 이렇게 탄생한 퀄컴의 새로운 아키텍처가 ‘오라이온(Oryon)’이다. 오라이온은 ARM 설계자산 기반이긴 하지만, 지금까지의 퀄컴 칩과 달리 ARM의 설계 블록을 초기 단계에서부터 조립해 만들어낸 결과물이다. 퀄컴은 이를 바탕으로 올해 스마트폰 두뇌 칩은 물론 PC용 칩까지 내놓으며 시장 공략에 나섰다.
퀄컴 측은 애초에 누비아가 ARM과 계약을 맺었던 상황에서 퀄컴이 누비아를 인수했으니, 이를 활용해 칩을 만드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입장이지만, ARM은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반박하며 2022년 퀄컴을 상대로 계약 위반 및 상표권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계산을 다시 하자는 뜻이다. ARM은 이번 일을 어물쩍 넘어간다면 앞으로 퀄컴 외에도 여러 고객사들이 우회로를 통해 로열티 계약 체계를 사실상 무력화할 수 있다고 봤다. 퀄컴이 ARM의 최대 고객임에도 초강수를 둔 배경이다.
삼성 스마트폰 사업에 불똥 튀나
이런 가운데 업계에서는 두 기업의 법적 갈등이 스마트폰 시장의 지각 변동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 먼저 퀄컴이 ARM의 반도체 기술을 사용할 수 없게 될 경우, 스마트폰의 개발과 생산이 지연될 가능성이 있다. 이는 스마트폰 산업 전반에 걸쳐 지연을 초래하고 소비자의 불편함을 유발할 수 있다.
특히 퀄컴 AP의 주력 고객사인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퀄컴 AP 판매가 중단되거나 ARM과 관계 악화로 퀄컴이 차세대 제품 설계에 차질을 빚게 되면 AP 수급 계획에 변화가 불가피하다. AP는 스마트폰의 성능을 좌우하는 핵심 부품으로, 스마트폰에 적용되는 부품 중 판매 단가가 가장 비싼 편에 속한다. 업계 처음으로 생성형 AI 기능을 스마트폰에 탑재하며 승부수를 띄운 삼성전자 입장에서는 고성능 AP의 안정된 수급은 필수다. 더군다나 삼성전자 시스템LSI 사업부에서 설계한 엑시노스2500의 설계 결함 및 파운드리(위탁생산) 수율 문제로 탑재가 불투명해진 상황에서 퀄컴의 AP 공급 차질은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애플은 삼성전자와 달리 자체 설계한 AP ‘A18′ 시리즈를 아이폰16 시리즈에 탑재하고 있다.
일부 낙관적인 시선도 존재한다. 퀄컴과 ARM의 분쟁이 장기화되면, 이들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다른 기업들이 스마트폰 시장에 뛰어들어 경쟁을 촉진할 것이라는 기대감이다. 경쟁이 심화될 경우 더 나은 스마트폰을 개발하기 위한 기업들의 노력으로 혁신 속도가 빨라지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더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제품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는 설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