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둔화 흐름에도 여전한 ‘金과일’, 프루트플레이션 지속될 듯
물가 3개월 만에 2%대 둔화에도 체감물가와는 '괴리'
농산물가격 20.3% 상승, 국제유가 추이도 지켜봐야
일조량 감소· 에너지가격 상승으로 과일값 폭등 이어질 전망
지난달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2.9%로 석 달 만에 2%대로 떨어졌다. 다만 배 가격아 역대 최대 상승률을 기록하는 등 채소·과일 물가 급등세는 이어지면서 서민들이 체감하는 생활물가와는 괴리가 커지고 있다. 여기에 이상기후와 일조량 감소에 에너지가격 상승까지 더해져 과일 생산량이 감소하고 있는 탓에 당분간 과일 가격 폭등은 지속될 것으로 전망된다.
4월 물가 석 달 만에 2%대, 과일값은 전년 대비 2배 올라
2일 통계청이 발표한 ‘4월 소비자물가 동향’에 따르면 지난달 소비자물가지수는 113.99로 전년 동월 대비 2.9% 올랐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올해 1월 2.8%에서 2~3월 2개월 연속 3.1%에 머물다가 석 달 만에 다시 2%대로 떨어졌다.
상품별로는 농·축·수산물이 전년 동월 대비 10.6% 올랐다. 축산물과 수산물 가격 상승률은 각각 0.3%, 0.4%로 안정적인 흐름을 보인 반면 농산물은 20.3% 급등했다. 특히 농산물은 전체 물가를 0.76%p 끌어올렸는데, 이는 농산물이 전체 물가 상승률 2.9%의 4분의 1가량을 견인했다는 의미다.
물가의 기조적 흐름을 보여주는 근원물가지수들은 2%대 초반까지 상승 폭이 둔화했다. 농산물 및 석유류 제외 지수는 지난해 같은 달보다 2.2% 오르면서 전달 기록한 2.4%보다 0.2%p 하락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방식의 근원물가 지표인 식료품 및 에너지 제외 지수는 2.3% 올랐다.
반면 생활물가지수는 전년 동월 대비 3.5% 상승했다. 전월 기록한 3.8%와 비교하면 상승 폭은 둔화했지만, 여전히 높은 수준이다. 특히 ‘밥상 물가’와 직결되는 신선식품지수는 전월 대비 3.7% 하락했지만, 전년 동월 대비로는 19.1% 오르면서 급등세를 이어갔다.
상승 폭도 7개월째 두 자릿수를 이어갔다. 신선식품지수는 생선, 해산물, 채소, 과일 등 기상 조건이나 계절에 따라 가격 변동이 큰 55개 품목 물가를 반영한다. 사과 80.8%, 배 102.9%로 신선과실이 38.7% 상승하면서 3월 기록한 40.9%에 이어 40% 안팎의 급등세를 이어갔다. 특히 배는 관련 통계가 집계된 1975년 1월 이후로 최대 상승 폭을 기록했다. 채소 가격도 불안한 흐름이 이어지고 있다. 지난달 토마토는 전년 동월 대비 39.0% 올랐고 배추는 봄배추 출하를 앞두고 32.1% 상승했다. 양배추 역시 48.8%로 1년 11개월 만에 가장 높은 상승률을 기록했다.
과일값 폭등, 올해도 계속된다
과일 가격이 치솟는 가장 큰 이유는 지난해 내내 지속된 이상기후로 생산량이 급감한 탓이 크다. 봄철에는 냉해, 서리 등 저온 피해로 착과가 부실했고, 여름철에는 집중호우와 고온으로 과수원 유실과 낙과 발생이 늘었다. 수확기마저 탄저병 유행과 잦은 우박 등 악재가 겹치면서 생산량이 크게 감소했다. 농촌경제연구원에 따르면 지난해 사과 생산량은 39만4,000톤으로 전년 56만6,000톤보다 30% 감소했다. 사과를 제외한 감귤, 복숭아, 포도, 배, 단감 등 주요 과일도 사정은 비슷하다. 배 생산량은 전년 대비 27% 감소했고 복숭아는 15%, 단감은 32% 각각 감소했다.
그렇다고 수입으로 대체하기도 어려운 상황이다. 정부가 동식물 위생·검역 조치(SPS)에 따라 사과와 배를 수입 금지 품목으로 지정해 놓고 있기 때문이다. 사과를 수입하려면 접수·착수 통보·예비위험평가부터 최종 고시까지 총 8단계를 거쳐야 하는 데다 검역 문턱을 낮추기도 쉽지 않다. 더욱이 사과와 배의 수입절차 간소화는 지역 농민의 반발을 야기하는 초대형 이슈다. 최근 과일 가격이 급등하면서 수입절차를 간소화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오고는 있지만, 정부는 간소화가 어렵다는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문제는 국내 과일 가격이 최소 가을 수확 때까지는 높은 수준을 유지할 것으로 전망된다는 점이다. 농림축산식품부 관계자는 “1년에 한 번 수확하는 사과 등은 생산량 변동에 따라 이듬해 공급량과 가격에 큰 영향을 받는다”며 “사과와 배는 햇과일 출하 전까지 가격 강세가 불가피하다”고 선을 그었다. 사과·배 검역 문제와 관련해서는 “상대국과 협의를 거쳐야 하는 문제여서 한쪽의 의지만 가지고 쉽게 해결될 문제는 아니다”라며 “우선은 수입대체 품목, 납품단가 인하, 할인 지원 등을 확대하는 방안에 집중하고 있다”고 말했다.
과일·채소 가격 폭등 원인은 ‘에너지가격’
최근 한국의 과일 가격 상승세는 세계 주요국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수준이다. 지난달 글로벌 투자은행(IB) 노무라증권이 우리나라를 비롯해 G7(미국·일본·영국·캐나다·독일·프랑스·이탈리아)과 전체 유로 지역, 대만의 1∼3월 월평균 소비자물가지수(CPI) 상승률을 비교한 결과, 한국의 과일류 물가 상승률은 월평균 36.9%로 14.7%의 상승률을 보인 대만보다 2배 이상 높았다.
한국, 대만에 이어 높은 상승률을 기록한 나라는 이탈리아 11.0%, 일본 9.6%, 독일 7.4% 등으로 과일 가격이 많이 뛰긴 했지만 10% 안팎 수준이었다. 채소류 상승률도 한국이 10.7%로 가장 높았다. 한국 다음으로는 이탈리아 9.3%, 영국 7.3% 순으로 집계됐다. 신선 과일·채소류가 단일 품목으로 발표하는 미국의 상승률은 월평균 1.3%에 그쳤다.
노무라증권은 그동안 주로 지적됐던 일조량 등이 아닌 에너지 비용 증가를 과일 가격 폭등의 주요 원인으로 짚었다. 노무라증권이 올해 1~3월 전기·가스요금, 연료비 등 에너지 관련 항목을 가중 평균해 산출한 에너지류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보면 한국은 월평균 1.1%로 프랑스 2.7%에 이어 두 번째로 높았다. 특히 2월 국제유가 상승분이 반영된 3월만 떼어놓고 보면 2.9%의 상승률로 10개국 중 가장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노무라증권은 “한국은 석유 등의 에너지 해외 의존도가 절대적으로 큰 탓에 중동 사태의 영향을 크게 받아 에너지가격이 높은 상승률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실제로 농가 현장에서는 급등한 연료비를 감당할 수 없어 농사를 포기할 수밖에 없다는 고충이 쏟아지고 있다. 지난겨울 면세유 가격과 전기요금이 고공행진을 이어가면서 시설농가들의 난방비 부담이 커졌기 때문이다. 이에 정부가 유가연동보조금과 고효율 냉난방 설비 지원 등을 대책으로 제시했지만, 한시적·제한적인 방편에 불과하다는 비판이 많았다.
결국 농사를 포기하는 농가가 늘어나면 출하되는 농산물이 적을 수밖에 없고, 생산량 감소는 가격 폭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반복될 수 있다. 한 업계 관계자는 “정부가 일조량 등으로 인해 작황이 부진하다고 하지만 요즘은 다들 하우스 재배를 하기 때문에 실질적인 이유는 유류비 폭등”이라며 “결국 과일 가격 폭등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에너지 지원 확대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