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보다 채무조정 더 급했던 우크라이나, 트럼프 당선 가능성 올라간 덕에 급한 불 껐다
우크라이나, 전쟁 통에 국제 채권단과 강대강 협상, 37% 헤어컷 요건 관철시켜
국가 부도났던 그리스도 20% 헤어컷 불과, 우크라이나 정부의 협상 승리라는 평가 지배적
트럼프 전 대통령 당선 후 우크라이나 부도 가능성 감안해 채권단의 타협이라는 반박도
막대한 전쟁 비용으로 인해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는 우크라이나가 채권단과 200억 달러(약 27조원) 규모의 채무 구조조정에 극적으로 합의했다. 그간 채권단과의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었으나,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선 가능성이 높아지면서 분위기가 급반전된 결과다.
밀고 당기던 우크라이나 채권 감액 협상, 디폴트 직전 어렵사리 합의
22일(현지시간) 세르치 마르첸코(Sergii Marchenko) 우크라이나 재무장관은 민간 채권단, 국제통화기금(IMF) 및 양자 파트너들과 수개월 논의한 끝에 공공 외채의 포괄적인 구조조정에 대해 원칙적으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통상 ‘헤어컷(Hair-cut)’에 해당하는 채권 일부 면제 합의로 채권단의 3분의 2 이상이 동의해야 효력이 발휘된다. 지금까지 우크라이나가 내건 조건에 채권단이 불만을 표하면서 논의가 길어졌으나, 최근 트럼프 전 대통령에 대한 피격 사건을 거치며 우크라이나에 관한 미국의 추가 지원 가능성이 낮아진 것을 반영해 합의가 급진전됐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밝힌 구조조정 안에 따르면 채권단은 채권 액면가의 37%인 87억 달러(약 12조원)를 할인하기로 했다. 나머지 액면가의 40%는 내년부터 이자를 지급하는 2029~2036년 만기 채권으로, 23%는 2030~2036년 만기 채권 두 가지로 나눠 롤오버(만기 연장)한다. 두 번째 채권은 2027년까지 이자를 지급하지 않지만 2028년 우크라이나 경제성장률이 IMF 기대치를 넘어서면 지급액이 증가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우크라이나는 향후 3년간 114억 달러(약 15조8,000억원)를 절감한다는 계획이다.
국제 금융 전문가들은 지난 2015년 IMF가 그리스 국가 채무의 20%에 대해 헤어컷을 제공했던 것을 감안할 때 우크라이나가 이번 협상에서 큰 수혜를 입었다고 설명한다. 협상 관계자들에 따르면 이번 합의는 우크라이나의 채무 상환 기한을 일주일가량 앞두고 이뤄졌다. 우크라이나는 2022년 러시아의 전면 침공 이후 채무 상환을 2년 유예해줄 것을 요청했고 채권단도 이를 받아들였다. 채무 구조조정이 이뤄지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는 국가 부도(디폴트)에 처할 수도 있었던 만큼, 사실상 ‘벼랑 끝 전술’을 감행한 것이다.
극적인 합의에 이르렀지만 채권단 일부에서는 여전히 불만의 불씨가 남아있다. 지난해 12월부터 우크라이나 정부는 채권단과 헤어컷 협상을 진행했으나, 협상 초기 금융사들은 전면적인 채무 유예에만 찬성할 뿐, 채권 소각에는 부정적인 반응이었다. 그러나 전쟁 2년차인 지난해 전년 대비 5.3% 성장한 우크라이나 경제와 동맹국의 현금 지원 등이 채권단에 신뢰를 심어준 덕분에 상황이 급반전 됐다. 앞서 지난달 채권단은 2027년까지 25억 달러(약 3조5,000억원)의 이자를 요구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측 제안의 4배에 달하는 금액이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협상 실패를 염두에 두고 디폴트에 대비한 법안을 통과시키는 등 양측이 팽팽히 맞섰다.
헤어컷 받아낸 우크라이나 정부의 역량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
글로벌 금융계에서는 대체로 부담스러운 헤어컷 조건을 관철시킨 우크라이나 정부의 역량을 높게 평가하는 분위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으며 국가부도 사태를 겪은 그리스의 경우도 30%의 헤어컷과 만기 20년 연장을 줄곧 요구했으나, 채권단은 20%의 헤어컷에만 일부 동의했을 뿐이다. 당시 주요 채권국인 독일의 우호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헤어컷 협상에 난항을 겪었던 것에 비해, 전쟁 중 디폴트를 불사하면서까지 채권단과 강대강으로 맞선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뚝심이 승리했다는 평가가 나온다.
다만 일각에서는 지난 13일(현지시각) 트럼프 전 대통령이 피격당하면서 미국 대선 판세가 급변한 것이 헤어컷 합의의 주원인이라 평가 절하의 목소리가 나오기도 한다. 미국의 현금 및 무기 지원이 현재 전황을 유지할 수 있는 절대적인 경제적인 근거인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지원에 부정적인 트럼프 전 대통령이 다시 집권할 경우 사실상 우크라이나 자체가 디폴트를 피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채권단 측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당선이 확정될 경우에는 사실상 채권 회수가 불가능하다고 판단, 이번 협상에서 우크라이나 정부가 원하는 조건을 다 들어주는 걸로 일종의 ‘양심적 마지노선’을 그은 것이 아니냐는 해석이다.
19일 트럼프 전 대통령과 젤렌스키 간 전화 통화도 영향
국제 관계 전문가들은 지난 19일(현지시간) 트럼프 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 간의 전화 통화도 이번 채권 협상에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내다본다. 자세한 대화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지만, CNN에 따르면 트럼프 전 대통령은 크림반도 일대의 장기 평화를 위한 종전 협상을 암시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어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의 영토 경계선 변경 조건에 우크라이나 정부가 강력한 거부 의사를 보이고 있으나, 트럼프 전 대통령이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의 전쟁 개입에 꾸준히 반대해 왔던 것에 비춘 정책 노선 변경이 예측된다는 분석도 나온다.
아울러 5년 전 대선 당시 트럼프 전 대통령이 조 바이든 대통령의 둘째 아들인 헌터 바이든이 우크라이나 정부와 맺은 비밀 협약에 대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조사를 요구했다 묵살된 점도 향후 양국 관계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전망된다. 당시 헌터 바이든의 각종 엽색 행각 및 비리 지원 자금이 우크라이나 정부에서 나온 것이라는 의혹이 확산됐고, 트럼프 선거 캠프에서는 사실이 밝혀질 경우 바이든 대통령이 선거에서 낙마할 것으로 내다봤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당시 정부가 중립을 지키면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선거 패배의 원인이 됐다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한편 국제 금융 전문가들은 우크라이나에 지급된 주요 지원이 중단될 경우 2025년 이후 우크라이나가 이번 헤어컷 조건도 지키기 어려울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의 주요 농지 및 지원시설이 완전 파괴된 데다, 옥토로 불렸던 영토 상당 부분이 러시아로 넘어갈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게다가 주요 채권단의 대부분이 서유럽의 은행 및 자산운용 기관들인 만큼, 서유럽 금융시장이 2025년 이후 한 차례 대규모 상각을 진행해야 할 가능성도 높게 점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