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숨통 옥죄는 가계부채 리스크, 길 잃은 정부
가계부채 누적에 신음하는 한국, 가계부채 비율 '줄어도 1위' 부동산 중심으로 불거진 가계부채 위기, 금융위기로 번진다 한국은행과 엇나가는 정부 금융 정책, 리스크 해소에 집중해야
한국의 GDP(국내총생산)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전년 대비 감소한 것으로 확인됐다. 이어지는 고금리 기조 및 부동산 경기 침체가 가계부채 증가세에 제동을 건 것으로 풀이된다. 한편 전문가들은 우리나라의 가계부채 비율이 여전히 세계 1위 수준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일시적으로 가계부채 비율이 줄었다고 해서 한국 경제의 ‘경착륙’ 위험이 사라진 것은 아니라는 지적이다.
한국, GDP 대비 가계부채 비율 세계 1위
국제금융협회(IIF)가 최근 발간한 ‘세계 부채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기준 한국의 GDP 대비 가계 부채 비율은 세계 33개 국가(유로 지역은 단일 통계) 중 1위였다. 100.1을 기록하며 가계 부채가 GDP를 웃도는 유일한 국가로 이름을 올린 것이다. 이는 홍콩(93.3%)·태국(91.6%)·영국(78.5%)·미국(72.8%) 등 여타 국가 대비 눈에 띄게 높은 수준이다.
주목할 만한 부분은 가계부채 비율이 전년 대비 하락했다는 점이다. 한국의 가계부채 대비 GDP 비율 하락 폭은 -4.4%p(104.5→100.1%)로 영국(-4.6%포인트)에 이어 두 번째로 컸다. 한국의 가계부채 비율이 정점을 기록했던 2022년 1분기(105.5%)와 비교하면 5.4%p 낮은 수준이다. 일각에서는 금융당국과 은행권의 가계대출 증가 노력이 빛을 발할 경우, 연내로 가계부채 비율이 100% 아래로 내려갈 수 있다는 긍정적 전망도 제기된다.
다만 전문가들은 정부가 가계대출 축소를 위해 보다 적극적으로 움직이지 않으면 상황이 오히려 악화할 것이라 보고 있다. 정부의 부동산 규제 완화 정책이 가계대출 증가세를 견인한 만큼, 책임을 지고 확실히 경제 뇌관을 관리해야 한다는 분석이다. 실제 지난해 예금취급기관(예금은행+비은행권) 가계대출 잔액이 줄어드는 동안 정부 정책금융 가계대출은 눈에 띄게 증가했다. 주택도시기금과 한국주택금융공사가 공급한 주택담보대출의 증가 규모만 총 28조8,000억원(약 216억 달러)에 달한다.
가계부채가 ‘금융위기’ 초래한다?
부풀어 오른 가계부채는 한국 경제의 거대한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고금리 기조 속 이자 부담을 견디지 못한 가계가 줄줄이 부실화할 경우, 경제 전반에 엄청난 충격이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먼저 타격을 입는 것은 얼어붙은 부동산 시장이다. KB금융지주 경영연구소가 지난달 부동산 전문가 172명과 공인중개사 523명, 자산관리전문가(PB) 73명을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조사 결과에 따르면, 공인중개사와 PB 각 79%가 주택가격 하락이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부동산 시장 전문가는 74%가 집값 하락을 전망했다.
고금리 기조 속 가계부채 급증을 견인한 부동산 가격의 ‘거품’이 꺼져가는 가운데, 무리한 대출을 동반해 부동산을 매입했던 소위 ‘영끌(영혼까지 끌어모아 매입)족’들은 벼랑 끝에 내몰렸다. 이자 부담이 꾸준히 불어나는 가운데, 부동산 경기 침체로 주택 매각에 난항을 겪으며 상환 여력을 잃게 된 것이다. 대출금을 연체하는 차주들은 눈에 띄게 증가했고, 이는 은행권의 부실 리스크로 이어졌다.
실제 4대 금융그룹(KB·신한·하나·우리)의 지난해 말 기준 추정손실은 총 1조9,660억원(약 15억 달러)으로 집계됐다. 이는 1년 전(1조3,212억원) 대비 48.8% 증가한 수준이자 역대 최대치다. 전문가들은 은행권 손실 증가의 원인으로 △경기 침체로 인한 취약 차주들의 자산 건전성 악화 △부동산 PF(프로젝트 파이낸싱) △고금리로 인한 연체 등을 지목한다. 사실상 가계부채 위기가 금융위기로 전이될 가능성이 매우 높아진 셈이다.
정부, 확실한 금융 정책 방향 수립해야
이에 한국은행과 정부는 본격적인 딜레마에 빠졌다. 부동산 거품을 무너뜨리기 위해 금리를 높은 수준에서 유지할 경우 가계부채 부실 리스크가 증가하고, 가계 안정을 위해 금리를 인하할 경우 인플레이션 위협이 가중되는 난감한 국면에 맞닥뜨린 것이다. 한국은행은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한 긴축 유지를 택했다. 한국은행 금융통화위원회는 2021년 8월부터 지난해 1월까지 기준금리를 3%포인트(연 0.50%→3.50%) 인상하고, 2월부터 동결을 이어가며 높은 금리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문제는 정부가 한국은행과 ‘엇박자’를 탔다는 점이다. 한국은행이 긴축 기조를 유지하는 동안, 금융당국은 시중은행에 오히려 대출금리 인하를 종용했다. 50년 만기 주택담보대출을 최초 출시하며 가계대출 증가를 부추기는가 하면, 해당 상품이 가계부채 급증의 주범이라며 갑자기 중단시키는 등 시장 내 혼선을 빚기도 했다. 이외로도 정부는 수많은 부동산 규제 완화 정책을 내놓으며 고금리 기조 속 부동산 시장 부양에 힘썼다. 그 결과 정책금융발(發) 가계대출 잔액은 눈에 띄게 증가했고, 취약 차주들의 부실 리스크 역시 급증하게 됐다.
정부의 주먹구구 대처 속 불어난 가계부채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이 돼 한국 경제를 압박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정부와 금융당국이 정확한 금융 정책 방향을 확립하고, 시장에 일관적인 신호를 보내야 한다는 비판을 내놓고 있다. 정부가 주도적으로 질서 있는 가계부채 축소 대책을 제시, 시장 내 리스크를 점진적으로 해소해 나가야 한다는 지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