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 밸류업 정책의 빗나간 방향성, 껍데기만 고칠 게 아니라 기업 오너들의 사고방식부터 고쳐야
'밸류업' 정책, 세부안 연이어 나오지만 대기업들 기업지배구조 개선책은 미봉책에 불과
소액 주주들을 투자자로 보지 않고 단순 자금 지원 채널로만 보는 오너들 자세부터 고쳐야
전문가들 "시장 신뢰 어긴 대주주에 대한 법적 제재 강화돼야 밸류업 성공할 수 있을 것"
올해 초부터 정부의 밸류업 정책이 금융시장의 최대 화두로 떠오른 상태다. 공매도 금지, 공시 강화, 은행들의 횡령 사건 적발, 금투세 폐지 등등은 큰 틀에서 보면 ‘코리아 디스카운트(한국 증시 저평가)’를 해결하고 증시를 부양시키기 위한 각종 제도적 지원이라 봐도 무방하다. 그러나 정부의 노력이 계속되고 있음에도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에 대한 기대감은 시장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한국 주식 시장의 구조적 문제는 기업 오너들의 ‘합법적 약탈’ 때문
지난 2월 주요 대기업들의 팔목을 비틀어 내놨던 각종 주주 환원 정책들은 대부분 자사주 매입이나 배당 확대와 같은, 그간 기업들이 주주들의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 종종 내걸었던 IR(기업설명회) 활동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했다. 주가 역시 한때 일시적으로 반등하기는 했지만 3월 주주총회를 거친 후 대부분 제자리로 돌아갔다. 현재 국내에서 주가가 오르는 주식들은 여전히 ‘테마주’에 속한 주식들뿐이다. 금융당국은 답답했는지 19일 한국거래소에 ‘거래소시장 구조 재편’ 관련 연구 용역을 발주할 것을 주문했다. 일본, 영국 등의 사례를 참고해 거래소 시장의 코스피-코스닥-코덱스 시장 구조를 개편하겠다는 의지가 깔려 있으나, 시장 관계자들은 또 다른 세금 낭비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국내 주식 시장에서 밸류업 정책이 기대만큼 먹혀들지 않은 것은 금융당국의 제안 대부분이 근본적인 문제를 건드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주식 시장의 가장 고질적 문제는 기업지배구조다. 지난달 한국거래소는 오는 2025년부터 기업지배구조 보고서에 밸류업 계획 항목을 신설한다고 밝힌 바 있으나, 시장은 기업 오너들의 ‘합법적 약탈’부터 바로 잡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SK그룹과 두산그룹이 대표적 예다. 최근 경영난에 시달리고 있는 SK와 두산은 그룹 내 기업 간 합병절차를 밟고 있다. SK의 경우 전기차 빙하기로 심각한 자금난에 빠진 SK온을 살리기 위해 중간지주회사인 SK이노베이션이 SK E&S로 1기업 2체제 방식으로 합병하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합병 비율이 SK E&S에 불리하다는 시장 평가가 확산하면서 SK E&S에 상환전환우선주(RCPS)로 투자를 진행했던 사모펀드 콜버그크래비스로버츠(KKR)에 어떤 수준의 보상이 주어져야 하는지에 대한 말들이 많다. 두산그룹도 밥캣과 로보틱스가 합병하면 지배주주만 이득을 보고 소액 주주들은 피해만 볼 것이라는 평가가 나온다.
대주주, 특히 오너 일가가 이렇듯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기업 가치를 정하는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보니 주식 시장에서 국내 기업들의 발표에 대한 신뢰도는 굉장히 낮다. 이에 야당은 지난 18일 ‘두산밥캣 방지법’이라는 이름으로 대주주 합병 비율을 개편하는 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대주주들이 국내법의 제한 범위 안에서 대주주들에게 지나치게 유리한 방식으로 합병 비율을 정하는 것을 막겠다는 것이 법안의 취지다. 이를 두고 종목 토론방에서는 그 어떤 밸류업 정책보다 대주주 전횡을 막는 법안이 훨씬 더 강력한 주가 부양 효과를 낳을 것이라는 평들이 나오기도 했다.
기업 상장은 자금 조달일까? 자금 수탈일까?
기업지배구조 전문가들은 국내 주요 기업 오너들이 가진 주식 시장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지적한다. 기업을 비상장 상태로 유지하는 장점은 그대로 취하려 하면서도, 정작 투자자들의 의사가 기업 경영에 영향을 주는 것에 대해선 독재자처럼 차단하는 것을 당연시 여긴단 것이다.
관계자들은 이같은 인식의 시작이 1972년 박정희 정권에서 비롯됐다고 진단한다. 1970년대 들어 실물 경제 위축, 수출 둔화로 기업들이 고금리의 사채를 끌어 쓰다 무너지는 상황에 이르자, ‘8.3 사채동결조치’라는 긴급조치를 통해 사채업자들의 돈을 사실상 강탈해 기업 활동을 지원했다. 박정희 정권은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기업들에게 기업공개 강요와 더불어 철강, 비철금속, 조선, 기계, 전자, 화학 등 6개 전략 업종에 강제로 계열사를 세우도록 압박했다. 정부 입장에서는 중화학 공업 육성 및 자본시장 활성화를 통한 기업의 자금 확보 통로 구축을 목표로 한 전략이었으나, 관치 금융의 압박에 맞춰줄 수밖에 없었던 기업들은 자본금 부족분을 메우기 위해 순환출자, 교차출자 등을 통한 가공자본을 만들었고, ‘쪼개기 상장’으로 대변되는 모-자회사 중복 상장을 통해 지배구조를 공고화하는 임시방편을 선택했다. 지금까지 문제점으로 지적되는 각종 기업지배구조 문제가 지난 1970년대 압축 성장을 위해 선택했던 임시방편들의 결과물인 셈이다.
결국 같은 문제가 기업에 대한 시장의 신뢰도를 낮추고, 그 어떤 밸류업 정책을 써도 시장의 불신이 해소되지 않는 결과를 낳고 있다는 지적도 뒤따른다. 경영 실패에도 불구하고 사실상 경영권에 대한 공격이 차단된 순환출자 구조가 고착화되면서 유상증자 등의 자본시장 의사 결정이 자금 조달이라는 원래의 목적과 달리 주주들에게 ‘우리가 안 망하도록 돈을 바쳐라’는 식의 ‘자금 수탈’로 비춰지게 됐다는 것이다.
환부를 도려내는 밸류업 정책 나와야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 가능
앞서 지난 2008년 1월, 막 대우건설을 인수했던 금호아시아나그룹 박삼구 회장은 대한통운 인수전에 대우건설을 참여시키지 않겠다는 시장과의 약속을 어기며 맹비난을 받은 바 있다. 대한통운 인수 전에 자금 부족을 고민하다 결국 대우건설이 지분 24.98%를 인수하는 것으로 인수 전략을 변경했던 것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대우건설은 자금 부족을 메우기 위해 기업의 상징과도 같았던 서울역 앞 대형 오피스 건물을 매각했고, 이후로도 여러 차례 자산 매각을 집행해야 했다.
당시 대우건설 직원들은 이미 ‘새우가 고래를 삼킨다’는 평이 나왔던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인수에도 불만이 가득한 상태였는데, 연이어 회사의 자부심까지 팔려나가자 사기가 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이같은 대우건설 직원들의 사기 저하와 함께, 시장에서도 박삼구 회장을 믿고 대우건설 주식을 사는 투자자들이 사라졌고, 대우건설 주가 부양을 담보로 걸었던 조기상환청구권(풋옵션) 목표 달성에 실패하면서 발생한 막대한 차입금 부담에 결국 금호아시아나그룹은 2014년 계열 분리를 진행하게 된다. 이후 대우건설과 대한통운은 모두 새로운 주인을 찾아갔고,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사실상 몰락했다.
금융 시장 전문가들은 당시 금호아시아나그룹이 대한통운 인수를 포기했었더라도 대우건설 경영권을 유지하기 쉽지 않은 상황이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시장의 신뢰를 저버리면서까지 무리한 인수를 진행한 것이 기업 몰락의 결정타였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최근 나오는 밸류업 정책도 당시 시장의 냉혹한 평가와 같은 관점에서 정책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진단도 함께 내놓는다. 이미 시장의 신뢰를 잃은 주요 대기업 수장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자사주 매입, 배당 확대 등의 일시적인 부양책으로 해결하려는 태도는 ‘언 발에 오줌 누기’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시장에서는 최근 진행된 SK그룹과 두산그룹의 자회사 간 합병이 당장은 위험에 빠진 자회사를 살리는 효과가 있지만, 장기적으로는 두 대기업 집단에 대한 시장의 신뢰가 사라지는 부작용을 감수해야 할 것이라 보고 있다. 시장 기대치를 크게 뛰어넘는 수익성이 확보되기 전까지는 투자자들의 불만이 주가를 오랫동안 짓누르게 될 것이라는 설명이다. 대주주들의 이익을 위해 소액주주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대주주들이 처벌조차도 받지 않는 상황이 계속되면 결국 한국 시장에 대한 투자자들의 기대가 식을 수밖에 없지 않냐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