엔비디아의 잠재적 라이벌이었던 ‘그래프코어’, 미국의 대중 규제로 중국 시장 완전 철수
IPU 선보이며 AI 반도체 시장 각광받던 그래프코어, 중국 사업 전면 중단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 등 중국 반도체 '옥죄기'가 결정적 역할 한 듯 엔비디아, 파두의 반도체 매출 부진도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의 연장선상에 있어
22일(현지 시각) 블룸버그 등 외신 보도에 따르면 영국의 반도체 스타트업이자, 엔비디아의 잠재적 라이벌로 평가받던 그래프코어가 이날 성명서를 통해 중국 시장에서 철수하겠다고 공식 발표했다. 미국의 대중국 반도체 수출 규제로 인해 수익성이 악화됐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중국과 상당한 이해관계가 있는 엔비디아 등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도 현재 미국의 중국 ‘옥죄기’로 인해 적잖은 매출 피해를 보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AI 반도체 시장의 신흥 강자, 그래프코어
2016년 영국에서 설립된 그래프코어는 반도체 설계(팹리스)를 주 사업으로 영위하는 스타트업이다. 특히 그래프코어는 AI 연산에 특화된 첨단 지능형처리장치(IPU) 반도체로 구동하는 AI를 위한 컴퓨터 시스템을 제조하고 있는 만큼, 생성형 AI 출현으로 최근 빠르게 재편되고 있는 글로벌 반도체 시장에서 그래프코어가 자사만의 고유한 경제적 해자를 구축했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루고 있다.
글로벌 투자자들은 그래프코어가 설립 초기부터 유니콘(기업가치 10억 달러 이상인 비상장사)이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뭉칫돈을 집어넣은 바 있다. 그래프코어는 설립 첫 해 미국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털(VC)로부터 5,000만 달러(약 651억8,9704만원)를 조달한 뒤 지난해까지 총 7억3,000만 달러(약 9,525억9,525만원)를 투자받았다. 2020년 투자 라운드 당시엔 기업가치가 무려 25억 달러(약 3조2,623억원)에 달하기도 했다.
또한 그래프코어의 IPU가 AI 반도체 시장에서 차지하는 위상은 미래에 더욱 높아질 것이라는 게 업계 안팎의 중론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생성형 AI로 통칭되는 대규모 언어 모델(LLM)에 사용되는 AI 반도체칩은 대부분 그래픽처리장치(GPU)를 중심으로 구성돼 있다. 가령 챗GPT는 1만여 개에 달하는 엔비디아 ‘A100’ GPU가 사용됐다. 다만 GPU의 아키텍처 특성상 애초에 그래픽 처리가 주 용도인 만큼, LLM을 구동하는 데 고전력·고비용 등의 비효율 한계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반면 그래프코어가 자랑하는 IPU는 MIMD(다중 명령 다중 데이터) 아키텍처를 기반으로 미세조정 병렬화(fine-grained parallelism) 연산 처리를 해낸다. 이에 더해 그래프 신경망 모델, 전문가 혼합 모델, 희소 모델 등 최근 떠오르고 있는 최첨단 AI 모델 중 계산 성능 측면에서 IPU가 GPU 대비 크게 아웃퍼폼하고 있다는 점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 이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그래프코어가 사실상 엔비디아의 GPU 기반 반도체가 독점하고 있는 AI 반도체 시장을 재편하는 새로운 신흥강자로 떠오를 것이라는 예측도 적지 않았다.
갑작스레 중국 시장에서 발 뺀 이유는
이런 그래프코어가 갑작스레 중국 시장 철수를 선언한 이유는 미국 정부의 지속된 대중국 수출통제에 따라 수익성이 악화됐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미국의 대중 반도체 규제는 2018년 트럼프 행정부가 당시 중국의 통신 장비 제조업체인 화웨이가 미국 반도체 기술을 탈취해 중국의 군사력을 강화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 화웨이에 대한 미국산 반도체 및 통신 장비 수입을 금지하는 조처를 취하면서 본격화됐다. 이후 미국은 2020년 8월 ‘수출관리 규정(EAR)’ 재개정을 통해 반도체 규제를 실시하면서 사실상 화웨이가 모든 종류의 반도체를 공급받지 못하도록 했다. 이어 2021년 9월에는 중국의 반도체 제조 장비 수출에 대한 심사 대상을 확대하고, 2022년 10월엔 중국의 반도체 생산에 필요한 소재와 부품을 제한하는 조치까지 발표했다.
심지어 올해 10월에는 미 정부가 AI 반도체를 중심으로 수출 통제 대상 국가를 대폭 확대해 중국이 미국 제재를 우회할 수 있는 경로까지 원천 차단하는 추가 규제 조치를 내놨다. 그간 일각에선 중국 기업들이 제3국을 통해 반도체를 수입하는 방법으로 미국의 반도체 규제를 공공연하게 우회해 온 것이 아니냐는 지적이 제기돼 왔다. 실제 최근 화웨이는 고성능 7nm(나노미터) 반도체 프로세서를 탑재한 ‘메이트60프로’를 선보인 바 있는데, 이로 인해 미국의 수출규제에 구멍이 뚫렸다는 비판이 확산됐다. 이에 기존 규제만으로는 중국의 기술 발전을 견제하기는 어렵다고 판단한 미 상무부가 중국과 마카오는 물론, 미국의 무기 수출이 금지된 21개국 등에 대한 반도체 칩 및 반도체 장비 수출 통제를 통해 대중 규제를 전방위적으로 확대했다는 것이다.
이처럼 미 정부가 중국을 상대로 한 자국 기업들의 첨단 반도체 수출을 사실상 ‘금지’하자, 중국은 자국 웨이퍼 반도체 사업에 대규모 공적 자금을 쏟아붓는 등 반도체 자급자족 움직임을 보이게 됐고, 이로 인해 중국의 해외 반도체 수입이 크게 줄자 전체 매출에서 중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25%에 육박하는 그래프코어 또한 영업 손실이 걷잡을 수 없이 커지면서 결국 중국 시장 철수에 나섰다는 분석이다. 실제 영국 기업등록소에 따르면 그래프코어의 지난해 매출은 전년 대비 46% 감소한 270만 달러(약 35억1,640만원)로 집계됐으며, 세전 손실은 전년 대비 11% 증가한 2억460만 달러(약 2,665억3,037만원)를 기록했다.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도 매출 흔들리는 상황
자본 잠식 위기에 처한 그래프코어는 지난달 운영 자금을 충당하기 위해 신규 투자 라운드를 개시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이전과 달리 시장 반응은 싸늘한 모양새다. 앞서 살펴봤듯 미국 규제에 발목 잡힌 중국이 더 이상 그래프코어의 반도체를 사주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자명한 데다, 중국 이외 국가의 주요 고객사들 또한 그래프코어의 반도체 구매를 중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표적으로 2020년 말 마이크로소프트는 그래프코어와 거래를 중단하고 AI 반도체칩 자체 개발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와 관련해 그래프코어 초기 투자자인 세콰이어캐피탈은 “최근 그래프코어의 기업가치가 사실상 ‘0’에 수렴한다”며 당초 전망과 180도 다른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다만 반도체 매출 부진은 그래프코어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니다. 최근 글로벌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의 대중 반도체 수출 규제라는 암초에 걸려 중국 관련 매출에 차질을 겪고 있거나, 매출 부진이 예상되는 상황이다. 이와 관련해 22일(현지 시각) 콜렛 크레스 엔비디아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주주들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중국을 비롯해 수출 규제에 묶인 지역들로 인해 지역 반도체 매출이 이번 4분기에 상당한 감소세를 보일 것”이라고 비관했다.
한편 일각에선 최근 ‘부실 상장’으로 논란이 된 파두의 사례도 미국의 대중 수출 규제와 무관치 않다는 분석이 나온다. 우리나라 반도체 설계 기업 파두는 코스닥 상장 이후 당초 전망과 다르게 매출액이 급감하면서 4만7,000원까지 치솟았던 주가가 2만원 아래로 절반 넘게 곤두박질쳤다. 상장 당시만 해도 파두와 상장 주관사들은 올해 매출이 1,200억원에 달할 것으로 전망했는데, 정작 이후 실적은 2분기 5,900만원, 3분기 3억2,000만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이에 실적이 나쁠 것을 알면서도 파두 측이 이를 은폐하고 상장 전 몸값을 뻥튀기한 것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고 있는 형국이다.
즉 미 정부가 중국의 반도체 굴기를 막기 위해 추진해 온 대중국 수출 규제가 되레 중국의 반도체 ‘자급자족’ 동력을 제공했고, 글로벌 반도체 시장으로부터 고립될 위기에 처한 중국이 자국 반도체 자립화를 앞당기면서 파두를 포함한 한국 팹리스 기업들 전반의 반도체 수출도 크게 줄었다는 설명이다. 다시 말해 파두의 매출액 급감은 상장 심사 과정에서의 문제가 아닌, 실제 미-중 갈등 등 파두가 통제할 수 없었던 지정학적 변수에서 비롯됐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파두도 “실적 타격은 낸드(NAND) 및 솔리드스테이트드라이브(SSD) 시장의 급격한 침체와 대대적인 시스템 재점검 절차가 맞물리면서 고객사들이 부품 수급을 전면 중단한 게 2~3분기 실적에 타격을 줬다”며 “해당 부분은 당사가 상장을 진행했던 시점까지는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었던 만큼, 파두에선 어떤 부정적인 의도나 계획 등이 없었음을 거듭 말씀드린다”고 해명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