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반도체법에 위기 맞는 삼성전자와 HBM으로 반도체 1등 도약 준비하는 SK하이닉스
미국 반도체법 지원 기업 리스트에 빠진 삼성전자, 텍사스 파운드리 공장 건설에 재무적 부담 우려 SK하이닉스는 아직 공장 부지 선정 단계, 기술 우위에 있는 HBM이 AI반도체의 핵심으로 떠올라 협상력은 더 커져 전문가들, Nvidia - SK Hynix 연합이 공고해질수록 HBM의 시장 지배력 강화될 것 전망
미국 정부가 반도체법 지원 기업 리스트에 자국 기업들만 올려놓은 상태에서 한국의 삼성전자와 대만의 TSMC가 대상에서 제외되는 것이 아닌가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이미 미국 텍사스주 테일러시에 진행 중인 파운드리 공장 건설이 상당 부분 진행된 상태에서 지원이 중단될 경우, 2023년 내내 영업적자를 본 것에 이어 추가적인 재무 부담이 있을 것이라는 우려다. 이달 초 삼성전자 경계현 사장이 미국 출장 중 미국 정부와 반도체 보조금 협상을 진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면 SK하이닉스는 2월 들어 인디애나 주에 공장 부지를 막 선정한 상황이라 오히려 반도체법 리스크를 피할 수 있다는 반응이다. 이어 지난 2023년 4분기부터 흑자로 돌아선 점과 AI반도체의 핵심 부품 중 하나인 HBM 시장에서 삼성전자보다 한 발 더 앞서고 있는 상황이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 간 반도체 시장 서열에 영향을 줄 수도 있다는 견해도 흘러 나온다. AI반도체 시장에서 절대적 우위를 점하고 있는 엔비디아(Nvidia)와 HBM 시장에서 글로벌 시장 선두를 달리고 있는 SK하이닉스는 미국 반도체법 지원 대상 리스트에 반드시 포함될 것이라는 기대가 크기 때문이다.
‘최초’에 욕심 못 내던 SK하이닉스, HBM이 회사 체질을 바꾸고 있다
업계 관계자들에 따르면 SK하이닉스는 ‘최초’라는 표현을 쓰기 꺼려했던 회사로 알려져 있다. D램과 낸드 시장에서 만년 2위 입장에서 글로벌 선두 업체인 삼성전자가 자칫 가격 공세에 나설 경우 영업 이익률이 크게 떨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 급격히 관심이 쏠리고 있는 고대역폭메모리(HBM) 기술에서 삼성전자보다 한 발 더 앞선 상태라는 시장의 평가가 나오기 시작하면서 SK하이닉스의 회사 내부 사정도 크게 바뀌었다. 인공지능(AI) 반도체의 핵심 메모리 부품으로 꼽히는 HBM에서 삼성전자가 기술적 격차를 좁히지 못하는 사이 시장을 빠르게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해 3분기 실적 컨퍼런스 콜에서 이미 2024년 HBM3과 HBM3E 생산량이 모두 매진됐고, 고객 추가 문의가 들어오고 있다고 밝혔던데다, 증권가에서는 생산 설비를 추가한 상태에서 2025년 물량도 올 상반기 중 매진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
HBM 시장에서 SK하이닉스가 한 발 더 앞서나갈 수 있었던 것은 지난 2010년대 초반부터 닌텐도와 시작한 그래픽 카드 전용 메모리 개발 사업에서 시작한다. 그래픽 카드에 시장의 관심이 쏠리기 시작한 것은 AI업계에서 텐쏘플로우(TensorFlow), 파이토치(PyTorch) 등의 그래픽 카드 계산 기능을 이용한 계산 알고리즘이 도입되기 시작한 2016년부터였던 점을 감안하면, 당시 HBM의 초기 모델은 실험적인 사업에 불과했으리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돈 안 되던 HBM이 어느새 회사 체질 바꾸는 효자 상품으로
최초 HBM이 출시됐던 2013년 당시에는 콘솔 게임 업체나 게임 그래픽 카드 업체에 대응하는 물량만 생산해야 했던 탓에 수익성이 나지 않았던 사업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범용 게임 그래픽 카드에서는 여전히 GDDR4, GDDR5 등으로 알려진 그래픽 카드 전용 메모리 카드가 대세였고, HBM은 특수 게임 그래픽 카드에만 사용됐기 때문에 시장의 관심도 낮았다. 시장 규모가 작았기 때문에 삼성전자가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던 반면, 시장의 2위 업체였던 SK하이닉스는 좀 더 실험적인 사업에 뛰어들 수 있었던 것이다.
지난 2016년부터 AI 계산을 위한 그래픽 카드 기반의 개발자용 라이브러리가 쏟아져나오다 2020년대 들어서 미국 정부가 AI반도체 지원에 적극 나서면서 상황은 급변했다. AI반도체 성능을 결정하는 두 가지 요소 중 하나인 계산 모듈은 Nvidia에서 여전히 절대적인 시장 우위를 점하고 있지만, 메모리 카드의 성능을 높여주는 부분에서는 SK하이닉스의 HBM이 시장 내에서 가장 앞선 기술을 가진 상품이 됐기 때문이다.
삼성전자는 6세대 HBM인 HBM4 개발에 뛰어들면서 격차를 따라잡겠다는 방침이다. 내년부터 샘플링 작업에 착수하고, 내후년에는 본격적인 양산에 들어갈 채비를 마쳤다. HBM에 대한 시장 관심이 집중되자 미국 마이크론도 5세대 제품인 HBM3E 시제품 출하를 마친 상태고, 올해 하반기부터 HBM3E를 본격적으로 시장에 내놓겠다고 밝혔다. SK하이닉스가 선점한 HBM 시장에서 글로벌 1, 3위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이 추격전을 벌이는 묘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Nvidia – SK Hynix 연합, 당분간 시장 이끌 것 전망
전문가들은 이미 AI반도체의 극심한 전력 소모가 향후 AI반도체 시장 개편의 중요한 요소가 될 것으로 내다본다. AI반도체가 시장의 주력 상품이 되기에는 ‘전성비(전력 대 성능비)’가 매우 나쁘기 때문이다. 때문에 AI반도체 업계에 뛰어드는 신규 진입 기업들은 저전력 시스템이라는 점을 크게 강조한다. 이미 데이터 센터들이 전성비를 따져가며 설계한 시스템을 판매하고 있고, 삼성전자는 HBM과 유사한 기능을 제공하는 저전력 시스템인 ‘컴퓨트 익스프레스 링크(CXL)’을 히든 카드로 준비 중이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이미 HBM에 맞춘 AI 계산용 컴퓨팅 라이브러리가 일반화 된 만큼, CXL이 호환성을 제공하기 위해 삼성전자가 막대한 소프트웨어 개발 비용을 추가로 투자해야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업계 관계자들은 미국 정부가 중국 수출을 차단하면서까지 AI반도체 개발에 지원금을 쏟아 붓고 있는 점, SK하이닉스가 HBM 글로벌 시장 점유율 1위(50%)를 달리고 있는 점, 생성AI 전용 GPU 시장을 사실상 독점하고 있는 엔비디아와 성공적으로 파트너 관계를 구축한 점 등을 들어, 당분간 HBM의 시장 지배력이 강화될 것으로 예상되는 만큼, SK하이닉스가 삼성전자보다 더 빨리 반도체 ‘다운 사이클(Down cycle)’을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예측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