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출 이자 내기에도 버거운 기업 속출, 은행 재정 건전성 관리에 ‘빨간 불’
3분기 무수익여신 '3조원' 목전, 총여신 중 0.22% 차지
은행 건전성 '위험 수준', 내년 상반기 심화 우려 커져
신용위험에 대한 선제적 대비책 마련 시급
전 세계적 경기 침체가 장기화한 가운데 이자조차 내지 못하는 기업이 크게 늘어난 것으로 나타났다. 원자재 가격 상승과 소비자들의 수요 심리 위축 등 영향으로 경영난에 시달리는 기업들의 소위 ‘깡통 대출’이 속출하고 있어 더 큰 부실 위험이 다가올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이자조차 못 낸 기업·가계 27.3% 급증
20일 금융계에 따르면 KB국민, 신한, 하나, 우리 등 4대 시중은행의 무수익여신 잔액은 지난해 말 2조2,772억원에서 올해 3분기 말 2조8,988억원으로 27.3% 늘었다. 같은 기간 총여신이 1,295조7,838억원에서 1,334조2,666억 원으로 3.0% 증가한 것과 비교하면 매우 가파른 증가세다. 총여신 중 무수익여신 비중은 이 기간 0.18%에서 0.22%로 확대됐다.
무수익여신은 상환 기간이 도래한 원금은 물론 이자조차 거두지 못하는 대출을 의미한다. 은행들은 3개월 이상 원금을 상환하지 못한 대출에 이자 미계상 여신을 추가 반영하는 방식으로 무수익여신 잔액을 산출하며, 무수익여신은 고정이하여신보다 은행의 재정 건전성에 더 큰 악영향을 미친다.
이같은 무수익여신은 가계대출보다 기업대출에서 더 심각한 수준으로 나타났다. 4대 은행의 기업대출 부문 무수익여신은 지난해 12월 1조5,310억원에서 올해 3분기 1조9,754억원으로 29.0% 증가했다. 일부 은행의 경우 50%가량 폭증한 경우도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가계대출 부문 무수익여신 역시 23.7% 증가(7,462억원→9,234억원)했다.
가계대출 전체 잔액도 가파른 증가세를 그리고 있다. 4대 은행과 농협에 따르면 이달 16일 기준 가계대출 잔액은 689조5,581억원으로 10월 말 686조119억원과 비교해 3조5,462억원 늘었다. 이같은 증가세는 올해 가장 가파른 증가 폭을 그렸던 10월의 증가분(3조6,825억원)을 불과 2주 만에 따라잡은 결과다. 부문별 대출 잔액은 전세대출이 2,135억원 줄어드는 동안 주택담보대출과 개인신용대출이 각각 3조4,175억원과 3,107억원 증가했다. 당초 주담대 금리가 상승세를 보이면서 대출 수요가 다소 주춤할 것으로 예상됐지만, 보금자리론을 비롯한 각종 정책 대출이 크게 늘며 전체 가계대출의 증가로 이어졌다.
정부는 연내 추가 대출 규제 방안을 발표하는 등 실수요 자금 외 가계대출 공급을 줄여나간다는 계획이다. 금융위원회 관계자는 “대출 규제를 강화하면 가계 부담이 막중해지고 소비가 얼어붙을 수 있어 신중히 접근해야 한다”며 “전체 대출 중 가계부채 비율은 일정 수준 이하를 유지하고 있는 만큼 부채 총량보다는 증가 속도를 조절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말했다.
만기 도래한 코로나19 정책 금융, 부실 위험 키우나
가계대출 급증과 무수익여신 증가가 맞물리며 시중 은행의 재정 건전성에도 적신호가 들어왔다. 실제로 금융권에 따르면 5대 시중은행은 올해 상반기에만 2조2,130억원어치의 부실 채권을 상각 또는 매각했다. 이는 지난해 상반기(9,907억원)와 비교해 2.23배의 규모일 뿐만 아니라 지난해 전체 부실 채권 매각 규모(2조2,713억원)와도 맞먹는 수준이다. 가파른 금리 상승에 적응할 시간적 여유가 없었던 다수의 기업이 한계에 직면한 결과로 풀이된다.
은행은 3개월 이상 원리금이 상환되지 않은 대출을 부실 채권으로 분류해 별도 관리하는데, 이후로도 회수 가능성이 현저히 낮다고 판단되면 이를 상각 또는 매각한 후 대차대조표상 보유 자산에서 제외한다. 이는 겉으로 보이는 연체율이나 고정이하여신 비율(NPL)이 낮아지는 효과를 불러올 수 있지만, 은행의 건전성은 더 크게 악화함을 의미한다. 장부상의 단기적 기록과는 별개로 중장기적으로는 더 많은 충당금을 쌓아둬야 해 은행의 수익성에 타격을 줄 수밖에 없는 구조다.
업계에서는 내년 상반기가 부실채권 급증의 분수령이 될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지난 9월부터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에 대한 대출 만기 연장 및 원금·이자 상환유예 제도를 비롯한 코로나19 금융지원 정책들이 하나둘 만기를 맞고 있기 때문이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분기 말에 주로 진행되는 연체 채권 상·매각으로 연체율이 하락한 것으로 보일 수 있지만, 실질 연체율은 계속 상승하고 있다”고 지적하며 “경기가 회복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어 코로나19 금융지원 종료의 여파도 조금씩 수면 위로 떠오를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사고 후 수습’에 성공, 한국은?
세계 1위의 경제 대국 미국에서 재정 건전성 악화를 이유로 다수의 은행이 파산한 전례가 있다는 점도 이같은 우려를 키운다. 가장 최근의 사례로는 지난 3월 파산한 실리콘밸리 최대 상업은행이자 자산규모 기준 미국 16위의 실리콘밸리은행(SVB)을 꼽을 수 있다. SVB는 그간 수신 예금의 상당 부분을 미국 장기국채에 투자해 왔는데, 금리급등 시기에 대규모 평가손실이 발생하자 은행의 재무 건전성 훼손으로 직결됐다. SVB는 폭증하는 예금인출 요구를 견디지 못해 파산을 선언했고, 결국 SVB의 파산은 전형적인 유동성 관리 실패 사례로 꼽히며 전 세계에 충격을 안겼다.
SVB 파산 직후인 12일에는 뉴욕에 본사를 둔 시그니처은행마저 파산하며 미국 시장이 사상 최악의 혼돈을 맞기도 했다. 미국 금융당국은 은행의 파산이 전체 시장의 위기로 확산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신속히 예금자 보호 한도를 확대하고, 은행의 유동성 확보를 위해 담보부 대출을 실시했다. 미 재무부의 막강한 지원과 금융당국의 발 빠른 대처는 사태 해결에 상당한 효과를 가져왔다.
다만 미국과 같은 ‘사태 발생 후 수습’이 우리나라에서도 효과를 거둘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국내 시중 은행의 재정 건전성은 가계부채의 급증과 기업부채의 부실화, 부동산 경기침체에 따른 부동산 프로젝트파이낸싱(PF) 부실화 등 여러 요인이 맞물려 빠른 속도로 악화하고 있기 때문이다. 은행의 대손충당금 적립 의무 강화 등 증가하는 신용위험에 대한 선제적 대비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