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부의 XR 융합산업 동맹, 생색내기 아닌 XR 국가전략 마련의 토대 되길
정부, XR 시장 달아오르자 업계 지원 나서 자체 공급망 구축 중요한 만큼 업계 환영 입장 연례적 회의 개최 아닌 R&D 투자로 기술 기반 강화해야
지난 16일 산업통상자원부가 16일 국내 확장현실(XR)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고 미래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XR 융합산업 동맹(이하 융합동맹)’을 출범한다고 밝혔다. XR은 가상현실(VR), 증강현실(AR), 혼합현실(MR) 등 현실과 디지털 가상 세계를 연결하는 몰입형 기술을 총칭하는 개념이다. 시장조사기관 아리테리에 따르면 XR 시장 규모는 지난 2021년 189억 달러(약 25조4천억원)였으나 오는 2026년에는 1,009억 달러(약 136조원)로 연평균 39.7% 성장이 전망되는 유망 시장이다. 특히 애플, 메타 등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참여로 경쟁이 본격화되고 있어 국내 XR 산업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 관련 산업간 유기적인 협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산업부, XR 관련 분야 기업 모아 협업체계 구축
이번 융합동맹은 XR 부품-세트-서비스기업, 유관기관들을 모아 국내 공급망 구축 및 협업 생태계를 조성한다는 목적으로 결성됐다. 앞서 산업부는 지난 5월 ‘디스플레이산업 혁신전략’에서 융합동맹의 결성을 예고한 바 있다. 앞으로 융합동맹 참여기업들은 XR 기술 로드맵 수립, 협업모델 개발, 전문인력 양성 등 기반 구축과 미래 전략 수립을 위해 긴밀히 협력할 예정이다.
이날 행사에는 산업부 관계자를 비롯해 삼성전자, LG전자, 삼성디스플레이, LG디스플레이, LG이노텍, 피앤씨솔루션, 레티널, 버넥트 등 관련 기업들이 참석했다. 기업들은 XR 산업의 주요 현안과 수출·투자 관련 애로사항을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간담회에서 인력양성, 해외시장 개척, 사업화 지원 등에 대한 의견을 나눴다.
주영준 산업부 산업정책실장은 “오늘 출범한 XR 융합산업 동맹을 통해 패널, 센서, 광학 소프트웨어 등 국내 기업들이 보유한 기술력을 하나로 결집하여 세계 XR 시장을 빠르게 선점하고, XR 기기와 관련 핵심 부품이 수출 주력 품목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하겠다”고 강조했다.
애플 ‘비전 프로’ 발표 이후 시장 후끈
XR에 대한 관심은 최근 애플의 ‘비전 프로(Vision Pro)’ 발표 이후 더욱 높아졌다. 혼합현실 헤드셋인 비전 프로는 애플이 지난 2014년 이후 9년 만에 선보이는 야심작이다. 업계에서는 애플이 과거 매킨토시와 아이폰으로 PC와 스마트폰의 대중화를 이끈 것처럼 비전 프로를 통해 새로운 메타버스의 시대를 열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전문가들은 비전 프로가 이미 디자인, 사용감, 기능 등 모든 부분에서 지금까지 발표된 모든 AR 및 VR 디바이스를 뛰어넘었다고 평가했다.
그동안 스마트폰 시장의 포화로 새로운 먹거리를 찾던 전자장비 업계도 비전 프로의 등장에 한껏 고무된 분위기다. 이와 관련해 김동원 KB증권 연구원은 “애플이 출시한 1세대 MR 헤드셋은 높은 가격과 낮은 편의성에도 불구하고 MR 헤드셋 시장 규모와 파이를 키우는 계기로 작용할 전망”이라며 “차세대 MR 헤드셋 시장은 애플 주도로 확대하고 한국 반도체와 디스플레이 업체들이 핵심 공급망에 참여해 향후 수억대까지 규모가 확대할 것으로 추정한다”고 전했다.
국내 협업 움직임 이미 2월부터 시작
XR 시장 선점을 위한 국내 협업 움직임은 이미 예전부터 있었다. 한국디스플레이산업협회는 지난 2월 15일 한국전자정보통신산업진흥회(KEA), 한국VR·AR콘텐츠진흥협회와 함께 XR 산업의 국내 전·후방 생태계 조성 등을 목적으로 ‘XR 산업 융합 얼라이언스’ 설립 업무협약(MOU)을 맺은 바 있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XR 생태계 선점을 위해 각축전을 벌이는 가운데, 디스플레이를 중심으로 전자, 콘텐츠 등 국내 기업 간 협업을 통해 비즈니스 기회를 마련하겠다는 취지에서다.
실제로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합종연횡을 통해 반도체 기판부터 디스플레이, 광학모듈까지 자체 공급망을 구축하고 있는 반면, 국내 전·후방 산업 간의 공급망은 아직 미흡한 실정이라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 의견이다. 이에 협회들은 업무협약(MOU)을 통해 XR 산업 융합 생태계 조성과 기업 육성을 위한 공급망·경쟁력 분석, 산업간 기술·비즈니스 협력, 공동 연구개발(R&D) 발굴, 인프라 조성 등의 활동을 추진하기로 협의했다.
정부, 시장개척 중심 지원보다 R&D 같은 근본전략 마련해야
한편 글로벌 기업들은 XR 산업을 ‘공간 컴퓨팅’ 분야로 정의하고 연구개발(R&D)에 열을 올리고 있다. 공간 컴퓨팅은 2D 화면을 직관적인 3D 형태로 전환하고 AR, VR, 햅틱 피드백 기술 등을 통해 사용자가 더 높은 몰입감을 경험하게 해준다. 이 기술이 고도로 발달할 경우 영화 ‘매트릭스’와 같이 완전히 시뮬레이션 된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 관계자에 따르면 현재는 초기 단계지만 IoT(사물인터넷), AR·MR, AI와 같은 실행 기술이 더욱 발달하고 새로운 위치데이터 소스가 활용되기 시작하면 디자인, 의료, 교육 및 원격 작업을 포함한 다양한 분야의 산업에서 주목받을 것으로 전망된다. 애플을 필두로 삼성, 메타 등 글로벌 기업들이 공간 컴퓨팅을 미래 먹거리로 주목하는 이유다.
그러나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해야 하는 국내 기업들은 XR과 같은 새로운 첨단 기술 개념이 등장할 때마다 자체 기술력 부족을 토로할 때가 많다. 업계 관계자들은 기술력 부족의 원인으로 해외 주요국에 비해 빈약한 국내 R&D를 지목한다. 최근 글로벌 패권 경쟁이 한창인 AI 시장의 상황을 보면 업계의 비판에 수긍이 간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 의견이다.
실제로 미국과 중국은 AI를 국가 기반 산업으로 육성하며 막대한 예산을 편성해 연구력을 집중하고 있다. 글로벌 정보분석 서비스기업 클래리베이트에 따르면 최근 5년간 생성형 AI 분야 연구논문 실적에서 중국은 1만9,318건으로 1위, 미국은 1만1,624건으로 2위를 차지했다. 반면 우리나라는 2,682건으로 5위를 기록했는데, 미국과 중국의 연구 실적과 비교하면 30%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이에 전문가들은 AI 시장이 향후 국내 국내총생산(GDP)의 약 4% 수준에 달할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자체 AI 기술을 갖추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되면 결국 시장을 모두 외국에 빼앗기는 AI 식민지로 전락할 수 있다고 우려한다.
공간 컴퓨팅 분야도 마찬가지다. 당장 눈앞에 보이는 해외시장 개척, 상품 개발도 중요하지만 정부가 우리만의 독보적인 기술을 확보할 수 있도록 R&D에 집중적으로 투자해야 한다. 전문가들도 수출 비중이 높은 탓에 국제 환경 변화에 큰 영향을 받는 우리 경제 구조를 고려하면 신기술 분야에 대한 국가 차원의 R&D 투자·지원, 인력양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신기술에 대한 국가 차원의 구체적인 R&D 전략이나 논의는 찾아보기 어렵다. 이번 산업부의 융합산업 동맹 행사가 공허하게 느껴지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