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미국으로 새어나가는 반도체 인재, 핵심기술 유출 위험 급증
중국, 파격적 혜택 앞세워 해외 반도체 인재 유치 나섰다 높은 급여·우수한 교육 여건 등으로 인재 흡수하는 미국 지난해 반도체 분야 핵심기술 유출만 15건, 자국 인재 붙잡아야
중국이 반도체 등 첨단 산업 인재 유치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후발 주자의 한계에서 벗어나기 위해 막대한 금전적 혜택을 ‘미끼’로 제시, 유능한 해외 인재를 적극 유치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을 비롯한 세계 각국이 반도체 패권을 잡기 위한 ‘인재 확보’ 경쟁에 착수한 가운데, 국내 반도체 업계의 인재·기술 유출에 대한 우려는 깊어져만 가는 실정이다.
중국의 ‘인재 빼내기’ 전략
28일 업계에 따르면 올해 초 중국의 대표적 싱크탱크 중국과학원 반도체 연구소는 ‘우수 청년 과학 청년 기금(펀드)’ 프로그램 지원자를 모집했다. 해당 펀드는 중국 과학기술부가 관리하는 국가자연과학재단(NSFC)이 해외 우수 인재 유치를 목적으로 조성한 기금이다. 프로그램 참여자는 교수로 근무하며 3년간 연구비 900만 위안(약 16억5,000만원), 연봉 75만 위안(약 1억3,000만원)을 받게 된다. 이 밖에도 △생활비 100만 위안(약 1억8,000만원) △특별 보조금 150만 위안(2억8,000만원) △사무실과 주택 제공 △자녀의 베이징 내 학교 입학 △배우자의 구직 활동 지원 등 파격적인 조건이 다수 제시됐다.
지난해 8월에는 중국이 해외 반도체 인재를 모집하는 프로그램을 비밀리에 운영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당시 로이터통신은 중국이 ‘천인(千人)계획’ 프로그램을 중단한 지 2년 만에 ‘치밍(Qiming)’이라는 이름의 해외 전문 인력 유치·양성 프로그램을 부활시켰다고 전했다. 중국이 산업정보기술부가 직접 감독하에 ‘기밀’을 포함하는 과학 및 기술 분야에서 인재를 모집하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 당국은 치밍 프로그램을 통해 확보한 인재에게 주택 구입 보조금과 300만~500만 위안(약 5억4,500만~9억1,000만원) 상당의 계약 보너스를 지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다이아몬드, 가방, 자동차 등 추가적인 파격 혜택을 내걸었다는 전언이다. 당시 로이터 측은 “중국 치밍에 선발된 지원자 대부분은 미국 명문 대학에서 공부했으며, 적어도 하나의 박사 학위를 갖고 있다”며 “MIT, 하버드, 스탠퍼드대학에서 교육받은 과학자들도 중국이 찾는 인재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다.
한국 반도체 인력의 중국행
중국 정부는 이 같은 막대한 ‘미끼’를 통해 세계 각국의 반도체 인재를 끌어모으는 데 성공했다. 한국 역시 예외는 아니다. 업계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부터 본격적으로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종합반도체기업(IDM) △반도체 설계기업 (팹리스) △반도체 후공정 기업(OSAT) △소재·부품·장비 기업 등 국내 반도체 시장 전반에서 전문 인력을 물색하고 있다. 특히 엔지니어, 임원으로 승진을 앞둔 기업 내 핵심 실무 인재 등이 타깃이 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업계에서는 최근 들어 중국의 ‘인재 빼가기’ 전략의 강도가 높아졌다는 비판이 흘러나온다. 중국 중앙 정부가 최근 수년간 이어진 반도체 투자 성과 제출을 요구하고 있으며, 이에 따라 한국 기업·인재 공략에 속도가 붙었다는 것이다. 최근에는 판교·분당 등 IT 기업이 밀집한 지역에 직접 R&D 센터를 개설해 한국 엔지니어를 채용하거나, 국내 팹리스 기업을 인수하는 사례도 등장했다.
문제는 중국으로 이직한 국내 반도체 인재들이 이전 직장에서 체득한 핵심 기술을 유출할 위험이 있다는 점이다. 실제 지난해 8월에는 전직 삼성전자·SK하이닉스 임원 A씨 등이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 설계 자료 등을 빼돌려 중국 내 복제 공장 설립을 시도하다 덜미를 잡힌 바 있다. 검찰은 이들이 빼돌린 반도체 공장 BED(Basic Engineering Data)는 삼성전자가 약 30년에 걸친 연구개발(R&D)·시뮬레이션 등을 통해 얻은 자료며, 최소 3,000억원, 최대 수조원 상당의 가치를 지닌 영업 비밀이자 국가핵심기술이라고 지적했다.
미국으로 빠져나가는 반도체 연구원들
더 큰 문제는 국내 반도체 인력 유출처가 중국에 국한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일례로 미국 메모리 업체 마이크론은 글로벌 시장 점유율 1위를 달리는 한국의 고대역메모리(High Bandwidth Memory, HBM) 인재를 주시하고 있다. 최근에는 SK하이닉스의 HBM(고대역폭 메모리) 핵심 임원 B씨가 미국 파운드리 마이크론으로 이직하려다 법원에 의해 제지를 받기도 했다. 지난해 8월 B씨의 마이크론 취업 사실을 확인한 SK하이닉스가 제기한 전직 금지 가처분 신청이 이달 초 인용된 것이다.
미국 정부의 보조금 지원을 바탕으로 반도체 사업 확장에 나선 미국 인텔 역시 한국의 파운드리 인재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 IT 업계 관계자는 “미국으로 가면 2배 이상의 연봉을 받을 수 있는 경우가 많고, 특히 자녀가 있는 경우 교육 방면에서도 이점이 있다”며 “이미 국내 반도체 연구원들이 인텔 등 미국 기업으로 대거 이직한 것으로 알고 있다”고 전했다.
산업통상자원부에 따르면 지난해 ‘국가핵심기술’을 포함한 전체 산업 기술의 해외 유출 적발 사건은 23건이었으며, 이 중 15건은 반도체 분야에서 발생했다. 반도체 분야 인재·기술 유출 문제의 심각성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수치다. 글로벌 반도체 패권 경쟁이 격화하는 가운데, 업계에서는 인재·기술 유출을 막기 위한 ‘특단 대책’이 필요한 때라는 지적이 흘러나온다. 직군·직종·성과에 따른 보상을 차등화하고, 융통성이 부족한 성과 보상 체계를 손질해 자국 반도체 인재를 붙잡아둘 필요가 있다는 시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