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행동주의 펀드 “韓 증시 금투세 폐지로 매력 높아져”, 행동주의 표적 되나
美 행동주의 펀드 돌턴, 금투세 폐지 등 韓 증시 분석
"저평가된 韓 증시, 상법 개정안은 소액주주에 기회"
4년 새 행동주의 펀드 표적 된 韓 기업 10배가량 증가
미국 행동주의 펀드가 “한국 주식이 ‘초특가 세일(deeply discounted)’에 돌입했다”는 분석을 내놨다. 코리아 밸류업 정책과 금융투자소득세 폐지가 맞물려 시장 환경이 개선되면서 저평가된 우량 기업을 중심으로 가치를 창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평가다. 이에 재계에서는 국내 기업이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될 것이란 우려가 커지고 있다.
돌턴, 한국콜마 지분 5% 확보 등 주주행동주의 전개 전망
11일 투자은행(IB) 업계에 따르면 지난 6일 미국의 행동주의 펀드 돌턴 인베스트먼트(Dalton Investment)는 ‘금투세 폐지 다음은 상법 개정인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발간하고 “한국의 주식시장이 여전히 저평가된 상태지만 향후 투자 환경이 개선되면서 기지개를 켤 것”이라고 전망했다. 돌턴은 금융위기가 아시아를 휩쓴 1999년 출범한 행동주의 펀드로, 당시 쑥대밭이 된 아시아 증시에 적극적으로 투자해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돌턴은 보고서를 통해 “올해 들어 아시아 주요 시장이 일제히 오름세를 보인 것과 달리 한국 증시는 내림세를 이어가며 아시아 증시 가운데 최악의 수익률을 기록했다”며 “특히 올해 하반기에는 금투세 도입에 대한 우려로 증시 거래량마저 큰 폭으로 감소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하지만 국회 과반 의석을 차지하는 더불어민주당이 이사의 충실 의무를 ‘회사’에서 ‘회사와 주주’로 확대하는 상법 개정을 추진하고 있다”며 “금투세 폐지와 밸류업 정책이 상법 개정과 맞물리면서 한국 증시의 전환점이 될 것”이라고 예상했다.
돌턴의 제임스 임 수석 애널리스트는 “지금은 여야 모두가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증시 저평가)를 해결하고 시장의 성과를 높이는 데 초점을 맞추고 있다”며 “현재 한국의 우량 기업들이 심하게 저평가된(deeply discounted) 상태임을 감안할 때 다수당을 중심으로 한 정치권의 움직임은 적극적 주주에게 매력적 투자 기회를 제공할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러면서 “이 같은 변화는 돌턴을 비롯한 소액 주주의 이해관계에도 부합한다”고 강조했다.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행동주의 펀드에 긍정적 시장 환경이 열릴 것이란 해석이다.
앞서 돌턴은 2019년 현대홈쇼핑, 2020년 삼영무역에 대해 주주행동주의를 펼친 바 있다. 2022년에는 SK그룹에 적극적 주주환원책 등을 요구하는 주주 서한을 보내며 존재감을 드러냈다. 지난 6일에는 화장품 기업 한국콜마의 지주사인 콜마홀딩스 지분 5.02%를 보유하고 있다고 공시하기도 했다. 올해 초부터 지분을 사들여 오다가 상장사 주식 5% 이상 매입 시 공시해야 하는 ‘5% 규정’에 따라 정체가 드러난 것이다. 돌턴은 단순 투자라고 밝혔으나 업계에서는 조만간 주주 환원 확대를 앞세운 행동주의 운동에 나설 것으로 보고 있다.
SK스퀘어·KT&G·고려아연 등도 행동주의 펀드 표적 돼
한국 시장을 타깃으로 삼은 행동주의 펀드는 돌턴만이 아니다. 영국 데이터 분석 기관 인사이티아에 따르면 행동주의 펀드의 타깃이 된 국내 기업 수는 2017년 3개에 불과했으나 2019년 8개에서 2023년 77개로 5년 새 9.6배나 증가했다. 조사 대상 23개국 중 미국, 일본에 이어 세 번째로 큰 규모다. 한국경제인연합회는 “국내 기업들이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면서 역대급 실적을 거뒀지만, 주가는 저평가된 곳이 많다 보니 국내외 펀드의 먹잇감이 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최근에는 내년 주주총회 철을 앞두고 행동주의 펀드의 움직임이 더욱 본격화되고 있다. 이들은 주총 안건 제안, 이사회 구성 변경 등과 관련해 협상에 나서는 등 다양한 방식으로 기업 경영에 개입한다. 영국계 행동주의 펀드 팰리서캐피털은 최근 SK스퀘어 지분율 1%를 넘기며 10대 주주에 이름을 올렸다. 아직은 자사주 매입 등 주주가치 제고를 요구하는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향후 SK그룹의 지배구조 이슈에 개입할 가능성도 점쳐진다. SK스퀘어는 SK하이닉스 외에 11번가, SK플래닛, 티맵모바일 등을 보유한 SK그룹 정보통신기술(ICT) 부문의 중간 지주사다.
또 동북아시아 최대 사모펀드인 MBK파트너스가 고려아연 경영권을 두고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등 경영진과 다툼을 벌이고 있으며, 두산밥캣의 지분 1% 이상을 확보한 얼라인파트너스도 자회사 합병에 쓰려던 1조5,000억원을 주주 환원용으로 돌리라고 요구했다. 싱가포르계 행동주의펀드 플래쉬라이트 캐피털파트너스(FCP)는 KT&G 경영진에 한국인삼공사(KGC인삼공사) 지분 100%를 1조9,000억원에 인수하겠다는 투자의향서(LOI)를 발송하기도 했다.
행동주의 펀드의 공습이 거세지고 있는 가운데, 현재 국회에서 논의 중인 상법 개정안을 놓고도 재계의 우려가 커지고 있다. 현재로써는 돌턴의 분석처럼 연내 정기국회에서 민주당의 주도로 상법 개정안이 처리될 가능성이 높다. 한국경제인협회(한경협)는 “상법 개정안이 통과되면 무분별한 기업 지배구조 규제로 행동주의 펀드의 경영권 공격을 늘려 기업을 부실하게 만들 수 있다”고 말했다. 일각에서는 모든 주주의 이해관계를 만족시키기 어려운 만큼 자칫 이사진이 배임 소송에 내몰리고 미래를 내다본 장기 투자가 위축될 수 있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日, 행동주의가 자본시장 체질 개선에 주요 촉매로 작용
재계의 우려처럼 현재 국내 자본시장에는 행동주의 펀드가 단기 주가 부양에만 매달려 경영권을 위협할 것이란 부정적인 인식이 지배적이다. 실제로 일부 행동주의 펀드는 지배구조 개선을 명분 삼아 기업을 압박한 뒤 주가가 오르면 막대한 시세 차익을 챙겨 떠난 바 있다. 지난 2003년 SK그룹은 행동주의 펀드의 공격으로 심각한 위기를 경험했다. 당시 외국계 헤지펀드 소버린자산운용은 SK그룹 지주사인 SK㈜ 지분을 집중적으로 매입, 14.99%까지 끌어올리며 SK㈜의 최대 주주에 올랐다.
이후 소버린은 사외이사 추천, 자산 매각, 주주 배당, 최태원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며 SK그룹을 압박했다. 당시 SK그룹의 직접 보유지분은 13%, 최 회장의 지분율은 1%에 불과했다. 최 회장과 SK그룹은 경영권 방어를 위해 지분 매입과 우군 확보에 총력을 기울였고 이 과정에서 1조원이 넘는 비용을 투입해야 했다. 2003년 3월 6,000원 수준에 불과했던 주가가 경영권 다툼을 겪으며 5만원대까지 치솟았고 소버린은 1조원에 가까운 차익을 실현했다. 결과적으로 이 싸움은 SK그룹 측의 승리로 끝났지만, 국내 자본시장에는 굴욕을 안긴 대표적 사례로 회자되고 있다.
다만 행동주의 펀드가 경영에 직접 개입하는 과정에서 기업이 주주가치 제고와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한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적지 않다. 실제로 잉여현금흐름에 비해 배당이 인색하거나, 자산 대비 대주주 지분율이 낮으면서 배당이 박한 기업이 행동주의 펀드의 표적이 되는 경우가 잦다. 국내 대기업들이 3~4세 경영으로 넘어가면서 지분이 잘게 나누는 데다, 상속세 부담 때문에 적극적으로 주가 부양에 나서지 못하는 상황을 정면 겨냥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된다.
일본의 경우 행동주의 펀드가 자본시장 체질 개선에 주요한 촉매 역할을 하기도 했다. 이들은 주주제안을 통해 도쿄증권거래소(TSE)의 개혁안에 동참하기를 요구하거나 정책 설정에 자문하는 방식으로 일본 현지에 맞는 행동주의 전략을 추진하면서 기업가치 제고 활동의 파트너로 거듭났다. 일례로 돌턴은 올해 대형 제과기업 에자키 글리코에 밸류업 프로그램 도입하라는 주주제안을 했고 해당 안건은 지난 3월 정기주총에서 30%의 찬성표를 모았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이를 두고 ‘모두가 행동주의자가 되는 시대’라고 평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