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포럼] 미-일-필리핀 3국의 루손경제동맹, 미국의 동남아시아 경제 정책 시험대 될 수 있을까?
미국-일본-필리핀 3국 '루손경제회랑(LEC)' 이름으로 10년간 필리핀 인프라에 투자
미국의 동남아 역내 영향력 강화 여부, LEC 성패에 달려 있어
필리핀 내 '중국 지우기' 효과 기대도, 단 스카버러 암초 분쟁 후 美 불신 확산은 변수
[동아시아포럼] 섹션은 EAST ASIA FORUM에서 전하는 동아시아 정책 동향을 담았습니다. EAST ASIA FORUM은 오스트레일리아 국립대학교(Australia National University) 크로퍼드 공공정책대학(Crawford School of Public Policy) 산하의 공공정책과 관련된 정치, 경제, 비즈니스, 법률, 안보, 국제관계에 대한 연구·분석 플랫폼입니다. 저희 폴리시 이코노미(Policy Economy)와 영어 원문 공개 조건으로 콘텐츠 제휴가 진행 중입니다.
지난 4월 미국-일본-필리핀 3국 정상회담에서 루손경제회랑(Luzon Economic Corridor, LEC) 이니셔티브가 발표됐다. 10년 이내에 필리핀에 1,000억 달러(약 137조원)라는 막대한 투자를 기반으로 대규모 인프라를 구축하겠다는 구상이다. 전문가들은 LEC가 미국의 동남아 진출의 교두보라고 평가한다. 그간 중국이 동남아시아 일대에 행사했던 막대한 영향력의 흔적을 지우기 위한 핵심 전략이기 때문이다.
앞서 미국 국제개발처(US Agency for International Development, USAID)는 지난해 하반기에 2024년 동남아 예산으로 12억 달러(약 1조6,000억원)를 요청했지만 연방 정부와 의회에서 차례로 삭감됐다. USAID는 동남아 지역에 대한 해외 원조가 장기간 부족했다며 2019년부터 2024년간 합계액이 5억9,400만 달러(약 8,200억원)에 불과하다고 지적한 바 있다.
10년간 1,000억 달러 투자, 중국-동남아 경제 패권 경쟁에 활용
동남아 국가들은 빈곤에 허덕이면서 해외 원조 및 투자를 꾸준히 요구했으나 미국의 관심이 떨어졌던 데다, 일본도 지난 2000년대 이후 투자를 축소하면서 대부분 중국에 의존하게 됐다. 중국은 동남아에 대규포 인프라 프로젝트와 전략적 투자를 이어가면서 역내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키워왔다. 이에 동남아 국가들의 정치 권력자들은 중국의 자본에 의지해 정치 권력을 공고히했고, 유권자들에게 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확보하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출범한 LEC는 미국이 역내 경제적 영향력을 강화하고 정치·외교·군사 분야에 그 영향력을 확대하는 도구로 쓰일 것이라는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번 LEC 계획안에 따르면 초기 프로젝트로 8억6,800만 달러(약 1조2,000억원) 규모의 수빅-클라크 철도, 1억7,400만 달러(약 2,400억원) 규모의 클라크 국제공항 확장, 1억5,200만 달러 규모의 농업 이니셔티브가 포함돼 있다. LEC가 수빅만, 클라크, 마닐라, 바탕가스를 잇는 필리핀 육·해상 물류 관통로 건설 계획인 만큼, 향후 10년간 필리핀을 종단하는 대규모 인프라 건설이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아울러 미국은 배터리 및 반도체 회사들이 니켈, 코발트, 구리, 보크사이트 등 필리핀의 광물 자원에 접근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필리핀 정부는 미국 기업들 유치를 위해 세금 인센티브를 제공할 계획이다. 물류망이 개통되면 수만 개의 일자리가 창출되고, 공급망의 가치가 향상될 것으로 관측된다.
경제적 가치와 더불어 안보 영향력도 강화 전망
관계자들은 경제적 가치와 더불어 필리핀 일대에서 미국과 일본의 안보 영향력이 강화되는 것에 주목한다. LEC가 필리핀 루손섬에 자리 잡으면 중국의 서태평양 팽창 전략에 압박이 될 수 있다는 설명이다. 특히 루손섬이 발전소, 도로 같은 생활 인프라를 필리핀 내에서도 높은 수준으로 갖추고 있는 지역인 만큼, 미국 정부의 추가적인 인프라 투자가 루손섬 일대의 안정성을 높일 것으로 내다본다.
과거 로드리고 두테르테 행정부를 지지했던 필리핀 엘리트들이 중국의 일대일로 이니셔티브(Belt and Road Initiative, BRI)에서 받았던 혜택과 질적으로 다른 점도 특징이다. LEC는 현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행정부와의 제휴와 관계없이 미국 기업 및 필리핀 국민 모두에게 접근이 허용된다. 중국이 중국을 지지하는 엘리트들에게만 문을 열어줬던 것과 정반대의 ‘공개 정책(Open policy)’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필리핀 역내 전문가들은 마르코스 정권 이후에도 미국-필리핀 관계가 단절되지 않는 이상 LEC가 계속될 것이라 전망한다. 특히 10년간 1,000억 달러의 투자를 통해 대규모 일자리 창출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반미 대통령이 집권한다고 해도 LEC를 해체해 이득을 보긴 어렵기 때문이다. 실제 친중 정권이었던 두테르테 전 대통령도 재임 기간 동안 미국의 안보 지원과 투자를 약속받은 바 있다. 이렇듯 미국이 군사 쿠데타를 일으킨 캄보디아 정권과 정치적 긴장과 별개로 경제적 지원을 이어가는 것처럼, 필리핀 집권층의 성향이 바뀌더라도 경제적 협력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트럼프 재집권이 변수, 미-중 관계 변화가 미-필리핀 관계 변화에 영향 줄 수도
국제 관계 전문가들은 도널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재집권이 LEC에 변수가 될 수도 있으나, 중국에 대한 압박 강화는 물론 미국의 제조업이나 방위 산업에서 광범위한 지지를 얻을 수 있는 LEC를 굳이 포기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본다.
다만 반대로 LEC가 실패할 경우 필리핀 국민들이 지금보다 더 미국을 불신하고 중국에 의존하게 될 가능성이 높다는 점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중국이 과거 그랬던 것처럼 허위 정보로 필리핀 국민들을 선동할 경우, 미국에 대한 불신이 더 빠르게 확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필리핀을 제외한 대부분의 동남아 국가들은 중국에 대한 호의적인 시각이 크다. 미국의 친이스라엘 성향이 미국의 우선 순위를 잘 보여줬다는 중국의 선동에 따라 동남아는 미국에게 후순위라는 인식이 자리잡힌 영향이다.
미국이 지난 2012년 스카버러 암초(Scarborough Shoal, 중국명 황옌다오) 분쟁 중 필리핀을 지지하는 듯 보였으나 필리핀 함대가 후퇴했음에도 중국이 물러서지 않는 상황에서 돌연 발을 빼면서 현재 필리핀 일대에는 미국에 대한 불신이 깊게 자리잡은 상황이다. 그런 만큼 이번 LEC의 성패는 미국이 필리핀을 포함한 동남아 일대에서 영향력을 강화할 수 있는지를 판가름할 가늠자가 될 것으로 분석된다.
원문은 필리핀 대학 연합(Associated Universities Incorporated)의 알빈 캄바(Alvin Camba) 연구원과 덴버 대학(University of Denver)의 라이언 세이(Ryan Seay) 교수가 작성했습니다. 폴리시 이코노미의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영어 원문 기사는 The Luzon Economic Corridor as the United States’ Southeast Asian litmus test | East Asia Forum에 게재되었습니다.