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중갈등] 美 상무장관 “디커플링 아닌 디리스킹이다”, 中 달래기
일관적인 中에 대한 美 태도, ‘디리스킹’ 전문가들, “美中 디커플링은 글로벌 부정적 파급효과 불러와” 韓, 극단적인 디커플링이 아닌 올바른 디리스킹이 요구되는 시점
중국을 찾은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이 현재 미국의 반도체과학법(CHIPS·칩스법), 인플레이션감축법(IRA) 등 중국을 향한 일련의 지정학적 움직임은 ‘디커플링(탈동조화)’가 아닌 ‘디리스킹(위험 제거)’일 뿐이라고 선을 그었다. 이는 그간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권 인사들이 중국과의 관계에 대해 표명했던 일관적인 입장과도 부합한다.
다만 전문가들은 미국이 글로벌 첨단 산업 굴기를 이어가려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해 디커플링 대신 반도체 및 배터리 산업에 대한 ‘국소적’인 압박을 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하고 있다.
한편 대중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 또한 미·중 기술 패권 경쟁으로 인한 부정적 파급효과가 적잖게 와닿고 있는 만큼, 중국과의 적절한 디리스킹 작업이 절실히 요구되는 시점이다.
러몬도 미 상무장관 방중, 악화된 미·중 관계 회복의 물꼬 트나
외신 보도에 따르면 지나 러몬도 미국 상무장관은 27일(현지 시간) 중국 베이징에 도착해 나흘간의 방중 일정을 시작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러몬도 장관은 이번 방중을 앞두고 “우리는 중국과의 안정적인 상업적 관계를 원한다”며 “충돌을 피하면서 서로 협력할 수 있는 핵심은 정기적인 의사소통에 있다”고 밝혔다.
다만 그는 “국가 안보에 관한 우리는 양보하지도, 타협하지도 않는다”면서도 “우리가 반도체 투자를 키우고 있는 것이 곧 중국 경제와 디커플링하고 싶다는 뜻은 전혀 아니다”고 밝혔다. 그간 미국 행정부가 중국 견제를 위해 발효한 법안과 행정 명령이 결코 디커플링이 아닌 디리스킹 조치의 일환이었다는 것을 다시금 못 박은 셈이다.
이번 방중 기간 동안 러몬도 장관은 미·중 양국 간 소통 강화는 물론 희귀광물이나 첨단 반도체 등 상대국을 겨냥한 수출 제한 조치 완화 등 현안에 대해 논의할 것으로 분석된다. 또한 여행이나 관광 분야에서 양국 협력과 무역 관행에 대해서도 논의할 것으로 보인다. 이에 러몬도 장관은 “양국 관광이 2019년 수준으로 돌아간다면 미국에 300억 달러(약 40조원)의 경제 효과와 5만 개 일자리 창출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면서도 “무역과 관련해선 중국의 불공정한 무역 관행이 미국 노동자들과 회사에 피해를 입히고 있다”고 주장했다.
중국과의 전면적인 단절이 아닌, 상대적·기술적·부분적·제한적 디커플링이다
전문가들은 이번 러몬도 장관의 방중과 발언들을 근거로 삼아 그간 미국이 중국에 가해왔던 일련의 정책적 움직임들이 결국 절대적 디커플링(absolute decoupling)가 아닌 상대적 디커플링(relative decoupling)에서 비롯됐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미국이 중국을 완벽하게 글로벌 경제에서 배격하는 게 아닌, 일부 핵심 첨단 산업에 대해 중국의 추격을 따돌리고 격차를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그림을 짜오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미국이 5G, 반도체, AI, 배터리 등의 핵심 산업, 원자재 및 중간재 수급에 한해서만 국소적으로 대중국 의존도를 줄이고 동맹국 및 우방국 중심의 공급망 다변화를 꾀하고 있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결론이다.
실제 지난 7월 국제통화기금(IMF)의 세계무역통계(DOTS)에 따르면 코로나19 엔데믹 국면으로 진입 후 미중 무역은 ‘절대적 디커플링’이라는 기존 글로벌 고정관념과는 달리 2020년부터 3년 연속 증가했으며, 2022년에는 사상 최대인 7,615억 달러(약 1,008조원)를 기록했다. 또한 코로나19 발생 이전인 2018년에 비해 2022년 미국의 대중국 수입은 21.18%, 수출은 14.53%로 오히려 증가했다. 즉 미국은 중국의 세계 최대 소비국이며, 양국 간 경제적 상호 의존도 역시 여전히 높다는 얘기다.
이로 인해 일부에선 미국의 대중국 공급망 디커플링을 ‘기술적 디커플링(technology decoupling)’, ‘부분적 디커플링(partial decoupling)’, 또는 ‘제한적 디커플링(limited decoupling)’ 등으로 지칭하기도 한다. 미국이 추구하는 대중국 디커플링이 결국 양국 간 전방위적인 교역과 투자에 대한 규제가 아니라 첨단 산업 기술의 기반이 되는 ‘반도체만’을 기술패권 경쟁의 전장으로 삼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일방적인 기술 이전과 유출, 시장의 폐쇄성으로 인한 불공정 경쟁 문제를 빌미로 삼은 미국은 칩스법과 IRA 등을 통해 중국에 대한 반도체 및 배터리 기술 통제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변화와 혁신의 토대가 되는 산업을 통제함으로써 불공정한 경쟁 요인을 제거하는 것은 물론, 중국의 글로벌 영향력 확장을 제어하기 위해서다. 다만 미국의 이같은 지정학적 움직임은 반도체 및 배터리에 국한돼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미국 정치권이 수 차례 강조한 ‘디리스킹’
이처럼 미국이 중국에 대해 일부 핵심 산업에서만 국소적인 디커플링 움직임을 취하고 있다는 논리는 사실 이번 러몬도 장관의 방중 이외에도 최근 들어 미국 측 정치 인사들이 미중 공급망 경쟁을 디커플링으로 표현하는 것을 자제하고 있다는 점을 통해 수 차례 확인할 수 있었다.
실례로 재닛 옐런 미국 재무장관은 지난 7월 나흘간의 중국 방문 일정을 마무리하는 기자회견을 통해 “미중 간 디커플링을 추구하지 않는다”며 “디커플링과 공급망 다양화는 분명히 구별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디커플링은 세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실행할 수도 없다”고 힘줘 말했다. 즉 중국에 대한 디커플링이 곧 자국 및 우방국의 피해로 돌아올 가능성이 농후한 만큼, 미국은 국가안보 차원에서 미국의 전략 기술에 대해 중국의 접근을 막는 디리스킹만 취했다는 것을 분명히 한 셈이다.
동일선상에서 지난 4월엔 제이크 설리번 미국 국가안보보좌관이 “미국은 디리스킹과 다변화를 추구하는 것이지 중국을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것이 아니다”라고 선을 그었다. 아울러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도, 앤소니 블링컨 국무장관도 각각 올해 5월 G7과 6월 기자회견에서 디리스킹과 디커플링의 차이를 분명히 인식해 줄 것을 지구촌에 당부한 바 있다.
미·중 디리스킹에 우리나라가 취해야 할 전략적 태도는
절대적 디커플링의 비현실성에 대해서는 글로벌 국가들이 대부분 동의하는 분위기다. 다만 전문가들은 철저한 디커플링은 불가능하더라도 우리나라 또한 공급망 다변화, 즉 디리스킹을 통해 한국 경제가 받게 될 충격은 최소화해야 한다고 조언한다.
현재 미국이 시행하고 있는 칩스법, IRA가 중국뿐만 아니라 우방국인 우리나라에도 부정적인 파급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대중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미중 기술 패권 경쟁으로 인한 타격이 여타 국가보다 더 크게 와닿고 있는 만큼 디리스킹 작업이 절실히 요구된다는 지적이다.
이와 관련 유럽 국가들을 포함한 기술 선진국들은 중국으로의 투자와 교류를 지속하면서 기술력을 앞세워 중국 시장 진출을 마다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들은 미국의 중국 ‘기술 견제’가 포함된 자유 시장경제체제 움직임에 동참하면서 현실적인 디리스킹 전략을 취하고 있다. 이에 우리나라도 생존과 경쟁력 강화를 위해 국제 관계에서의 단기적인 관점에서의 효과적 대응과 장기적 관점에서의 올바른 방향성을 모두 챙겨야 한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전문가들은 이를 위해 먼저 전략적으로 중요한 첨단 기술 수준을 확보할 것을 조언한다. 기술혁신 역량을 강화하고 경쟁력을 유지한다면 심화되는 미중 디커플링 위험 속에서 우리나라의 전략적 선택 범위를 넓혀줄 무기가 된다는 분석이다. 예컨대 칩스법은 미국 진출에 대한 보조금 지급을 빌미로 우리 제조업 기업으로 하여금 영업 기밀을 요구하는 등 미국이 ‘갑’으로 군림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같은 ‘불공정 거래’를 기술적 우위를 기반으로 한 재협상을 통해 타개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한 전문가들은 기술 선진국으로써의 위상을 공고히 다지는 한편 미·중 디리스킹으로 타격을 받는 입장이 유사한 EU, 일본, 호주, 대만 등과 전략적 협업 관계를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본다. 미국과 중국의 두 패권국가의 싸움에서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도록 여러 국가들이 연대한 공급망 사슬 구축을 도모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