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인 골라가던 회계사들 ‘구직난’ 직면, 새내기 3명 중 1명은 낭인될 판
빅4 회계법인 신입 채용 축소, 로컬 합쳐도 200여 명 '구직난'
일반 기업체 취업도 가능하지만 감사 업무 경험 못 쌓아
미지정 회계사 속출에 금융당국 향한 비판 확산
올해 역대 최대인 1,250명에 달하는 공인회계사 합격자 중 삼일·삼정·한영·안진 등 ‘빅4′ 회계법인은 물론 로컬 회계법인 어느 곳에도 들어가지 못하는 인원이 200명에 이르는 것으로 나타났다. 공인회계사(CPA) 시험에 합격하고도 정식 회계사가 되지 못하는 역대급 ‘미지정 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의미다. 정부가 회계사 선발 인원을 축소했다는 감사원 지적에 채용 규모를 무작정 늘린 탓이란 지적이 나온다.
역대 최다 합격 1,250명, 빅4 채용은 842명
24일 회계업계에 따르면 삼정회계법인은 23일부터 10월 2일까지 합격한 신입 수습 회계사들을 대상으로 교육을 실시한다. 삼정회계법인은 빅4 중 가장 많은 306명을 채용했다. 301명을 뽑은 삼일회계법인도 24일부터 신입 회계사 교육을 시작했고 EY한영은 이달 중으로, 안진회계법인은 10월 안에 신입사원을 받는다. 두 법인은 각각 120명, 115명을 뽑았다.
총 842명의 신입 회계사가 빅4에 들어오지만, 업계 분위기는 어수선하다. 1,250명 중 842명을 제외한 408명, 즉 합격자 3명 가운데 1명이 빅4 회계법인에서 커리어(경력)를 시작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공인회계사시험 합격자는 일정 기간 실무수습기관에서 근무를 해야 정식으로 전문 자격을 얻을 수 있는 만큼 대부분 주요 기업 감사를 포함해 실무 경험 기회가 풍부한 빅4 회계법인을 선호한다.
빅4 회계법인에 들어가지 못한 408명은 그 아래 단계인 로컬 회계법인에 취직해야 하는데 이 길은 더 좁다. 로컬 회계법인은 최근 부진한 업황의 직격탄을 받은 데다 원래부터 신입보다 경력직을 선호하는 까닭이다. 업계 관계자들은 로컬 회계법인 채용 규모를 150~200명 정도로 보고 있다.
그나마 로컬 회계법인의 러브콜이라도 받으면 다행이다. 진짜 문제는 로컬 법인에도 들어가지 못한 나머지 200여 명이다. 시험에 합격했지만 어떤 회계법인에도 들어가지 못한 이들은 답답한 마음에 오픈채팅방 등을 개설해 불만을 토로한다. ‘똑같이 합격해도 학벌(SKY)·연줄에 밀려서 빅4를 못 가는 상황이 웃프다(웃기고 슬프다)’, ‘한국공인회계사에서 매년 공인회계사 적정 선발 규모에 대한 설문조사를 하는데, 어차피 채용 인원을 늘릴 거면 이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등의 이야기가 쏟아진다.
수요예측 실패와 인원 과다선발, 금융당국 ‘책임론’
업계는 취업 대란의 근본적 원인을 수요예측에 실패한 금융당국에서 찾는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금융위원회는 2024년 합격 인원을 정할 당시 “회계감사 품질을 유지하는 수준에서 시장의 수요와 공급을 종합적이고 균형 있게 고려해 결정했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당시 감사원의 지적에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인원을 늘린 것 아니냐는 비판이 거셌다. 실제 금융위원회는 회계사 선발 인원을 2018년 850명에서 2019년 1,000명으로 늘린 뒤 2020년부터 2023년까지 4년간 1,100명을 유지했다. 장기적인 관점에서는 수급 조정이 필요하다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지난해 8월 감사원이 “공공기관 등 비(非)회계법인이 공인회계사 공급 부족으로 채용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지적하자 올해 선발 인원을 1,250명으로 늘렸다. 채용은 적고 합격자만 넘쳐나는 상황이 발생한 배경이다.
한 회계법인 관계자는 “선발 인원을 축소했다는 감사원 지적에 무작정 채용 규모를 늘리고, 사실상 민간에 책임을 전가한 것 아닌가”라며 “소수 대형 회계법인에만 신입 회계사들이 몰리고, 미지정 인원은 늘어나 양극화가 심해지면 전반적인 초기 교육 수준이 낮아져 향후 부실 감사에 대한 위험성이 높아질 수밖에 없다”고 비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올해 사정이 어려운 빅4 채용인원이 합계 600명대까지 주저앉을 수 있었으나 취업대란을 우려한 금융당국의 직간접적인 압박 때문에 울며 겨자 먹기로 채용 인원을 늘린 것”이라고 짚었다. 금융당국의 실수를 시장에 전가했다는 얘기다. 합격생 사이에서도 “수요 예측에 실패한 금융당국의 잘못”이라는 원성이 나오고 있다.
일반 기업체 취업 시 필드 투입 부담
물론 최종 합격자들이 꼭 회계법인에만 취업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공기업 등 일반 기업체에 취업이 가능하다. 다만 실무 교육 기간이 회계법인과 다르다는 점에서 혼란이 가중될 것이라는 전망이 짙다. 일각에선 “전문직 자격증이 있는데 배부른 소리 아니냐”는 비판이 나오기도 하지만, 업계 특성을 고려하면 수습 교육기관을 찾지 못한 회계사들이 어려운 처지에 놓인 것은 사실이다. 일반 기업이 굳이 돈을 주고 수습도 떼지 못한 회계사를 채용할 이유도, 명분도 없기 때문이다.
공인회계사는 수습 교육을 거쳐야 정식 회계사 자격을 얻는다. 보통 회계법인에 취업하면 당해 기말 감사 실무에 투입되고, 이듬해 감사 실무까지 마친 후 다음 해 6월경 마지막 테스트를 거친 후 비로소 정식 회계사로 거듭난다. 약 1년 반의 수습 기간을 거쳐야 하는 셈이다.
그러나 일반 기업체에 입사하게 되면 회계법인 소속과는 달리 수습 기간 3년을 채워야 한다. 감사 업무를 한 번도 경험할 수 없는 만큼 이른바 ‘필드’에 뛰어들기에도 부담이다. 이와 관련해 금감원 관계자는 “그간 빅4 회계법인들이 회계사를 모두 흡수해 다른 업계에서 회계사 부족 사태에 허덕였다”며 “(공인회계사) 합격생들이 외국어 등 자격증 이외의 노력을 기울여 취업처를 찾는 큰 흐름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금감원 차원에서도 현황 파악 등 대책을 고민해 보겠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