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과급 잔치 등 은행권 비판 여론 확산, 금융노조 ‘8.5% 임금 인상’ 협상 난항
2021~2023년 실질임금 저하한 금융권, 금융노조 "올해는 임금 8.5% 인상해 달라"
'이자 장사' 등 비판 여론 의식한 사용자, "지나친 인상은 사회적 공감대 얻기 어려워"
시중은행 직원 수 감소 추세, 일각선 임금 인상에 따른 인원 추가 감축 현실화 우려도
은행권 노사가 두 달 만에 임금 협상을 재개한 가운데, 금융산업노동조합은 이전에 제안했던 임금 8.5% 인상안을 그대로 유지하겠단 방침을 발표했다. 물가상승률 대비 낮은 임금 인상안을 받아들여 왔던 만큼 올해 이를 만회하겠다는 취지지만, 업계에선 노조 측의 임금 인상안이 실제 반영되기는 어려울 거란 반응이 지배적이다. 은행권의 ‘이자 장사’ 및 고액 연봉에 대한 비판적 여론이 확산한 상황이기 때문이다.
금융노조 8.5% 임금 인상안 제시
10일 금융권에 따르면 은행권 경영진과 금융노조는 이날 대표단 임금 협상을 위한 교섭을 진행한다. 5월 17일 3차 교섭을 진행한 지 2개월 만이다. 금융노조는 앞서 총액 기준 8.5%의 임금 인상을 요구한 바 있다. 국내총생산(GDP) 성장률 전망치 2.1%와 소비자물가 상승률 전망치 2.6%를 더한 후 2021~2023년 발생한 실질임금 저하를 감안해 산출한 인상률이다. 최근 5년 동안 물가상승률 대비 낮은 임금 인상안을 받아들여 온 만큼 올해 이를 만회하겠다는 인식이 기저에 깔린 것으로 보인다.
노조는 이외 ▲주 4.5일제(주 36시간) 도입 ▲사회공헌기금 조성 ▲신규 투자상품 판매 시 노조와 사전 협의 진행 ▲육하휴직 3년 적용 등 조건도 제시했다. 단체협약 개정 및 신설 안건으로는 ▲고용 안정과 일자리 확대 ▲성장주의 탈피 ▲건강한 조직문화 형성 ▲차별 철폐 ▲안전권 및 정보 보호 강화 ▲금융산업의 사회적 책임·역할 강화 ▲산별 교섭체제 강화 등 7개 부문 25개 항목을 담았다.
정부의 핵심 금융 정책인 KDB산업은행 부산 이전 문제 역시 산별교섭 핵심 쟁점으로 떠오를 전망이다. 산은 노조는 각종 부작용 우려를 내세우며 지방 이전 지지에 나섰는데, 금융노조가 힘을 실어줄 가능성이 크다. 올해 산별교섭 대표 지부에 산업은행지부가 포함됐기 때문이다. 김형선 금융노조위원장은 “현재 국민의힘에서 주장하는 국책은행 지방 이전을 저지할 생각”이라며 “금융산업이 왜 수도에 집적해야 하는지 국회와 국민께 이해시킬 수 있도록 노력할 예정”이라고 전했다.
사용자 측은 수용 불가 입장, “부정적 인식하지 않을 수 없어”
다만 업계에선 노조 측이 제시한 임금 인상안이 실제로 반영되긴 어려울 것이란 평가가 나온다. 사용자 측이 “금융 산업의 평균 임금이 높은 편이고 세계적 경기 침체와 (금융 산업에 대한) 국민의 부정적 인식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며 수용 불가 입장을 거듭 밝혔기 때문이다. 은행을 향한 ‘이자 장사’ 비판이 여전하고 은행권 고액 연봉에 대한 여론이 좋지 않은 만큼 금융노조가 제시한 임금 인상률 8.5%가 사회적 공감대를 얻기 어려울 수 있다는 우려를 내보인 것으로 풀이된다.
실제 이번 8.5% 인상 요구안은 통상적인 수준을 뛰어넘는다. 최근 3년간 인상 요구안을 살펴봐도 가장 높은 수치다. 금융노조는 2021년 4.3%, 2022년 6.1%, 2023년 3.5%의 임금 인상을 요구해 왔고, 실제 타결된 임금 인상률은 2021년 2.4%, 2022년 3.0%, 2023년 2.0% 정도였다. 지난해 KB국민·신한·하나·우리은행 등 4대 시중은행 임직원 평균 보수가 1억1,675만원이었음을 고려하면, 8.5% 인상 시 4대 은행의 평균 연봉은 1억2,677만원까지 뛰어오른다.
성과급 잔치 비판 여론도 여전하다. 앞서 지난해 은행들은 통상 임금의 평균 300%대가 넘는 성과급을 지급하면서 당국과 언론의 힐난을 한 몸에 받은 바 있다. 이에 올해 성과급 규모를 통상 임금의 200%대 수준까지 줄였지만, 일반 근로자에 비하면 여전히 높다는 목소리가 크다. 통계청이 발표한 ‘2022년 기업 활동조사 잠정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성과급을 지급한 기업은 전체의 66.1%에 그쳤다. 윤석열 대통령이 “(서민들이) 죽도록 일해 번 돈을 고스란히 대출 원리금 상환에 갖다 바치는 현실에 은행의 종노릇을 하는 것 같다”며 은행을 직접 질타했던 이유다.
금융노조 지도부 교체 과정에 내홍이 일면서 협상력이 약화된 것도 악재다. 앞서 지난 4월 금융노조는 박홍배 전 금융노조위원장이 총선 출마를 이유로 사퇴한 데 따른 보궐선거를 치렀다. 선거 결과 윤석구 하나은행 노조위원장이 당선됐지만, 5월 21일 노조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윤 위원장에 대한 당선 무효 판결을 내렸다. 부정선거 논란이 확산한 탓이다. 윤 위원장은 선거 운동 기간 도중 진행된 하나은행 노조원 교육에서 참가자들에게 300만원 상당의 경품을 제공하고 분회장들에게 고급 비타민을 선물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후 윤 위원장은 법원에 당선무효 결정의 효력을 정지 가처분을 신청했으나 기각됐고, 결국 재선거를 거쳐 김형선 IBK기업은행지부 위원장이 최종 당선됐다.
이번 보궐선거 사태에 대해 금융노조 관계자는 “대표자가 달라진다고 해도 원하는 바는 똑같기 때문에 협상에 영향을 주지는 않을 것”이라며 관련 논란이 노조의 협상력을 저해하진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러나 업계에선 선거 논란에 따라 2달간 임금 협상이 잠정 중단됐던 만큼 노조 측이 원하는 수준의 결과를 끌어내는 건 불가능해졌다는 반응이 쏟아진다.
인력 감축 이어지는 은행권, 임금 인상이 ‘구실’ 될 수도
일각에선 노조 측이 지나친 임금 인상을 요구할수록 은행의 인력 감축 구실이 강화될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최근 은행들은 인력구조 개선이란 명목 아래 인원 감축을 지속해 왔다. 실제 국내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의 희망퇴직 인원은 ▲2021년 2,093명 ▲2022년 2,357명 ▲2023년 2,392명 등으로 매년 증가세를 보였다.
시중은행의 직원 수도 최근 2년간 감소 추세다. 기업데이터연구소 CEO스코어가 국내 매출 상위 486개 기업을 대상으로 국민연금 가입 고용 현황을 조사한 결과 5대 시중은행의 국민연금 가입자 수는 2021년 12월 7만1,587명에서 2023년 12월 말 6만9,518명으로 2.9% 감소했다. 감소 폭이 가장 큰 곳은 국민은행이었다. 2021년 말 1만6,577명에서 2년 뒤 1만5,823명으로 754명(4.5%)이 줄었다. 우리은행도 동기간 4.2% 인원이 감축됐으며, 신한은행과 하나은행은 각각 2.9%, 2.2% 감소했다. 그나마 감소 폭이 가장 작은 농협은행은 0.6% 감소하는 데 그쳤다.
은행 인원 감축이 심화한 건 디지털 전환에 따른 점포 축소로 직원 수가 덩달아 감소한 영향이 크다. 금융감독원 금융통계정보시스템에 따르면 5대 은행의 국내 점포 수는 2021년 말 4,188개에서 2022년 12월 말 3,989개로 290개가 줄었다. 지난해 9월 기준 국내 점포 수는 3,931개로 분기를 거듭할수록 점포 수가 줄어들고 있다. 이에 대해 금융권 관계자는 “희망퇴직 및 인원 감축은 조직 효율화를 위한 조치”라며 “불필요한 지출 비용을 줄이고 디지털을 통한 영업 실적 성장을 통해 생산성을 끌어올리겠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은행이 생산성 제고를 우선 가치로 두는 이상 임금 인상에 따른 인원 추가 감축이 현실화하는 등 노조 측이 역풍을 맞을 가능성도 있단 의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