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그룹 대규모 리밸런싱에 일제히 줄 선 증권사들, 자기자본으로 영구채 인수하기도
SK그룹 재정비 계획 본격화, 계열사 매각 등으로 증권업계 이익 확대 전망
자기자본으로 영구채 인수 요구한 SK온, 파트너 찾기 위한 '충성도 테스트'인 듯
증권업계 당면 과제는 'SK와 관계 맺기', "하반기 증권사 먹거리 SK그룹에 달렸다"
국내 증권사들이 SK그룹의 동향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다. 계열사 통폐합, 투자 유치, 지분 매각, 기업공개 등 대형 이벤트가 줄줄이 예정돼 증권사 입장에서 거래 주선, 자문 등을 맡아 돈을 벌 기회가 있을 것으로 보고 있어서다.
SK그룹 사업 재조정 작업 착수
15일 재계에 따르면 SK그룹은 최근 전반적인 사업 재조정 작업에 착수했다. 반도체·배터리·바이오로 대표되는 핵심 사업에 투자를 집중하고 비주력 사업에는 힘을 뺀다는 구상이다. 계열사가 많은 만큼 정리 작업도 대대적으로 이뤄질 예정이다. SK그룹은 지주사인 SK를 중심으로 SK이노베이션, SK스퀘어, SKC, SK디스커버리 등 4개의 중간 지주회사가 여러 자회사를 갖고 있는 구조다. SK그룹은 5월 공정거래위원회 발표 기준 계열사만 219개에 달해 국내 대기업 집단 중 계열사가 가장 많은 곳으로 꼽힌다.
이 같은 SK그룹의 재정비 계획은 증권사들 입장에서 ‘큰 장’에 해당한다. SK그룹 내 계열사 매각, 인수·합병 등에서 자문, 주관 업무를 맡아 수수료를 챙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증권사들은 SK그룹과 손을 잡기 위해 거듭 노력을 이어가는 모양새다. 통상 증권사는 회사채 발행, 주식 상장을 주관하며 발행된 금액에 비례해 수수료를 받는데, 증권사 간 발행 업무 능력, 발행비용에는 큰 차이가 없다. 결국 증권사 입장에선 ‘대어’ SK그룹과 얼마나 긴밀한 관계를 맺느냐가 향후 실적에 가장 큰 변수로 자리 잡았다는 의미다.
증권업계-SK ‘관계 맺기’ 돌입, 상환 리스크에도 영구채 인수
SK온이 처음 발행한 영구채에 증권사들이 대거 투자한 것도 이 같은 ‘관계 맺기’의 영향이다.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SK온은 지난달 25일 자본으로 인정되는 영구채를 5,000억원 발행해 자금을 조달하고 부채비율을 낮춘 바 있다. 이때 해당 영구채는 국내 증권사들이 모두 나눠 가져갔다. 우선 한국투자증권(키스이제이제칠차 포함)이 2,550억원을 인수해 가장 많이 가져갔고, 이어 NH투자증권(900억원), 삼성증권(600억원), KB증권(500억원), 신한투자증권(300억원), SK증권(150억원) 등이 뒤를 이었다. 표면 이자율 6.42%로 신용 등급 대비 유망한 투자처가 아니었던 점을 고려하면 파트너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포석 깔기’였다는 평가가 대부분이다.
단순 중개가 아니라 자기자본으로 영구채를 인수한 점도 이런 정황을 뒷받침한다. SK온은 신종자본증권의 인수 조건으로 ‘증권사가 가급적 직접 보유할 것’을 제시했다. 증권사에 발행 중개를 넘어 사실상 직접 투자를 요청한 것이다. 통상 증권사들은 신종자본증권 발행에서 발행 주관 및 중개를 맡는다. 채권 인수 이후엔 곧바로 연기금 등 국내외 기관들에 재매각하는 게 일반적이며, 이 과정에서 받는 수수료가 증권사들의 주요 수익원이 된다. 자금운용한도는 제한적인데 채권을 직접 보유하게 되면 자금이 묶이기 때문에 증권사들은 이를 선호하지 않는다. SK그룹이 대규모 딜을 앞두고 있지 않았다면 증권사들이 SK 측의 요구 조건을 들어줄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SK 매각예정자산만 9,467억원 수준
다만 SK그룹의 요구 조건을 들어준다 해도 증권사 입장에서 큰 손해인 건 아니다. SK그룹의 리밸런싱(사업 재구조화) 규모가 그만큼 크기 때문이다. 증권업계 일각에선 “하반기 증권사 먹거리는 SK그룹에 달렸다”는 언급이 나올 정도다. 실제 SK의 1·4분기 사업보고서에 따르면 SK의 매각예정자산은 총 9,467억원에 달한다. 페루LNG 컴퍼니가 2,780억원 규모로 가장 많고, 중국 농업기업 조이비오그룹 1,667억원, 중국 물류기업 ESR케이만 1,412억원 순이다. 매각예정자산이란 기업이 매각을 계획하거나 매각을 통해 회수될 것으로 분류한 자산을 의미한다.
이외에도 SK이노베이션과 SK E&S의 합병이 예정돼 있으며, SK스퀘어에서 주력 사업인 SK하이닉스를 제외한 여러 자회사를 매물로 내놓을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상장을 준비하다가 엎어진 원스토어, 11번가, 티맵모빌리티 등 역시 지분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다. 매각예정자산으로 분류하지 않은 비핵심 자산도 매각될 것으로 관측된다. 대표적으로 SK의 의약품 위탁개발생산(CDMO) 자회사 SK팜테코는 미국 버지니아주에 있는 의약품 제조 공장의 글로벌 제약사 매각을 검토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같은 맥락에서 배터리용 분리막 생산 기업 SKIET 지분 매각 시나리오도 나오고 있다. 증권업계가 SK그룹의 ‘충성도 테스트’에 큰 반발 없이 응해 준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