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모펀드 주도 ‘자진 상장폐지’ 흐름 확산, 주주 경영권 간섭 심화·주가 급락 등이 원인
사모펀드발 자진 상장폐지에 주주 불만 확대, 지분 결집 등 행동에 나서기도
비상장사가 관리 더 쉽다는 사모펀드들, 주가 급락-디폴트 위기 등도 영향
기업가치 폭락에도 일정 수준에 주식 매각 가능, "상장폐지가 주주에게도 이익" 견해도
최근 사모펀드(PEF) 주도 상장폐지가 늘면서 주주들의 불만이 커지고 있다. 공개매수 가격이 개별 주주의 매입가보다 낮게 책정돼 불합리하다는 이유에서다. 다만 사모펀드 측은 ▲의사결정의 신속함 확보 ▲지나친 공시의무 부담 탈피 등 비상장화에 이점이 더 많다는 입장이다. 주가가 급락하면서 인수금융 관련 비용이 증가한 탓에 자진 상장폐지를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의견도 있다.
쌍용C&E·락앤락·커넥트웨이브 등 자진 상장폐지 추진
15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쌍용C&E는 지난 9일 유가증권시장(코스피)에서 자진 상장폐지됐다. 사모펀드 운용사인 한앤컴퍼니가 상장폐지를 주도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외 락앤락(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 커넥트웨이브(MBK파트너스), 제이시스메디칼(아키메드그룹) 등도 사모펀드가 공개매수를 통해 상장폐지를 추진 중이다.
지난해엔 오스템임플란트와 루트로닉이 사모펀드 주도로 상장폐지된 바 있다. 당초 국내에선 드물게 나타나던 사모펀드 주도 상장폐지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이에 대해 박용린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원은 “한국에서 2010년대 초반 일부 사모펀드의 상장폐지 사례가 나타난 이후 2023년부터 일부 대형 사모펀드 운용사에 의해 공개매수 후 상장폐지되는 사례가 본격화하는 추세”라고 설명했다.
사모펀드에 의한 자발적 상장폐지가 확산된 건 해외도 마찬가지다. 미국 내 사모펀드 주도 상장폐지는 2016년 28건에서 2022년 45건까지 증가했고, 일본은 2022년 12건, 2023년 18건을 기록했다. 일본 대표 상장기업이던 도시바도 일본 사모펀드 컨소시엄에 의해 공개매수 후 상장폐지된 바 있다.
이 같은 흐름에 주주들은 불편하단 입장이다. 공개매수 가격이 개별 주주의 매입가보다 낮은 경우가 많은 탓이다. 불합리함을 타파하고자 직접 행동에 나선 이들도 있다. 락앤락 소액주주들이 락앤락 대주주인 어피니티가 제시한 공개매수 가격이 너무 낮다며 저지를 위한 지분 결집에 나선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커넥트웨이브 소액주주들은 커넥트웨이브 대주주인 MBK파트너스가 주가를 일부러 떨어뜨렸다고 주장하며 로펌 선임에 나서기도 했다.
사모펀드 비상장화 속도, “공시의무 탈피 등 이점 많아”
사모펀드 측이 주주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비상장화에 속도를 내는 건 상장사보다 비상장사가 관리에 더 수월하기 때문이다. 우선 상장폐지 이후 기업은 중요한 의사결정 과정에서 주주 간 이견 발생 가능성을 차단할 수 있다. 현재 한국의 주주총회 결의 요건은 주요국과 비교해 매우 엄격한 편이다.
한국상장회사협의회가 ‘발행 주식이 총 100주인 회사의 주총 결의에 필요한 최소 찬성 주식(보통주) 수’를 비교한 연구에 따르면 한국은 25주 정도로, 미국(1주)·일본(1주)·영국(2주)·중국(1주), 프랑스(11주)와 비교해 압도적으로 많다. 사모펀드가 상장폐지의 이유로 ‘경영활동의 유연성 및 의사결정의 신속함 확보’를 꼽는 이유다. 여러 가지 공시의무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점도 메리트로 꼽힌다. 상장사는 경영상의 주요 결정 사항이나 정보들을 시장에 의무적으로 공개해야 한다.
문제는 공시의무에 따른 부담이 지나치게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2020년 공정거래법에 국외 계열사 공시의무, 공익법인 공시의무가 각각 도입된 데 이어 2022년엔 하도급법에 하도급대금 공시의무가 신설됐다. 몇 년 새 신규 공시가 연달아 시행된 것이다. 지난해 공정거래위원회가 8개 분기공시 항목을 연공시로 전환하는 등 공시 부담 개선 방안을 마련하긴 했으나, 오는 2026년부터 ESG 공시의무가 새롭게 도입될 것으로 전망돼 기업들의 공시 부담은 여전하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주주제안 남용도 사모펀드의 비상장화 흐름에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업계에 따르면 지난 2020년 정부가 상법 개정안으로 주주제안의 문턱을 확 낮추면서 기업으로선 과도하거나 억지스러운 제안이라도 일단 받아들여야 하는 상황에 처했다. 행동주의 펀드 등 소액주주의 활동을 보조하는 환경이 갖춰지면서 상장사에 대한 경영권 간섭이 심해졌다는 의미다. 실제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정기주주총회 기준 주주제안 접수 상장사 및 안건 수는 2020년 26개사(59건)에서 올해 40개사(93건)으로 늘었다. 이런 가운데 기업 밸류업 프로그램으로 소액주주와 행동주의 펀드의 목소리에 더욱 힘이 실리는 양상이 벌어지자 자진 상장폐지를 결정했다는 게 사모펀드 측의 설명이다.
주가 급락에 인수금융 비용↑, 상장폐지로 주가 관리 압박 벗나
일각에선 주가 관리 압박에서 벗어나기 위해 사모펀드들이 상장폐지로 선회한 것이라는 의견도 나온다. 통상 사모펀드 운용사들은 기업 경영권을 인수할 때 인수 대상 기업으로부터 매입하려는 주식 지분을 금융사에 담보로 제공해 대출을 받는다. 이후 이 돈으로 인수 기업의 주식을 사는데, 이때 금융사들은 재무약정을 통해 해당 대출을 유지하는 데 필요한 몇 가지 조건을 설정한다. ▲5년인 대출 기간 동안 담보로 잡은 기업의 지분 가치 대비 순차입금 규모(LTV)가 50∼80%를 넘지 않을 것 ▲기업의 현금흐름 창출 능력을 보여주는 감가상각전 영업이익(EBITDA)이 순차입금 대비 일정 수준을 유지할 것 등이 대표적이다.
다만 인수 이후 주가가 급락해 LTV가 약정한 수준을 넘으면 기한이익상실(EOD) 사유가 돼 대출 금융회사가 조기 상환이나 담보 보충을 요구할 수 있게 된다. 약정 수준이 무너지지 않더라도 주가가 크게 떨어지면 인수 당시에 일으켰던 대출을 연장·차환(리파이낸싱)하는 시점에 원금 일부 상환이나 더 높은 대출 금리 등 각종 추가 비용을 져야 한다. 주가 급락으로 상황이 최악에 치달을 경우 ‘디폴트(채무불이행)’ 위기에 빠질 수 있다는 것이다.
실례로 과거 IMM 프라이빗에쿼티(PE)는 에이블씨엔씨의 주가가 크게 하락하자 인수금융 기한이익상실에 빠진 바 있다. 이에 대해 한 사모펀드 운용사 고위 임원은 “상장사의 경영권을 인수할 때는 프리미엄을 지급하기 때문에 인수가 완료되는 동시에 손실 구간에 접어드는 셈”이라며 “이후에도 주가 관리가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설명했다.
이번에 공개매수를 진행한 락앤락, 쌍용C&E, 커넥트웨이브 등도 주가 급락에 따라 인수금융 관련 비용이 늘어난 경우다. 락앤락 대주주 어피니티는 지난 2017년 8월 락앤락 인수 당시 인수 지분 전량을 담보로 인수자금의 약 절반(3,234억원)을 차입했다. 계약상 LTV는 약 50%, 이자는 연 4.2% 수준이었는데, 대출계약 당시 3만원대에 머물던 락앤락 주가가 2022년 10월께 5,000원대까지 추락하면서 위기에 몰렸다. 쌍용 C&E와 커넥트웨이브 역시 한앤컴퍼니와 MBK파트너스가 인수금융을 일으켰던 당시에 견줘 주가가 각각 60%·20%가량 하락한 상태다. 사모펀드 입장에선 기업가치를 높이기 위해 자진 상장폐지 등 자구 노력을 이어갈 수밖에 없었단 것이다.
자진 상장폐지가 소액주주에게 오히려 이익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시각도 있다. 기업가치가 폭락한 상황에서도 그나마 높은 가격에 주식을 매각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실제 커넥트웨이브의 공개매수가는 1만8,000원인데, 해당 기업의 올 초 주가는 1만원 안팎에 형성돼 있었다. 제시가를 지난해 말 기준 회사의 순자산·순이익과 비교하면 주가순자산비율(PBR)은 약 1.4배, 주가수익비율(PER)은 400배가 넘는다. 락앤락의 경우 공개매수가가 8,750원으로 책정됐다. 이를 지난 연말 락앤락 순자산(5,015억원)과 비교하면 PBR이 0.76배 정도에 불과하지만, 공개매수 발표 전까지 주가가 5,000~6,000원 선에 정체돼 있었음을 고려하면 불합리한 수준은 아니라는 평가가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