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풍-고려아연 지분 경쟁 ‘분수령’ 국민연금, 누구 손 잡을까
국민연금, 고려아연 지분 7.83% 보유
과거 표 행사 보니 ‘영풍 장형진 이사선임 반대’
'머니게임' 양상 경영권 분쟁, 커지는 국민연금 역할론
국내 최대 ‘큰손’인 국민연금이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의 캐스팅보트를 쥘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다. 최윤범 고려아연 회장 측이나 MBK파트너스·영풍 연합 측 어느 한쪽이 확실하게 승기를 잡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국민연금의 지분율이 7.83%(6월 말 기준)에 달하기 때문이다.
국민연금, 5년간 고려아연 경영진 안건에 92% 찬성
16일 금융투자업계에 따르면 고려아연은 오는 23일까지 자사주 공개매수를 진행한다. 고려아연이 계획대로 전체 주식의 10%를 사들여 소각하면 MBK·영풍 측 지분율은 42.74%, 최 회장 측은 40.27%를 확보하게 된다. 양측이 각각 장내에서 주식을 추가 매집하면 뒤집힐 가능성이 있는 격차라 어느 한쪽이 확실히 승기를 잡았다고 보기 어렵다.
이에 고려아연 지분 7.83%를 보유한 국민연금의 선택에 관심이 쏠린다. 국민연금이 현재의 지분율을 그대로 유지하면 고려아연의 자사주 소각 지분율은 8.7%로 커진다. 이전까지 국민연금은 주로 고려아연의 현 경영진 측의 손을 들어준 사례가 많았다. 국민연금은 2020년 3월부터 올해 3월까지 최근 5년 동안 고려아연 정기주총에서 모두 53건의 의안에 대한 의결권을 행사했는데 이 중 49건(92.5%)에 대해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표를 던진 의안 4건 중 3건은 이사 선임 안건이었다. 여기에는 2022년 3월 23일 열린 정기주총에 부의된 장형진 영풍 고문에 대한 이사 선임안도 포함돼 있다. 장 고문은 MBK파트너스와 손잡고 경영권 분쟁을 일으킨 인물이다. 당시 국민연금은 “장 후보는 과도한 겸임으로 충실의무 수행이 어려운 자에 해당해 반대한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국민연금 수탁자 책임 활동에 관한 내부 기준에 따른 결정이었다. 다만 당시 장 고문의 이사 선임 안건은 국민연금의 반대에도 동업 관계를 고려한 나머지 주주들의 지지를 받아 통과됐고, 장 고문은 현재 고려아연의 기타비상무이사로 재직 중이다.
국민연금은 장 고문 측과 최 회장 측의 경영권 분쟁이 수면 위로 드러난 올해 3월 주총에서도 현 경영진 편에 섰다. 지난 3월 주총에서 양측은 2건의 안건을 놓고 표 대결을 벌였는데, 2건 모두 국민연금은 찬성으로 의결권을 행사했다.
최 회장의 주가조작 관여 의혹 등 변수
그러나 MBK·영풍 측이 내세운 명분이 일부분 납득될 수 있다는 점은 변수다. 국민연금도 최 회장의 경영이 기업가치를 훼손했다고 판단할 경우 MBK·영풍의 손을 들어줄 수도 있다는 의미다. 현재 MBK·영풍 측은 △원아시아파트너스 펀드 투자 △하바나 1호 투자 △이그니오홀딩스 투자 사례를 근거로 고려아연 이사회의 기능이 훼손됐다고 지적하고 있다. MBK·영풍에 따르면 최 회장은 이사회 결의 없이 중학교 동창으로 알려진 지창배 대표가 운영하는 원아시아파트너에 5,600억원가량의 고려아연 자금을 투자했다. MBK는 고려아연의 원아시아파트너스 투자 대비 총손실액이 올 6월 말 기준 1,378억원(-24.8%)에 이를 것으로 추정했다.
고려아연 자금 약 1,000억원이 출자된 하바나 1호의 경우(고려아연 지분 99.8%) SM엔터테인먼트 주식 고가 매수, 시세조종에 활용된 혐의를 받는다. 2022년 인수한 전자폐기물 재활용 업체 이그니오홀딩스는 상세한 가치평가 내역이나 정보가 전달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아울러 MBK·영풍에 따르면 투자보고서를 요구한 장 고문 등 영풍 측의 요청도 묵살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관련해 글로벌 독립투자리서치 플랫폼인 스마트카르마는 리서치노트에서 고려아연 경영에 대한 MBK의 우려가 타당하다고 밝혔다. 고려아연의 형편없는 투자, 악화되는 수익성, 3자배정 유상증자, 자사주 교환으로 늘어난 유통주식 수 등 MBK의 우려 사항들은 설득력이 있다고 본 것이다.
스튜어드십 코드에 따라 의견 표명할 수도
일각에서는 국민연금이 경영권을 가르는 의결권 행사에 나서기엔 부담이 큰 만큼 중립을 견지할 것이란 관측도 적지 않다. 금융권에 따르면 최근 국민연금은 MBK의 6호 바이아웃 펀드에 출자한 자금 중 수백억원이 고려아연 공개매수 프로젝트에 투입되지 못하도록 MBK 측에 통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10조원 규모로 조성중인 MBK의 6호 바이아웃 펀드는 현재 MBK측의 고려아연 공개매수 자금원으로 활용되고 있다. 6호 바이아웃 펀드엔 미국과 캐나다, 유럽 등 주요 기관 투자자들이 핵심 출자자(LP)로 참여하고 있다. 여기엔 중국계 자본도 일부 포함돼 있으며 국민연금도 약 3,000억원을 출자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민연금은 이 가운데 고려아연 공개매수에 투입될 수백억원을 해당 용처에서 제외해 달라고 통보한 것이다.
이를 두고 시장에선 정치권과 금융당국 등이 고려아연 경영권 분쟁을 심각하게 들여다보고 있다는 점에서 국민연금이 출자금 관련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는 분석이 우세하다. 최근 국회에서는 국민연금의 자금 운용에 있어 사회적 책임을 더욱 강조하는 ‘MBK 방지법'(국민연금법 개정안)이 발의됐고, 금융 당국은 고려아연 공개매수 과열 양상에 대해 경고하면서 불공정거래 조사에 착수했다.
이런 가운데 오는 18일로 예정된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국감에서는 야권이 국민연금 자금의 고려아연 공개매수 투입에 관해 집중 질의할 계획인 것으로 전해졌다. MBK 방지법을 대표 발의한 박희승 더불어민주당 의원 등은 지난 7월 MBK가 국민연금 위탁운용사로 선정된 것에 대해 “국민의 노후를 책임지는 국민연금이 우리 근로자들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사모펀드에 돈을 맡기는 것은 책임투자 원칙에 맞지 않는다”고 지적한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최근의 스튜어드십 코드(의결권 행사 지침) 강화 기조 등을 고려하면 특정 의견을 표명할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스튜어드십 코드는 기관투자가가 수탁자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이행해야 할 일곱 가지 원칙이다. 투자 대상 회사의 중장기적 가치를 제고하기 위한 내부 지침 마련과 의결권 행사 등 활동에 대한 보고 의무를 담고 있다. 즉 국민연금이 양사 중 장기적으로 수익률을 제고할 수 있다고 판단되는 쪽에 힘을 실어줄 것이라는 분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