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방적인 사업장 이탈 멈춰” 외국인력 사업장 변경 제도 대폭 개선
국무조정실 ‘외국인력 사업장 변경 제도 개선 방안’ 발표 “불성실 인력 제재 수단 절실” 현장 애로 수렴 이주 노동계 “거주 이전까지 제한하려는 것” 날 선 반응
고용허가제를 통해 국내에서 근로 중인 외국인력의 사업장 변경 제도가 대폭 개선된다. 비전문직 취업 비자(E-9비자)를 가진 외국인력의 입국 초기 사업장 변경을 일부 제한하고, 장기근속 중인 성실 근로자에게는 그에 상응하는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국무조정실은 지난 5일 열린 외국인력정책위원회에서 이같은 내용을 담은 ‘외국인력의 사업장 변경 제도 개선 방안’을 발표했다.
“인력난 해소도 중요하지만, 활용에 차질 없어야”
산업 현장의 인력난 해소를 위한 대책으로 정부가 마련한 ‘고용허가제’에 따라 한국을 찾는 외국인은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올해 고용허가제를 통해 한국에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는 총 11만 명으로 역대 최고 수준이다. 국무조정실은 그동안 고용허가제와 관련해 제기된 사안들을 종합적으로 개선하기 위해 지난해 8월 노·사·전문가 및 고용노동부가 참여하는 실무 TF를 구성해 논의를 진행해 왔다.
이번에 발표된 개선 방안에서는 입국 초기 외국인 근로자의 사업장 변경으로 인한 현장의 인력 활용 차질을 최소화하는 데 집중했다. 이를 위해 입국 초기 사용자의 책임이 아닌 사유로 외국인 근로자가 다른 사업장으로 이동할 경우 곧바로 다른 외국인력을 신청할 수 있게 했다. 그동안 외국인 근로자가 사업장을 변경하는 경우 사용자는 7일에서 14일의 내국인 구인 노력 기간을 거쳐야만 새로운 외국인력을 신청할 수 있었다.
사업장 변경 허용 범위도 기존 업종 내 변경 조항에서 나아가 지역 내에서만 이동할 수 있도록 확대해 중소도시의 인력 이탈을 방지할 방침이다. 다만 조선업의 경우 인력난 해소가 시급한 데다 동일 권역 내 다른 사업장을 찾기 쉽지 않은 만큼 지역 이동에 제한을 두지 않았다.
사업장 변경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갈등 예방을 위해서는 전문가 지원단을 구성해 해소할 계획이며, 사업주와 외국인 근로자의 사업장 변경 사유 및 이력 등에 대한 정보제공도 강화한다. 업종 내 전국적 이동이 가능했던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앞으로는 일정한 권역과 업종 내에서만 사업장 변경을 할 수 있다. 또한 국내 적응도 및 업무 숙련도가 높은 외국인 근로자에 대해서는 한 사업장에서 장기근속할 수 있도록 재입국 특례 요건 완화, 장기근속특례 등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이들 숙련인력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된 사업장 변경 제한을 일부 완화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아울러 구인구직 과정에서 미흡한 정보 전달로 발생할 수 있는 갈등을 최소화하기 위해 입국 전 알선과 근로계약 체결 시 사업장과 근로자 양측에 제공하는 정보를 확대할 계획이다.
이번 개선 방안에는 외국인 근로자의 숙소에 대한 비용 기준도 제시됐다. 그동안 사용자가 외국인 근로자에게 숙소를 제공하는 경우에는 고용부 지침을 통한 징수 상한(월 통상임금의 8~20%)만 존재했다. 하지만 이는 지역별로 다른 숙소 시세를 반영하기 어려운 데다 상한의 적정성에 대한 노사의 의견도 크게 엇갈렸다. 숙소에 대한 비용은 지역별로 격차가 큰 만큼 지방고용노동관서의 권익보호협의회에서 정기적으로 가이드라인을 제시할 방침이다. 외국인 근로자의 주거환경 개선을 위해서는 공공기숙사를 적극적으로 설치하는 지자체에 고용 한도 상향, 사업장 선발 시 가점 부여 등 혜택을 주고 신규 고용 허가 사업장에 대한 숙소 모니터링도 강화할 방침이다.
이날 국무조정실은 생산가능인구 감소 등 산업 현장의 변화에 발맞춰 체계적인 외국인력 관리대책을 수립하고 추진할 기구로 ‘외국인력 통합관리 추진 TF’ 발족과 함께 운영 계획도 발표했다. 윤석열 대통령이 지난달 26일 한덕수 국무총리와의 주례회동에서 “각 부처에 산재해 있는 외국 인력을 시장 변화에 맞춰 탄력적으로 통합 관리할 방안을 강구하라”고 지시한 데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외국인력 통합관리 추진 TF는 방문규 국무조정실장이 팀장을 맡고 기획재정부, 법무부, 행정안전부, 산업통상자원부, 고용노동부, 중소벤처기업부 등 관계부처 차관이 참여해 운영된다. 방문규 국조실장은 “매월 TF 회의를 통해 외국인력 제도 전반을 점검하고 산업 현장의 요구에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외국인력 통합관리 대책을 마련해 나가겠다”고 밝혔다.
“직업의 자유 침해” vs “불성실 인력에 대한 제재 수단 절실”
그동안 산업 현장에서는 외국인 근로자의 사업장 이동에 관한 규제 개선이 시급하다는 목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적지 않은 외국인 근로자가 자신보다 먼저 한국에 입국한 친척이나 지인들이 근무하는 사업장 또는 근무 환경이 더 나은 사업장으로 변경을 요구하면서 업무에 태만한 탓에 사용자와 근로자 간 마찰이 빈번하게 발생했던 것이다. 근로자의 태업은 사업장 내 근무 분위기에 악영향을 미치게 되는 만큼 생산관리에 차질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근로자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수밖에 없었다는 게 사용자들의 주장이다.
한 제조업체 대표는 “2년을 기다려 4명의 외국인 근로자를 고용했는데, 보름 만에 태업했다”며 “이들은 임금을 300만원 이상으로 올려주지 않으면 지인이 있는 사업장으로 가겠다고 말하며 사실상 업무에서 손을 놨다”고 토로했다. 해당 사업장은 결국 4명의 사업장 변경에 동의했고, 이 과정에서 이들의 입국 비용과 기숙사 마련 비용 등의 금전적 손실과 더불어 대체 근로자를 찾지 못해 회사 운영에 심각한 손해를 입었다. 중소기업 업계에서 “외국인 근로자의 잦은 사업장 변경이 정부의 중소기업 지원 정책을 무력화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해 11월 중소기업중앙회가 진행한 조사에서는 외국인 근로자 고용허가제에서 가장 시급하게 개선해야 할 점에 대해 30.1%의 응답자가 ‘불성실 외국인력에 대한 제재 장치 마련’을 꼽기도 했다.
반면 일부 외국인 근로자들은 사업장 변경을 제한하는 것이 직업의 자유를 침해한다는 입장이다. 일방적인 근무 시간 변경과 연장근로수당 미지급, 기숙사비 추가 공제 등을 이유로 사업장 변경을 희망했지만 이뤄지지 않아 직업의 자유를 침해당했다며 헌법소원을 제기한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헌법재판소는 사업장 변경 제한이 외국인 근로자의 기본권을 침해하는 것은 아니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해당 헌법소원에 대해 합헌 판결과 함께 “사업장 변경 사유 제한 조항은 중소기업 등이 안정적으로 노동력을 확보하는 데 그 목적이 있고 외국인 근로자에 대한 효율적인 고용관리를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며 “외국인 근로자의 일방적인 근로계약 해지나 갱신 거절은 산업 현장의 안정적인 인력 확보와 원활한 사업장 운영에 큰 어려움으로 작용한다”고 판결의 이유를 밝혔다.
이번 국무조정실의 사업장 변경 제도 개선 방안이 발표되자 외국인 근로자들은 즉각 반박했다. 한 이주노조 활동가는 “지금까지의 사업장 변경 요건도 외국인 노동자의 자유를 침해하는 강제노동이라고 할 수 있었는데, 더 큰 제한을 만들어 거주 이전의 자유까지 제한하려고 한다”고 지적했다. 또 “이번 조치가 외국인 노동자의 이탈을 도리어 부추기는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힘줘 말했다.
임금-노동환경 둘러싼 ‘동상이몽’
외국인 근로자의 불성실한 태도는 비전문직 인력에만 국한된 문제는 아니다. 지난해 울산 HD현대중공업 조선소에서는 특정활동 비자(E-7비자)로 입국한 외국인 근로자 9명이 사업장을 무단으로 이탈했다. 이들은 입국 후 업무에 투입된 지 불과 일주일 만에 말도 없이 사업장을 떠났다. 조선소 측에서는 “근로자들의 개인적인 일탈”이라고 말을 아꼈지만, 함께 일하던 동료들은 이들이 입국 전 예상했던 것보다 노동 강도가 높아 떠난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고용허가제를 통해 우리나라에 입국하는 외국인 근로자들은 내국인과 동일한 임금체계를 적용받는다. 이들 대부분이 베트남, 우즈베키스탄 등 비교적 저소득 국가에서 들어오고 있다는 점을 감안하면 숙소비 등을 공제해도 자국에서 벌 수 있는 임금과는 차이가 크다. 국내 조선소 외국인 근로자 통상 임금은 세전 약 270만원가량으로 알려져 있다. 만약 해당 임금이 노동 강도에 비해 터무니 없이 낮은 수준이라 인상이 불가피하다면, 사용자 입장에서는 원활한 의사소통이 가능하고 숙식 제공이 필요 없는 국내 인력을 채용하는 게 장기적으로 이롭다는 결론에 이를 수밖에 없다. 임금과 사업장 선택의 자유 등 고용 환경 조성에서 외국인 근로자와 고용주가 모두 수긍할 수 있는 타협점에 도달하기까지는 아직 적지 않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