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G ‘덫’에 걸린 한국 파운드리, ASML 압박에도 속수무책
탄소 중립 실현에 총력 기울이는 ASML, 고객사 압박 본격화 RE100 달성율 지지부진한 국내 파운드리 업체들 '비상' 기준 없이 무조건 규제? 급진적 ESG 경영 어려운 국내 시장
반도체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제조사인 네덜란드 ASML이 고객사에 ESG(환경·사회·지배구조) 압박을 가하고 있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파운드리 기업에 신재생에너지 활용률 제고를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ASML을 비롯한 글로벌 테크 기업들의 ESG 경영 기조가 본격화하는 가운데, 관련 기반을 갖추지 못한 국내 기업들은 줄줄이 시류 편승에 난항을 겪는 양상이다.
“고객사 포함해 넷제로 실현” ASML의 목표
ASML은 2020년 연례 보고서에서 ‘스코프3’ 현황을 공개했다. 스코프3는 사업 운영은 물론 △공급망 △운송 △제품 사용 및 폐기 등 조직이 직접 소유하거나 통제하지 않는 자원으로부터 발생하는 온실가스를 모두 포함하는 탄소 배출 지표다. 자진해서 가장 강력한 탄소 배출 기준을 적용, 본격적인 친환경 경영을 실현하겠다는 뜻을 표명한 것으로 풀이된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ASML이 지난해 공개한 2022년 보고서에서 “네덜란드와 미국에선 100% 재생에너지 사용을 달성했지만 대만과 한국 반도체 기업은 여전히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강조했다는 점이다. 2040년까지 고객 업체를 포함해 넷제로(Net Zero, 대기 중 온실가스 농도가 인간 활동에 의해 증가하지 않도록 순 배출량을 0으로 조정하는 것)를 달성하겠다는 목표를 앞세운 ASML이 본격적으로 고객사의 탄소 경감 노력을 주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해당 보고서 발표 이후 1년, ASML은 2023년 보고서를 통해 “TSMC 등 대만 기업이 ESG 경영 방면에서 진전했다”고 짚었다. 재생에너지 전력구매계약(PPA)을 체결한 대만 반도체 기업들이 점진적으로 RE100 목표 달성에 가까워질 것이라는 분석이다. 단 ASML은 “한국에선 아직 (ESG 경영) 어려움이 많다”며 국내 기업의 부진한 ESG 행보를 재차 지적했다.
이에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ASML과 동맹 관계를 구축한 국내 파운드리 기업들은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이들 기업은 2050년까지 RE100(기업 활동에 필요한 전력의 100%를 재생에너지를 이용해 생산된 전기로 대체하는 것)을 달성하겠다고 선언했지만,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 최근 대만의 TSMC가 RE100 달성 목표 시기를 10년가량 앞당긴 것과는 대조적인 행보다.
국내 파운드리 ‘양대 산맥’의 노력
국제환경단체 그린피스의 ‘삼성전자 신환경경영전략 1주년 평가’ 보고서에 따르면, 삼성전자의 실질적인 친환경 에너지 대체 비율은 10% 이하일 가능성이 높다(2022년 기준, 가중치 계산). 삼성전자는 당해 RE100 달성률이 31%에 달한다고 주장했으나, 이를 양이 아닌 질적으로 평가하면 재생에너지 확대에 기여하는 정도는 그다지 높지 않다는 분석이다. 이어지는 시장 압박에 삼성전자는 탄소포집연구소·미세먼지연구소 등을 합한 ‘에어사이언스 리서치센터’ 를 신설, 반도체 생산 과정에서 배출되는 탄소를 저장·재활용하는 기술을 개발해 2030년부터 제조 시설에 적용하겠다는 방침을 밝힌 상태다.
SK하이닉스의 경우 삼성전자보다 한층 적극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다. ‘녹색 프리미엄 제도(재생에너지로 생산된 전력 구매자가 자발적으로 추가 요금을 부담하는 제도)’를 적극 활용, 국내 전사 재생에너지 사용 비율을 2022년 29.6%까지 끌어올린 것이 대표적인 예다. 지난달에는 SK에코플랜트와 재생에너지 공급을 위한 직접전력거래계약(PPA)을 체결, RE100 목표 달성을 위한 의지를 드러내기도 했다.
SK하이닉스가 ASML과 직접 탄소 배출 경감을 위한 MOU(양해각서)를 체결했다는 점도 눈에 띈다. 지난해 12월, SK하이닉스는 ASML과 EUV용 수소가스 재활용 기술 개발 MOU를 체결했다. 기술 개발을 통해 EUV 장비 내부에서 사용되는 수소를 태우지 않고 재활용할 경우, 전력 사용량이 20% 감소해 탄소 배출을 줄이는 효과를 낼 수 있다. 하지만 업계 일각에서는 아직 이들 기업의 협력이 MOU 단계에 그치는 만큼, 실질적인 탄소 배출 경감 효과가 발생하기까지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이라는 전망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한국은 ESG 경영이 어려운 나라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이들 기업이 RE100을 위한 꾸준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음에도 불구, RE100 달성률이 30% 전후에서 정체돼 있다는 점이다. 업계에서는 국내 시장 전반이 ESG 경영에 친화적이지 않으며, 이로 인해 대다수 기업이 RE100 목표 달성에 난항을 겪고 있다는 비판이 흘러나온다. 삼성전자, SK하이닉스 등 자본과 규모를 갖춘 대기업도 시장 구조의 한계를 뛰어넘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실제로 현재 국내 시장 내에는 ESG 공시 등 구체적인 기준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다. 그간 기업들은 평판 및 해외 기업과의 협력을 고려,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한국ESG기준원(KCGS)의 불투명한 규제에 따랐다. 당장 ESG 등급 제고에 도움이 될지조차 알 수 없는 친환경 경영 전략을 펼치며 불확실성 리스크를 떠안아 왔다는 의미다. 최근 금융위원회가 ESG 공시제도 초안을 이르면 3월 중 발표할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지만, 구조적 문제 해결에는 이후로도 상당한 시일이 소요될 것으로 보인다.
국내 재생에너지 공급 부족 문제 역시 RE100 달성의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다. 지난해 12월 한국에너지공단이 발표한 2022년 신·재생에너지 보급통계 확정치에 따르면, 국내 신·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9.2%에 불과했다. 연료 전지, 석탄가스화복합화력발전(IGCC) 등 신에너지를 제외한 재생에너지 발전 비중은 8.1%에 그쳤다. 저렴하고 풍부한 재생에너지를 조달할 수 없다면 RE100 목표 달성 역시 지연될 수밖에 없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한국 ESG 경영 특유의 한계를 뚫고 ASML의 기대치를 충족할 수 있을지 업계의 이목이 쏠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