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형 흑자’에 경기 불황 두려움 느낀 투자자들, MMF로 뭉칫돈 대거 쏠려
1년간 이어진 MMF 쏠림 현상 불황형 흑자가 원인으로 꼽혀 시중 유동성 묶이면 설비 투자 안되고 향후 디플레이션 압박까지 우려돼
최근 국내 MMF(Money Market Fund) 잔액이 급격히 증가하는 추세다. MMF란 단기금융펀드로도 불리는데, 보통 금융사는 MMF를 통해 고객들로부터 자금을 조성 받고 1년 이내의 단기 우량채권에만 투자한다. 이를 통해 투자자들은 시중금리 변동에 크게 영향받지 않고 비교적 안정적인 수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물론, 언제든 수수료 없이 환매할 수 있다.
MMF는 투자자들의 시장에 대한 기대치를 엿볼 수 있는 일종의 시장 지표다. 만약 투자자들 사이에서 미래 경기에 대한 시각이 낙관적이라면, MMF의 규모는 줄고, 시중 유동성은 국채, 주식 등 다른 자산으로 이동하게 된다. 반면 경기에 대한 시각이 회의적이라면, 안전 자산으로 취급되는 MMF로 시중 유동성이 몰리게 된다.
전문가들은 2개월 연속 이어지고 있는 불황형 흑자가 투자자들로 하여금 경기에 대한 시각을 회의적으로 만들고, MMF로 뭉칫돈을 몰리게 했다고 분석한다. 문제는 불황형 흑자가 계속되면 수출 기반 산업, 즉 제조업 산업의 펀더멘탈을 갉아먹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면 제조업의 미래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한 투자자들이 제조업 및 설비에 투자하지 않고 MMF에 다시 돈을 묶어두는 악순환이 반복될 우려가 존재한다. 제조업 및 설비투자가 이뤄지지 않으면 기업의 생산량이 떨어져 향후 기업 실적도 나빠지게 된다.
기관들, 단기성 금융시장인 MMF로 자금 옮겨
금융투자협회가 9일 공개한 데이터에 따르면 7일 기준으로 국내 MMF 총잔액은 189조5,778억원으로 지난 6월 말 대비 2개월 만에 22조3,089억원으로 껑충 뛰었다. 작년 말 기준 MMF 잔액은 150조원을 조금 웃돌았으나 현재는 200조원 턱밑까지 증가한 셈이다.
시장은 뚜렷하게 양쪽으로 갈라지는 모양새다. 실제 한국은행이 발표한 ‘7월 중 금융시장 동향’에 따르면 7월 은행의 수시입출금 통장 잔액은 6월 대비 36조6,000억원 급감한 반면, MMF 잔액은 동기간 15조1,000억원 증가했다. 미국 또한 MMF로 기관 투자자들의 뭉칫돈이 대거 쏠리고 있는 추세다. 미국 자산운용협회(ICI)가 공개한 데이터에 따르면 지난 2일 기준 미국 MMF 잔액은 약 5조5,000억달러(약 7,262조원)로 역대 최대 규모를 기록했다.
기관과 일부 개인투자자들의 투자 행보가 사뭇 다르게 나타나고 있는 부분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국내 MMF 잔액 중 90% 이상은 법인 자금으로 나타났다. 즉 기관의 자금 운용이 MMF에 집중되고 있단 얘기다. 반면 최근 금융시장에서 2차전지, 초전도체 등의 테마주에 이른바 ‘몰빵’으로 뭉칫돈을 투입한 일부 개인투자자 중 높은 변동성에 반대매매를 당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상황이다. 실제 지난 7일 기준 위탁매매 미수금 잔액은 5,810억원으로 올해 평균치에 해당하는 3,393억원보다 높게 나타났다. 동일한 맥락으로 2차전지 테마주 주가가 대거 출렁이면서 지난 8월 1일부터 7일까지의 반대매매 규모는 2,712억원에 이르렀고 7일 단 하루에만 544억원이 강제 청산된 바 있다.
불황형 흑자에서 비롯된 향후 경제 회의론이 MMF ‘머니 무브’의 배경
이처럼 기관 중심으로 MMF에 자금이 대거 쏠리고 있는 것은, 불황형 흑자로부터 비롯된 국내 경기 침체 가능성에 기업들이 향후 투자로 거둘 기대 수익을 회의적으로 전망하고 단기 금융상품에 현금을 묶어놓고 있기 때문이다. 실례로 우리나라는 지난 6월 1년 4개월 만에 처음 무역 흑자로 전환된 이후 7월까지 2개월 연속 흑자 행진을 이어 나가고 있지만, 이에 전문가들 사이에선 수출보다 수입이 감소한 전형적인 불황형 흑자라는 분석이 나온다.
특히 지난 7월 1일 산업통상부가 발표한 ‘6월 수출입 동향’에 따르면 6월 수출액은 542억4,000만 달러로 작년 동기 대비 6% 줄어든 데다, 월간 수출의 경우 지난 10월부터 9개월 연속 줄어들었다. 이는 중국의 반도체 수요가 미국의 반도체 및 AI 규제로 줄게 되면서, 중국에 크게 의존하는 우리나라 반도체 수출이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다. 즉 미국의 영향으로 중국의 반도체 설비 투자 규모가 급감하고, 이에 따라 중국에 반도체 장비를 납품하는 한국 기업의 실적이 크게 줄었다는 설명이다.
반면 6월 수입액은 531억1,000만 달러로 지난해 동기 대비 11.7% 감소했다. 이는 올해 초부터 시작된 중국의 리오프닝 효과가 제약적으로 나타나면서 당초 가격이 오를 것으로 전망됐던 원유, 구리, 철광석 등의 원자재 가격이 예상 밖의 하락세에 놓였고, 이에 따라 우리나라의 에너지 및 원자재 수입액 감소 현상을 이끌었기 때문이다.
설비 투자 1년간 외면한 시장 투자자들, 향후 디플레이션 압박으로 돌아올 가능성 존재해
문제는 이같은 불황형 흑자가 장기화 될 가능성이 높게 점쳐진다는 것이다. 연원호 대외경제정책연구원 경제안보팀장은 “미중 갈등, 그린 전환, 보호주의, 디지털 전환 등 경제 블록화 움직임이 하반기에도 이어질 예정이라 우리나라 수출의 어려움이 계속될 전망이다”라고 밝혔다.
대표적인 이유로 현재 미중 패권 경쟁이 격화되고 있는 가운데, 중국은 자국 산업을 육성하면서 사실상 한국과 ‘경쟁’ 관계로 돌아선 것을 들 수 있다. 그간 한국은 중국에 반도체를 포함한 중간재를 수출하고 중국이 완제품을 만들어 전 세계로 수출해 상호 이익을 도모했던 관계였으나, 미국의 규제로 인해 한국의 중간재 수출이 막히면서 대중국 무역적자가 심화됐다. 이렇게 되면 불황형 흑자로 인해 시중 유동성이 MMF에 더욱 오래 묶여, 국내 민간 소비와 설비 투자 또한 저조해질 수밖에 없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올 하반기까지 불황형 흑자가 계속된다면 민간 소비는 0.4% 느는 데 그치고, 설비투자는 지난해 동기 대비 11.1% 줄어들 것”이라고 밝혔다.
심지어 이같은 MMF 쏠림이 사실 올해 초부터 이어져왔던 것도 우려스러운 대목이다. 금융투자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국내 MMF 규모는 153조3,000억원 이었으나, 올 1월엔 약 40조원이 오른 193조원로 뛰었고 이후 올해 들어 작년 대비 계속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즉 이는 최소한 올 상반기엔 MMF에 시중 유동성이 묶여 있었고, 기업 제조업 및 설비 투자에는 소홀했다는 방증으로 이해할 수 있다.
만약 불황형 흑자가 전문가들 예상대로 올 하반기까지 장기화되면, 앞서 살펴본 논리대로 경기 침체로 불안을 느낀 기업들이 시중 유동성을 MMF로 약 1년간 묶어 두고 있게 되는 셈이고, 나아가 기업의 비교적 중장기 투자 결정인 제조업 및 설비 투자에는 최소 1년간 구멍이 생기게 되는 셈이다. 이렇게 되면 올 하반기 이후 우리나라가 경기 침체 사이클에서 벗어나려고 하더라도 설비 투자를 제대로 받지 못한 기업이 생산량 부진에 시달려, 다시금 인플레이션으로 접어들게 될 우려가 존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