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물산 ‘엘리엇’과 소송전서 승소, 법원 “지연이자 지급 의무 없어”
엘리엇, 삼성물산 상대 약정금 청구 소송 제기
747억원 약정금에 지연손해금 267억원 요구
法 "주식매수대금 일체에 지연손해금 포함 안 돼"
미국계 헤지펀드 엘리엇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제기한 약정금 청구 소송에서 법원이 삼성물산의 손을 들어줬다. 삼성물산이 엘리엇에 지연이자를 지급할 의무가 없다고 본 것이다.
엘리엇, 약정금 청구소송 1심 패소
27일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22부(재판장 최욱진)는 엘리엇이 삼성물산을 상대로 낸 267억원대 약정금 반환 청구 소송에서 원고 청구를 기각했다. 엘리엇은 지난 2015년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당시 삼성물산 주가가 지나치게 저평가돼 손해를 봤다며 법원에 주식 매수 가격 조정 신청을 냈다가 이듬해 삼성물산과 합의에 도달해 이 조정 신청을 취하했다.
삼성물산은 이에 대한 대가로 엘리엇에 세금을 제외한 659억원을 지급했다. 이 사실은 지난해 엘리엇이 대한민국 정부를 상대로 낸 국제투자분쟁(ISDS) 과정을 통해 뒤늦게 알려졌다. 당시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에 제출된 서면에는 “청구인(엘리엇)은 최근 삼성물산에서 원천징수세와 기타 세금을 공제한 659억263만4,943원의 추가 지급금을 수령했고, 이 금액은 2022년 5월 12일 지급됐다”는 내용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엘리엇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난해 10월 미정산 이자가 더 있다며 267억2,200여만원의 약정금 반환 청구 소송을 낸 것이다. 삼성물산과 2016년 맺은 비밀합의 약정서에 따라 받은 추가지급금 적용 기간에 문제가 있어 지연이자를 더 받아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주식 매수 대금 원본에 포함되는 일체 비용에는 지연손해금이 포함돼 있지 않다”며 “(앨리엇이) 지연손해금을 주장할 이유가 없다”고 판단했다.
유대인 금융 권력 레이더에 걸린 삼성물산
엘리엇은 이른바 ‘행동주의 투자’를 표방하는 헤지펀드로, 그 동안 주주의 권익 확보를 명분으로 내세워 다양한 기업과 국가를 공격해 막대한 이익을 거뒀다. 특히 수년간 끈질긴 법적 분쟁과 여론몰이 등의 다양한 수단을 써가며 목표로 했던 수익을 얻어내, 일부는 썩은 시체를 먹는 대머리독수리(vulture)의 이름을 딴 ‘벌처펀드’라 부르기도 한다. 삼성물산도 엘리엇과 첨예하게 대립하던 시점에 엘리엇의 별칭을 인용해 주주들에게 의결권을 위임해 줄 것을 읍소한 바 있다.
그런데 이를 두고 유대인에 대한 공격이자 인종차별이라는 비판이 나왔다. 문제가 된 것은 삼성물산이 자사 홈페이지를 통해 ‘헤지펀드 엘리엇’을 자세히 소개한 카툰(Cartoon)이었다. 카툰에서 엘리엇은 불법 행위를 반복하는 악덕 자본으로 묘사됐는데, 경제 위기에 처한 국가의 채권을 저가에 사서 해당 국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이익을 얻은 콩고의 투자 사례까지 자세히 소개했다. 압권은 단연 대머리독수리로 묘사된 엘리엇의 모습이었다. 삼성물산이 엘리엇을 벌처로 형상화해 홈페이지에 게재한 것은 다분히 의도적이었다.
물론 엘리엇의 창업자 폴 엘리엇 싱어(Paul Elliott Singer)가 미국인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것도, 막강한 유대인 인맥을 통해 성장해 온 것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지만, 삼성이 엘리엇을 악덕 자본으로 규정하면서 글로벌 금융시장을 주무르는 유대인들의 가장 예민한 부분을 건드린 발단이 됐다. 결국 논란은 일파만파 확산했고, 미국 월스리트저널(WSJ)이 한국에서 ‘반유대주의적(Anti-semitic)’ 편견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는 내용의 사설을 쓰면서 불씨를 더욱 키웠다. 이에 미국 내 유대인 단체는 공식적으로 삼성물산에 항의했고, 유대인 출신 국회의원들도 이에 힘을 실었다.
자칫 한미 외교문제로 비화될 조짐까지 보이자 삼성물산은 그제서야 황급히 해당 카툰을 삭제했다. 이어 한광섭 커뮤니케이션 총괄(전무) 명의로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를 규탄한다(We categorically denounce anti-Semitism in all its forms, and we are committed to respect for all individuals)”고 발표하며 사태를 봉합했다. 당시 재계 일각에선 삼성이 사태 진화를 위해 이스라엘에 상당한 대가성 투자를 진행했을 가능성까지 거론됐다. 공식적인 투자 발표는 없었으나 삼성전자, 삼성물산의 기업 규모에 비춰볼 때 어떤 형태의 투자든 공시 의무를 질 수준의 규모는 아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엘리엇, 韓 정부에도 1,300억원 배상 요구
엘리엇과 삼성물산의 법적 공방은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엘리엇이 2018년 7월 PCA에 한국 정부를 상대로 중재신청서를 접수하면서다. 이후 PCA는 2018년 11월 중재판정부를 구성, 2019년 4월부터 2020년 11월까지 엘리엇과 한국 정부로부터 의견서를 제출받아 서면 심리를 했고, 2021년 11월 15∼26일에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구술 심리를 진행했다.
엘리엇은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당시 대통령(박근혜)과 보건복지부 등의 압박으로 국민연금공단이 합병에 찬성했고, 이 때문에 손해를 입었다며 한국 정부가 이를 배상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엘리엇은 당시 삼성물산 지분 7.12%를 보유한 3대 주주였는데, 삼성물산 1주당 제일모직 0.35주로 정해진 합병비율이 삼성물산 주주에게 불리하다며 합병에 공개 반대했었다. 엘리엇은 중재의향서를 통해 “(한국 정부가) 외국인투자자에게 피해를 주고자 차별적·독단적으로 합병이 이뤄지도록 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한국 정부는 엘리엇의 배상 요구에 대해 “형사판결을 봐도 전직 대통령과 당시의 행정부 등으로 인해 합병이 제안됐다거나 합병안이 통과되기에 충분한 주주의 찬성을 받게 됐다는 증거는 없다”며 “민사법원은 합병의 유효성을 인정하면서 합병에 정당한 경영상 목적이 있었다고 봤고, 합병비율이 현저히 불공정하다고 볼 수도 없다고 판단했다”고 반박했다. 하지만 PCA 중재판정부는 지난해 6월 20일 우리 정부에 5,358만6,931달러(약 703억원)와 지연 이자·법률 비용 등을 포함해 총 1,30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정했다. 이에 불복한 법무부는 중재지인 영국법원에 취소 소송을 제기했으나, 영국 상사법원은 지난달 초 1년 만에 각하 결정을 내렸다.
현재 우리 정부는 항소를 제기한 상태로, 업계에선 정부가 항소를 포기할 경우 현재 진행 중인 미국계 헤지펀드 메이슨 매니지먼트와의 ISDS에도 부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우려가 작용했단 분석이 나온다. 메이슨 또한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합병 과정에서 손해를 입었다며 손해배상금 1억9,139만 달러(약 2,600억원)와 판정일까지 연 5% 월 복리 이자를 지급하라고 주장하고 있다.
다만 항소 절차가 진행됨에 따라 엘리엇에 지급해야 할 이자와 소송 비용이 더 소요될 수도 있다. 2023년도 정부 회계 결산자료에 따르면, 복지부는 2019년부터 지난해까지 약 5년간 엘리엇 ISDS 대응 예산으로 △법무법인 자문료 △국외출장 비용 △중재판정부 운영비용 등 약 170억4,900만원을 사용했다. 또 현재 연 5% 복리로 매일 1만 달러(약 1,300여원) 이상의 이자가 붙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