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까지 헐어 빚 갚았는데, 다시 빚내러 은행 가는 기업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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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억원 초과 고액 예금 잔액 6개월 새 24조원 감소
회사채 발행 어려운 기업들은 ‘대출-상환’ 굴레
연체율·한계기업↑, 기업대출 건전성에 빨간 불

고금리가 이어지며 기존에 보유하던 예금 등을 해지하는 기업이 늘어나는 가운데 대출을 위해 은행을 찾는 기업도 함께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회사채 등 직접 자금을 융통하는 것이 어려워져 대출을 찾은 이들은 높은 금리와 대출한도 축소 등으로 높아진 은행 문턱을 실감하고 있다. 금융계에서는 기업대출 부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점점 커지는 금리 부담, 빚 갚는 게 최우선

2일 한국은행에 따르면 지난 6월 말 기준 은행의 저축성예금(정기예금·정기적금·기업자유예금·저축예금) 가운데 잔액이 10억원을 넘은 계좌의 예금액은 총 772조4.27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는 지난해 12월(796조3,480억원)보다 3%(23조9,210억원)가량 줄어든 수준이다. 2018년 500조원대에서 2019년 600조원대, 2021년 700조원대를 기록했던 10억원 초과 고액 예금 잔액은 올해 800조원을 돌파할 것이라는 예상을 뒤엎고 감소세에 접어들었다.

항목별로는 기업자유예금이 222조5,850억원으로 지난해 12월(219조8,000억원)과 비교해 소폭 증가했고, 정기예금은 538조816억원으로 같은 기간 25조7,300억원 줄어든 수준을 보였다. 저축예금 잔액 또한 11조5,250억원에서 10조5,380억원으로 감소했다.

이처럼 10억원 넘는 고액 예금이 감소세를 나타내는 현상은 기업들이 정기예금에서 자금을 인출해 대출 상환이나 회사채 상환 등에 사용하고 있는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지속적인 고금리에 막대한 금리를 감당할 수 없는 기업들이 늘며 저축보다는 부채 축소에 무게를 두는 기업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대출 여건은 꾸준히 악화하고 있다. IBK기업은행이 발표한 ‘2023년 금융실태조사’에 따르면 기업통계등록부상 매출액 5억원 초과 중소기업 4,500개사를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 ‘2022년 전반적인 차입여건이 2021년보다 부진하다’는 평가는 26.7%로 전년 대비 3.3%p 상승했다. 금리상승과 대출한도 축소 등이 중소기업의 대출 문턱을 높인 것이다.

지난해 중소기업의 신규 신용대출 금리가 평균 4.60%로 전년과 비교해 0.85%p 오른 가운데 업황이 다소 부진했던 건설업의 평균 신용대출 금리가 다른 업종보다 높게 나타나며 전체 평균 금리를 끌어올린 것으로 드러났다. 같은 기간 담보대출 금리(3.84%)는 0.72%p 상승했다. 은행이 담보를 요구한 비율은 23.4%로 해당 조사를 시작한 2015년 이후 가장 높은 수준을 기록했다. 기업은행 관계자는 “금리상승과 대출한도 축소 등이 중소기업의 차입여건을 악화하고 있다”며 “금융 애로 완화를 위한 전방위적 지원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악조건 속에서도 “은행 대출 아니면 방법 없어”

하지만 부진한 차입여건 속에서도 은행을 찾는 발걸음은 꾸준히 늘어나고 있다. 통상 은행 대출 금리는 회사채 금리보다 높아 기업 입장에서 선호하지 않는데, 절대적인 회사채 발행금리 상승과 업황 부진으로 인한 기업의 신용등급 하향 등이 맞물린 상황에서는 가장 현실적인 자금 융통 방안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회사채 시장은 지난 4월부터 8월까지 순상환 흐름을 보이고 있다. 8월 기준 회사채 순상환 규모는 1조8,500억원에 달했다.

기업들이 발걸음이 이어지면서 은행들이 기존 주 수익원이었던 가계대출 대신 기업대출을 위해 적극적인 영업에 나서자, 과당 경쟁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오고 있다. 은행들이 대외 수출이 지속 감소하고 있는 시장의 흐름 속에서 성장 가능성이 낮은 기업에도 경쟁적으로 대출을 늘리고 있기 때문이다. 향후 경기 침체기에는 은행들이 해당 부실자산을 대거 인수하는 사태가 벌어질 수 있어 은행권의 건전성에 큰 타격이 올 것이라는 주장이다. 한 시중은행 임원은 “은행들이 올해 기업여신을 공격적으로 늘리고 있는데 그중 상단 부분이 중소기업 대출로 파악된다”며 “실적도 중요하지만, 안정성을 갖춘 차주는 한정적이기 때문에 무리한 사업 확장은 일정 시간이 흐른 후 부실 위험으로 돌아올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자도 감당하기 어려운 기업 ‘수두룩’, 우려가 현실로

이같은 은행 건전성 위협에 대한 우려는 연체율 상승 등으로 현실화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국내 은행의 기업대출 연체율은 7월 말 기준 0.41%로 6월 말과 비교해 0.04%p 올랐다. 1년 전과 비교하면 0.17%p 뛴 수치다. 중소기업대출 연체율은 0.49%로 전월과 비교해 0.06%p 올랐고, 개인사업자대출은 같은 기간 0.04%p 증가한 0.45%를 기록했다.

이자를 감당하기 어려운 한계기업도 증가세에 있다. 지난 8월 말 기준 5대 시중은행이 한계기업에 대출해준 금액은 31조9,000억원으로 2019년 17조7,000억원과 비교해 80%(14조2,000억원)가량 늘었다. 한계기업은 해당연도를 포함한 최근 3개 연도의 이자보상배율이 1에 미치지 못하는 기업을 의미하는데, 이는 영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이익보다 은행 등에 갚아야 할 이자(금융비용)가 더 많다는 의미가 된다.

금융계 안팎에서 기업대출 부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자, 금융당국도 상황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최근 대출이 급증한 부문을 중심으로 은행권의 대출 현황을 중점적으로 점검하고 있다”며 “주요 산업의 영업 환경과 기업의 재무 상황을 적시에 파악해 신용 위험이 크다고 판단될 때는 적절한 대응책을 펼쳐야하기 때문에 신용위험 모니터링도 강화 중”이라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