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ELS 손실 우려에 배상기준안 마련, 소비자 보호 기조 속 도외시 된 ‘자기책임 원칙’
금감원, 홍콩 ELS '조 단위 손실' 우려에 배상기준안 마련 검토 중 고객 상당수 고령 투자자란 점이 불완전판매 가능성 키웠다? 금융 업계 "'피해자=선량한 시민' 프레임 속 편향적 접근 우려스러워"
금융 당국이 홍콩항생중국기업지수(홍콩H지수) 주가연계증권(ELS)의 불완전판매 관련 소비자 배상기준안 마련을 검토하고 있다. 상품 만기가 속속 도래하는 가운데, H지수가 반 토막 이상이 난 탓에 수조원의 손실이 예고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ELS 손실 우려 사태에 당국이 사후약방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다는 비판이 나온다. 특히 금융권 안팎에서는 정부의 과도한 소비자 보호 조치가 자칫 자본시장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한다.
불완전판매로 밝혀지면 원금 배상해야
4일 금융권에 따르면 금융감독원은 홍콩 ELS 상품에서 불완전판매가 인정될 경우 배상비율 기준안을 만들어 금융사와 소비자 간 분쟁에 대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내년 초 ELS 상품의 손실이 본격화할 경우 신속하게 분쟁조정에 착수하기 위함으로, 금감원이 대표 민원 사례에 대한 기준안을 내놓으면 이를 근거로 은행들이 자율 조정한다. 소비자가 불완전판매나 부적절한 권유를 당한 것으로 밝혀질 경우 원금 전액이나 일부를 돌려줘야 한다.
ELS는 기초자산이 되는 지수가 만기(통상 3년)까지 일정 수준을 넘으면 약속한 수익률을 지급한다. 그런데 홍콩 ELS가 집중 판매된 2021년 초 고점(12,106)을 찍었던 지수는 줄곧 하락해 현재 6,000포인트 초반이다. H지수는 홍콩 증시에 상장된 중국기업 중 50개 종목을 추려 산출되는데, 중국 경제 침체로 직격탄을 맞은 것이다.
문제가 불거지자 이미 5대 시중은행(KB국민·신한·하나·우리·NH농협)에서는 홍콩 ELS 판매를 모두 중단했다. 5대 은행에서 판매된 홍콩H지수 ELF·신탁(ELT)의 내년 상반기 만기 도래 규모는 지난달 17일 기준 8조4,100억원으로 집계됐다. 이뿐만 아니라 하반기에도 4조원 규모의 만기가 도래한다. 금융권은 H지수가 반등하기 어려운 상황인 만큼 상반기 손실 규모만 3조원 이상일 것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번 배상기준안의 쟁점은 홍콩 ELS에 가입한 투자자 중 고령 투자자와 재가입자가 많다는 점이다. 금융 당국은 ELS 고객 상당수가 파생 상품을 잘 모르는 노년층이란 점이 불완전판매 가능성을 키우는 부분이라고 지적한다. 투자자와 적합하지 않은 상품을 권유하면 불완전판매 배상 때 추가적인 손실 배상 비율이 높아진다. 실제로 과거 DLF 배상비율 기준안에서는 만 65세 이상에는 5%P, 80세 이상은 10%P가 가산된 바 있다. 반대로 투자자의 금융투자상품 거래 경험이 많거나 거래 금액이 많다면 은행의 책임을 감경하는 사유가 된다.
홍콩 ELS 분쟁조정에 대해 배상기준안 방식이 적용될 경우 파생결합펀드(DLF)·사모펀드 사태 이후 두 번째다. 통상 분쟁조정은 일대일 단건 처리가 원칙이지만, 금융당국은 사모펀드 분쟁 당시 배상기준안을 채택했었다. 금감원은 앞서 DLF·라임·옵티머스 불완전판매와 관련해 손해액의 40~80%를 배상하도록 기준을 마련한 바 있다. △적합성 원칙 △설명의무 위반 △부당권유 등에 따른 기본 배상비율을 정한 다음, 투자자의 자기 책임 사유를 투자자별로 가감 조정해 최종 배상비율을 도출했다.
금감원은 당초 KB국민은행에 대한 현장 점검 기한을 지난 1일로 예정했으나 이번 주까지 연장했다. 홍콩 ELS를 판매한 시중은행, 미래에셋증권 등 증권사도 서면조사를 진행 중이다. 한편 홍콩 ELS 투자자들은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 피해자 모임 카페를 개설하고 은행의 불완전판매를 규탄하는 집회를 준비하고 있다.
은행권 “피해 아닌 ‘손실’이다”
하지만 은행권에서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금융 당국이 불완전판매를 인정한다면 은행은 천문학적인 손실을 떠안아야 하고, 이는 주가지수 연계 상품과 같은 파생상품 시장의 위축으로 이어진다는 지적이다. 한 금융권 관계자는 “금융 당국이 ‘피해자는 선량한 시민’이라는 프레임에서 다소 편향적으로 접근하지는 않을지 우려스럽다”고 말했다. 불완전판매로 인한 피해가 확실한 경우와 그렇지 않은 일반적인 투자 손실 사례는 명확하게 구분해서 접근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ELS를 불완전판매로 제재하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제기된다. 사모펀드 사태와는 달리 ELS는 공모형인 데다, 수년간 은행이 문제없이 판매해 온 상품인 만큼 ‘피해’가 아닌 ‘손실’에 가깝다는 것이다. 근거로는 은행권이 H지수 ELS 판매 과정에서 금융소비자보호법(금소법) 등에 따라 녹취·자필서명 같은 방법으로 고객의 이해 여부를 확인했는 점을 제시한다. 한 시중은행 관계자는 “이율이 정해진 예적금이 아닌 투자를 선택하는 고객은 리스크를 감수하고 보다 높은 수익률을 얻겠다는 것”이라며 “수익이 나면 당연히 투자자 몫으로 가는데, 손실이 났을 때는 판매사가 책임져야 한다면 이는 시장 논리에 맞지 않는 일”이라고 꼬집었다.
금융 소비자의 권익 보호 강화 기조 아래 ‘자기책임 원칙’ 확립은 뒷전으로 밀렸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불완전판매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항상 ‘피해자 구제’가 우선시 됐다는 이유에서다. 자기 책임 원칙은 자본시장법 근간을 이루는 기본 원리로, 금융상품을 거래할 때 금융 소비자 역시 거래의 주체로서 계약의 체결과 이행, 그 결과에 따른 최종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의미다.
관리·감독 책임이 있는 금융 당국을 향한 지적도 나온다. 김득의 금융정의연대 대표는 “2019년 DLF 사태 당시 ELS 같은 고난도 상품은 은행에서 판매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이 많았다”며 “설명 의무 같은 내부 통제가 실효성 있게 이행되는지에 대해서는 당국의 관리·점검이 부족했다고 본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