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0조원 퇴직연금 시장 ‘머니 무브’, 신한·국민銀 양강구도에 증권사까지 가세
실물이전 서비스 본격화로 해지 없이 이전 가능
신한은행은 적립금, 국민은행은 수익률 우세해
증권사는 원금 보장 대신 높은 수익률에 승부수
퇴직연금 가입자가 기존 운용 상품을 해지하지 않고 금융회사를 옮길 수 있게 됨에 따라 400조원 규모의 퇴직연금 시장에 대규모 자금 이동이 예상된다. 현재 퇴직연금 시장은 은행권이 총적립액의 과반을 차지한 가운데 신한은행과 KB국민은행이 리딩뱅크를 두고 경쟁을 이어가고 있다. 여기에 증권사들이 높은 수익률을 앞세워 고객 유치 경쟁에 가세한 만큼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가 퇴직연금 시장의 경쟁 구도에 변수로 작용할지 관심이 집중된다.
44개 퇴직연금 사업자 중 37개사 서비스 개시
31일 금융권에 따르면 이날부터 퇴직연금 실물이전 제도가 시행된다. 이에 고객 유치를 위한 은행권과 증권사의 경쟁도 가열되고 있다. 지난 25일 IBK기업은행은 개인형 IRP 원리금 보장형 운용수익률이 올해 3분기 말 기준 3.49%로 6대 은행 중 가장 높다고 발표했고, 이틀 후에는 KB국민은행이 개인형 IRP 실적배당 상품의 수익률이 14.61%라며 은행권 1위라고 밝히기도 했다. 마케팅 경쟁도 치열하다. 우리은행을 비롯해 KEB하나은행, 신한은행 등도 자사의 광고모델을 통해 퇴직연금 광고를 새롭게 공개하며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다.
퇴직금 실물이전 제도는 퇴직연금 가입자가 기존 운용 상품을 해지하지 않고 사업자만 바꿔 이전할 수 있는 서비스로 사업자 간 계좌 이전 처리 시 예금, 수익증권, 주가연계파생결합사채(ELB) 등을 만기일까지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옮길 수 있다. 당초 금융당국은 이달 15일 서비스 조기 개시를 목표로 퇴직연금 사업자별 시스템 구축과 테스트를 진행해 왔으나 안정적인 서비스 제공을 위해 추가 테스트 기간이 필요하다는 업계 공통 의견을 수렴해 개시 일정을 보름가량 미뤘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총 44개 퇴직연금 사업자 중 37개사가 31일 서비스를 시작하고 부산은행, 경남은행, 광주은행, iM은행, 삼성생명, 하나증권, iM증권 7개사는 전산시스템 구축·테스트 지연 등에 따라 내년 4월까지 순차적으로 서비스를 출시할 예정이다. 44개 금융사 중 은행권은 3분기 기준 퇴직연금 전체 적립 금액 400조878억원의 52.56%(210조2,811억원)를 차지할 정도로 비중이 크다.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적립금만 해도 166조4,364억원으로 41.6%의 점유율을 차지한다.
신한銀, 금융권 유일하게 적립금 40조원 넘겨
‘리딩뱅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여온 신한은행과 국민은행은 퇴직연금 시장에서도 맞붙게 됐다. 올해 신한은행과 국민은행은 각각 퇴직연금 적립금과 수수료 이익에서 1위 타이틀을 나눠 가졌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신한은행의 퇴직연금 적립금은 올해 3분기 기준 42조7,010억원으로 금융권 가운데 유일하게 40조원을 넘겼다. 지난해 38조7,754억원 대비 10.12% 증가한 것이다. 같은 기간 국민은행은 39조5,015억원으로 40조원 돌파를 목전에 두고 있다. 지난해 말 36조8267억원보다 7.26% 증가한 규모다.
전체 적립금에서는 신한은행이 우세했지만, 퇴직연금으로 벌어들인 수수료 이익은 국민은행이 앞섰다. 실제로 국민은행은 운용 수수료 등 각종 수수료를 포함한 총비용 부담률이 0.44%로 0.42%인 신한은행보다 높다. 이에 지난해 국민은행이 퇴직연금 상품을 통해 벌어들인 수수료는 1,774억원으로 업계 최고 수준이다. 신한은행은 1,699억원으로 2위다.
개인이 직접 가입하는 개인형 퇴직연금(IRP) 상품의 적립금 규모도 국민은행이 앞서는 모습이다. 3분기 기준 국민은행의 IRP 적립금은 금융권 최대 규모인 14조7,881억원으로, 지난해 말 12조7,395억원 대비 16.1% 성장했다. 같은 기간 신한은행은 14조6,602억원의 적립금을 쌓았다. 지난해 말 12조5,707억원과 비교해 16.62% 늘었다. IRP 상품으로 국민은행과 신한은행이 벌어들인 수수료도 444억원, 431억원으로 각각 업계 1위, 2위를 기록했다. 국민은행의 IRP 부문 약진은 비교적 두터운 시니어 고객층 덕분으로 분석된다.
다만 수익률은 신한은행이 국민은행을 소폭 상회한다. IRP 원리금 보장형 기준 10년 장기 수익률은 국민은행 1.65%, 신한은행 1.68%다. 신한은행은 5년 장기를 기준으로도 3bp(1bp=0.01%), 3분기 기준 최근 1년 수익률도 4bp가량 국민은행을 앞서고 있다. 기업이 가입하는 확정급여형(DB)과 확정기여형(DC) 상품 역시 10년 장기 기준 신한은행이 각각 4bp, 6bp 높다. DC 상품의 최근 1년 수익률은 유일하게 국민은행이 11bp 높지만, 5년 이상 장기 수익률에서는 모두 신한은행이 우세한 모습이다.
공격적인 투자 성향 가진 가입자는 증권사 선호
문제는 ‘갈아탈 고객’이 얼마나 되는지다. 금융감독원 통합연금포털에 따르면 올해 3분기 말 기준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 중 83.2%(332조8,076억원)가 예금 등 원리금 보장형 상품으로 운용되고 있다. 전체 퇴직연금 적립금의 과반을 차지하는 은행권에서 원금 보장형 상품의 비중은 87.7%에 달한다. 반면 원리금의 손실 위험이 있는 실적 배당형 상품의 적립금은 16.8%(67조2,656억원)에 불과하다. 통상 실적 배당형의 수익률이 원금 보장형의 2~3배임에도 자금 대부분이 수익보단 안전을 좇아 투자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회사가 관리하는 확정급여형(DB형) 퇴직연금으로 한정할 경우, 원금 보장형 운용 비중은 훌쩍 높아진다. 은행권에서는 전체 DB형의 97.2%, 보험에서는 91.4%, 증권에서는 90.5%가 원금 보장형으로 운용되는데, 이 경우 회사가 사업자를 정하기 때문에 근로자 개인의 선택에 따라 자유로운 갈아타기가 어렵다. 전문가들은 DB형, 확정기여형(DC형), IRP 각 계좌 간 칸막이를 넘어서는 현물이전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감안하면 적립금 규모가 크고 안전 지향적인 4050 이상 세대는 은행권에 머무를 가능성이 높을 것으로 분석한다.
이런 가운데 증권업계에선 수익률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면서 대규모 자금 이동이 나타날 것이라 전망이 나온다. 상장지수펀드(ETF) 등을 통한 장기 투자가 보편화하면서 연금 운용 패턴도 달라지고 있다는 것이다. 이에 증권사들은 보다 공격적으로 고객 유치에 나서고 있다. 자산운용업계와 손잡고 장기 투자에 적합한 신규 상품인 ‘디딤펀드’를 신규 설정한 것은 물론 안전자산을 중심으로 자동으로 자산 배분을 지원하는 로보어드바이저를 도입하고 있다. 은행 대비 고수익과 ETF와 리츠(부동산 투자회사) 등 다양한 상품군에 투자가 가능하다는 점도 강점으로 내세우고 있다.
증권사가 특히 주목하는 분야는 IRP다. IRP는 퇴직 시 수급한 퇴직 일시금을 은퇴 시점까지 적립·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계좌로 DC 연금과 별도로 보유하는 것이 가능하기 때문에 연령대가 높고 투자성향이 공격적인 가입자의 비중도 높은 편이다.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금융상품 지식수준이 높을수록, 투자 성향이 공격적일수록 은행 가입률이 낮아지고 증권사 가입률은 높아지는 경향성이 뚜렷한 편”이라며 “결국 증권사들이 얼마나 은행 고객을 빼 올 수 있느냐 여부가 관건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