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 엔진 꺼졌나” 獨 또 역성장, ‘유럽의 병자’ 재확인
獨, 올해 성장률 전망 -0.2%로 하향,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
제조업 성공 모델에 안주한 독일, 디지털 전환에도 실패
中 경제 부진·러-우戰·인플레·고령화 등 겹악재까지
한때 ‘유럽의 엔진’이라 불리던 독일 경제가 심상치 않다. 제조업과 수출 기반이 탄탄했던 경제가 디지털 경제 시대에 힘을 잃고 저성장의 늪에 빠졌다. 선진국 중 유일하게 역성장을 맞은 독일의 경기 침체가 장기화할 것이란 우려가 커지는 가운데, 독일이 다시 ‘유럽의 병자(Sick man of Europe)’로 전락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과거 강점이었던 수출 중심 경제 모델이 글로벌 무역 환경 변화와 지정학적 불확실성 속에서 약점으로 작용한 결과다.
독일, 올해도 역성장 공포
9일(현지시간) 로버트 하베크(Robert Habeck) 독일 부총리 겸 경제기후보호부 장관은 올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 전망치를 기존 0.3%에서 -0.2%로 하향 조정했다고 발표했다. 정부가 제시한 성장률 -0.2%는 최근 독일경제연구소(DIW), 킬세계경제연구소(IfW) 등 5개 싱크탱크들이 공동으로 내놓은 수정 전망치 -0.1%도 하회한다.
독일 경제는 코로나19 팬데믹 직후인 2020년에 전년 대비 -3.8% 성장한 뒤 2021∼2022년 회복세를 보이다 지난해 다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지난해 주요 7개국(G7) 중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의 역성장 전망서를 받아든 곳은 독일이 유일하다.
이런 가운데 독일은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마이너스를 벗어나지 못하면서 2년 연속 역성장을 기록할 전망이다. 이는 2002년~2003년 이후로는 처음이고 1990년 동서독 통일 이후론 두 번째다. 당시는 1990년대와 2000년대에 걸쳐 경기 침체가 장기화되면서 독일이 처음 유럽의 병자로 불리던 시기였다.
침체에서 벗어나기 시작한 건 유럽연합(EU) 공식 통화인 유로를 도입하면서부터다. 과거 마르크를 사용할 때보다 평가절하된 유로를 사용하면서 임금 삭감 효과가 생겼고, 생산품 가격이 내려감에 따라 수출 경쟁력도 갖게 됐다. 그 결과 독일은 그리스를 비롯해 포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 이탈리아가 국가부채로 휘청거리던 2010년에도 성장률 3.6%를 기록하는 등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
러우 전쟁·중국 경기 침체에 발목
유럽의 맹주로 군림하던 독일이 저성장 국면에 돌입한 것은 단기에 해결될 수 없는 복합적이고 구조적인 요인과 맞물려 있다. 대표적인 요소가 에너지 문제다. 독일은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치솟은 에너지 가격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간 독일은 원전을 폐기하고 러시아-독일 간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인 노르드스트림(Nord Stream)을 통해 러시아산 가스를 공급받았는데, 2022년 파이프라인 폭파 사건으로 인해 에너지 위기에 직면한 것이다. 이미 원전을 폐기한 상태에서 독일 경제를 지탱해 온 값싼 에너지까지 잃게 되자 독일은 그야말로 직격탄을 맞았다. 산업용 전기요금은 G7 국가 평균의 2.7배로 치솟았고 이는 기업의 제조원가 상승, 수출경쟁력 저하를 야기했다.
중국의 경제 부진도 독일 저성장의 주요인이다. 오랜 기간 중국은 독일의 최대 무역 상대국이었지만 올해 그 자리는 미국에 돌아갔다. 전문가들은 미중 갈등이 촉발한 중국의 경기 위축이 자국 브랜드 소비를 이끈 결과라 보고 있다. 특히 전기차를 중심으로 중국이 자체 생산 비중을 확대하면서 독일의 대중국 수출이 감소했다. 더욱이 최근에는 BYD 같은 중국 기업들이 저렴한 전기차를 내세워 본토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독일 차를 위협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만 이는 독일 내부의 구조적 문제에 기인하는 바도 크다. 자동차 중심의 탄탄한 제조업으로 성공한 과거 모델에 안주해 인공지능(AI) 등 신성장 동력 투자를 소홀히 한 것이다. 자동차, 화학, 기계 등 제조업은 독일 성장의 견인차였고, 경쟁력의 상징인 ‘메이드 인 저머니(Made in Germany)’를 대표해 왔다. 그러나 제조업 중심의 독일 경제는 시대의 변화에 따른 산업의 다각화와 디지털 경제로 재편되는 새로운 환경에 편승하지 못했다. 이렇다 보니 여전히 1800년대 프로이센 시절의 중심산업이 현재도 독일의 중심산업이며 ‘디지털 후진국’이라 자조할 만큼 신사업 영역에서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 실제로 세계 100대 정보통신기술(ICT) 기업 중 독일 기업은 SAP가 유일하며, 글로벌 이커머스 시장에서도 독일 플랫폼의 존재는 미미하다.
여기에는 첨단 기술 육성에 필요한 정부 투자에 자체적으로 ‘헌법 족쇄’를 채운 점이 걸림돌로 작용했다. 독일 정부는 2009년 경기 침체 시기를 제외하고 GDP의 최대 0.35%까지만 재정적자 허용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이로 인해 독일의 공공투자는 선진국 중 최하위권으로 주저앉았다. 그나마 마련한 R&D(연구개발) 예산마저도 AI나 반도체 등 첨단 산업 분야에는 제대로 투자도 못하고 있다. 대부분 산업 구조가 자동차 산업 중심으로 짜여 있다 보니 신규 R&D 지출도 결국 자동차 연관 업종으로 퍼져나가는 악순환이 반복되고 있기 때문이다.
노동력 부족으로 중심 산업 쇠퇴 전망
더 큰 문제는 독일 경제의 장기 전망이다. 독일은 낮은 출생률(2022년 기준 1.46명)로 인한 노동력 부족이라는 근본적인 문제에도 직면해 있다. OECD에 따르면 독일은 향후 12년 동안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로 2035년까지 노동자 700만 명을 잃게 된다. 이에 대해 독일 경제부는 숙련 노동자 부족이 기업의 성장 잠재력에 직접적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우려했다. 특히 연구·개발(R&D) 투자나 설비는 탄탄하지만 이를 다룰 고급인력이 부족해 독일의 성장 가도를 막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다고 봤다. 2045년까지 탄소 중립을 이루겠다는 목표 또한 관련 분야의 숙련된 노동자 없이는 달성할 수 없다.
독일 경제 전망을 어둡게 하는 또 다른 문제는 뿌리 깊은 관료주의다. 독일 엔지니어링연합 의뢰로 중소기업연구소가 진행한 연구를 보면, 독일의 한 중소기업은 모든 행정 의무 준수를 위해 매출의 3.2%를 지출하고 있다. 이는 70만 유로(약 10억원)에 달하는 규모로 중소기업 정규직 직원 10명을 고용할 수 있는 금액이다. 이 같은 독일의 관료주의는 과거 기업에 안정적이고 예측 가능한 경영 환경을 조성해 준 측면도 있지만, 현재는 글로벌 경쟁에서 기업 발목만 잡을 뿐이다.
이런 가운데 일부 기업이 높은 인건비, 에너지 비용, 세금 부담, 정치적 혼란 등을 이유로 생산시설 해외 이전을 검토하고 있어 산업 쇠퇴 우려도 한층 커지는 모양새다. 지난달 폭스바겐이 독일 내 공장 폐쇄를 고려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며 우려를 키웠고, 반도체 기업인 인텔은 독일에 300억 유로(약 44조3,000억원) 규모의 공장 건설 계획을 중단했다.
독일 정부는 최근 에너지 가격이 안정되고 있는 만큼 올해 경제가 개선세를 보일 것으로 기대하고 있지만, 경제지표들을 살펴보면 여전히 먹구름이 걷히지 않은 모습이다. 소비자 수요는 침체 상태고, 기업들은 중동 전쟁 등 지정학적 불확실성을 경계하며 투자를 미루고 있다. 이에 대해 하베크 장관도 “순환적 요인 때문만이 아니라, 구조적 요인이 훨씬 (경제 상황을) 더 어렵게 만들고 있다”며 수년간 누적된 숙련 기술인력 부족, 인프라 투자 부족 문제를 지적했다.
아울러 독일과 EU의 정치적 논쟁이 기업, 소비자들에게 명확한 나침반을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재정적자를 둘러싼 독일 정부와 EU 간 갈등이 성장에 도움이 되지 못하고 있음을 인정한 것이다. 실제로 회원국의 재정적자 한도를 제한한 EU 규제로 인해 독일 정부로선 성장을 위한 대대적인 경기 부양책을 취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독일에 ‘어젠다 2030’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경제 성장의 발목을 잡는 중장기적 원인을 제거하고 경제 체질을 전환하는 구조 개혁만이 최선의 수단이라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