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산, 금감원 압박에 두 번째 정정 신고서 제출 ‘사업구조 재편 정면 돌파’
알짜 기업 두산밥캣 기업가치 저평가에 소액주주 반발
두산에너빌리티 인적 분할 두고도 주주가치 훼손 논란
금감원, 증권신고서 정정 요구하며 지배구조 개편 제동
두산그룹의 사업구조 개편에 대한 금융감독원의 압박이 장기화되는 모양새다. 앞서 금감원은 두산로보틱스와 두산밥캣의 합병과 관련해 주주가치 훼손 논란이 제기되자 두산 측이 제출한 증권신고서의 정정을 요구하며 제동을 걸었다. 이어 이복현 금감원장이 증권신고서에 부족한 점이 있을 때 횟수에 제한 없이 정정을 요구하겠다는 입장을 재차 밝혔다. 금감원이 두산 측의 정정 신고서를 계속해서 반려할 경우 두산은 다음 달로 예정된 주주총회를 열지 못할 가능성도 있다.
이복현 “신고서에 부족함 있다면 무제한 정정 요구”
21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16일 두산로보틱스는 두산밥캣 합병과 관련해 2분기 실적이 반영된 정정 증권신고서를 공시했다. 지난 6일에 이어 두 번째 정정 신고서다. 앞서 지난 7월 두산그룹은 클린에너지, 스마트머신, 첨단소재 등 3대 부문을 핵심 축으로 하는 사업구조 재편 계획을 발표하고 두산에너빌리티와의 분할 합병, 두산밥캣과의 주식 포괄적 교환·이전 등을 담은 증권신고서를 금감원에 제출한 바 있다.
하지만 금감원은 중요 사항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며 두산 측에 증권신고서의 정정을 요구했다. 자본시장법에 따르면 △증권신고서에 중요 사항이 거짓으로 기재되거나 △중요 사항이 기재되지 않거나 △그 내용이 불분명한 경우 금감원이 기업에 정정을 요구할 수 있다. 금감원의 정정 요구에 두산 측은 지난 6일 분할·합병 이유와 향후 계획 등을 더욱 상세하게 담은 정정 신고서를 제출했다.
그러나 이틀 후인 지난 8일 이복현 금감원장은 “증권신고서에 부족함이 있다면 횟수에 제한을 두지 않고 정정 요구를 하겠다”고 밝히며 정정 신고서를 반려했다. 이 원장의 발언 이후 두산은 금감원의 강경한 입장을 고려해 반기보고서에 업데이트된 확정 실적을 추가하고 가독성 제고를 위해 글자 크기를 키운 두 번째 정정 신고서를 제출했다. 두산그룹은 “기존의 분기 실적을 반기 실적으로 업데이트하고 지배구조 개편과 관련한 설명을 추가·보완한 자진 정정 공시”라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두산의 증권신고서 효력 발생일은 두 번째 신고서의 접수일인 19일 기준으로 7거래일이 경과한 오는 28일로 변경됐다. 하지만 업계에서는 ‘무제한 정정’의 가능성을 시사한 금감원이 또다시 신고서를 반려할 것이란 전망이 지배적이다. 이 경우 효력 발생일이 한두 차례 더 미뤄져 다음 달 25일로 예정된 임시 주주총회이 무산될 가능성이 높다. 주총은 개최 2주 전에 소집을 통지해야 하므로 오는 9월 10일까지는 증권신고서의 효력이 발생해야 한다. 금감원의 수용 여부는 효력 발생 전일 결정된다.
두산, 로보틱스·밥캣 간 합병 비율 논란에 정면 돌파
두산의 사업구조 재편과 관련해 금감원이 주시하는 쟁점은 두산밥캣 1주당 두산로보틱스 0.63주로 책정된 양 사의 합병 비율이다. 지난해 두산밥캣의 영업이익은 1조3,899억원으로 ㈜두산의 영업이익 1조463억원을 넘어섰다. 모회사의 영업이익 대부분을 책임지며 다른 계열사의 손실분까지 상쇄한 것이다. 이에 비해 두산로보틱스는 2015년 설립 이후 단 한 번도 흑자를 내지 못했다. 지난해 실적은 매출 530억원에 영업손실 192억원을 기록했다.
개편안 발표 직후 주주들 사이에서는 적자 기업인 두산로보틱스와 알짜 기업인 두산밥캣의 합병 비율을 두고 ‘주주가치 훼손’이란 비판이 쏟아졌다. 연간 1조원대 영업이익을 내는 핵심 자회사 두산밥캣을 내놔야 하는 두산에너빌리티 주주들의 반발도 거셌다. 최근에는 두산에너빌리티의 주가가 주식매수청구권 가격인 2만890원 아래로 하락하면서 주가가 반등하지 못할 경우 대규모 주식매수청구가 발생해 합병이 무산될 가능성도 제기된다. 두산에너빌리티는 소액주주의 지분율이 63.4%에 달해 이들의 결정이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
특히 상장사인 두산에너빌리티의 인적 분할에 대해서는 최대 주주인 ㈜두산과 오너 일가를 위한 지배구조 개편에 속내가 있는 것이 아니냐는 지적도 나온다. 현재 두산 오너 일가는 ㈜두산이 두산에너빌리티의 지분 30%를 확보하고 두산에너빌리티는 두산밥캣 지분 46%를 확보해 그룹 내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하지만 사업구조 개편이 완료되면 ㈜두산이 두산로보틱스 지분 42%, 두산로보틱스가 두산밥캣 지분 100%를 확보해 그룹을 지배하게 된다.
이처럼 주주가치 훼손 논란에 이어 오너 일가를 위한 지배구조 개편이란 의심이 확산되자 두산그룹은 주주 설득에 나섰다. 지난 4일 박상현 두산에너빌리티 대표, 스콧 박 두산밥캣 대표, 류정훈 두산로보틱스 대표는 각 사 홈페이지에 주주 서한을 게시하고 “사업구조 개편과 관련해 사전 설명이 충분하지 못해 심려를 끼쳐 드린 점 송구하게 생각한다”며 사과했다. 각 사의 핵심과제와 비전 등에 대해서도 상세히 설명했다. 이어 지난 16일 공시한 정정 신고서에는 논란이 된 합병 비율 등을 원안대로 유지했다. 금감원의 압박에 정면 돌파를 선택한 것이다.
“금감원이 위법하지 않은 일에 권한 남용” 비판도
문제는 논란이 된 두 상장사의 합병 비율이 ‘자본시장법 시행령 제176조의5’에 따라 시가총액을 기준으로 산정됐다는 점이다. 직전 한 달·일주일·전일 주가의 가중 평균값을 적용해 실제 기업가치를 온전히 반영할 수 없다 보니 주주들 입장에서는 불합리하게 비칠 수 있다는 얘기다. 할인이나 할증이 아예 불가능한 것은 아니지만 전례를 보면 오히려 금감원은 상장사 간 합병에서 할인이나 할증을 적용했을 때 문제를 제기해 왔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업계에서는 금감원이 위법하지 않은 행위에 제동을 건 것을 두고 ‘권한 남용’이라는 비판이 쏟아진다. 내부적으로도 그동안 밸류업 자율 공시와 주주 간 소통을 강조해 온 이 원장이 소액주주의 가치 훼손을 이유로 ‘무제한 정정’을 요구한 것은 과도한 개입이라는 의견이 있다. 한 금융투자업계 관계자는 “금감원이 점점 초법적 기관이 되고 있다”며 “법적 근거에 따른 행위도 공시할 때마다 사실상 금감원의 허락을 구해야 한다면 기업은 운신의 폭이 너무 좁아진다”고 지적했다.
금융당국의 개입이 오히려 반대매수청구권을 행사하려는 주주의 권리를 빼앗을 수 있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주주들이 유불리에 따라 결정해야 할 일에 금감원이 너무 깊이 관여하면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두산밥캣의 주주들은 사업구조 재편에 반대할 경우 주당 5만459원에 반대매수청구권을 행사할 수 있는데, 이날 두산밥캣의 주가 4만700원을 기준으로 환산하면 24.0%의 수익을 낼 수 있는 셈이다. 반대매수청구권은 총행사 금액이 1조5,000억원을 넘지 않아야 하는데 현재로서는 제한 금액을 넘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증권가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